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루시에게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사자, 마녀, 옷장』을 절친 오웬 바필드(Owen Barfield)의 딸이자 자신의 대녀(代女, goddaughter)인 루시 바필드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헌사에 적었습니다.

 

"너는 이제 요정 이야기를 읽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지만]...하지만 언젠가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될 게다."

 

루시는 당시 15살이었으니까 요정 이야기 책을 좋아하지 않을 나이였긴 합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루시가 언젠가는 다시 요정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아이는 크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아" 지게 되는 법이니까요.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또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된]"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얻는 것도 많지만 잃어버리는 것도 참 많습니다. 인생사가,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뭔가 잃어버리는 것이 꼭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고, 그래서 '세상'인 가 봅니다.


어른이 되면 잃어버리는 것들에 뭐가 있을까요? 동심(童心)을 잃게 되는데, 워즈워스의 말을 빌리자면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른들은 무지개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지요.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과학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볼 때는 아이들이 무지개를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귀엽긴 하지만, 아직 머리가 더 커야 합니다.


인류가 이제 머리가 클 만큼 컸다고 자부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근/현대'(modern) 입니다. 무지하고 몽매(蒙昧)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계몽(啓蒙)된 시대"(aufgekläartes Zeitalter), "성인(成人)이 된 세계"(world come of age)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은 더 이상 태양을 보고 절하지 않고, 무지개를 볼 때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대신, 현대인은 행성에 우주탐사선을 보내고,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 현상을 만들어내지요.


루이스는 현대 세계에서 스스로를 계몽되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해 『나니아 연대기』를 썼습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것들, 현대 세계에서 어른들이 잃고 살아가는 것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대부(代父, godfather)가 되어준 루시가 자라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대견스러워 했겠지만, 루시가 언젠가는 현대의 보통 성인들보다 더 성숙해져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는"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요정 이야기를 읽어본 지가 언제입니까?

 

Faerie

 

『나니아 연대기』는 '페어리 테일'(fairy tale)입니다. 그런데 루이스와 더불어 ('페어리 테일' 읽고 쓰는 어른들 모임이었던) 잉클링스(Inklings)의 멤버였던 J. R. R. 톨킨에 따르면, 'fairy tale' 은 본래 "요정(fairies)에 대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Faire"나 "Faerie"는 원래 "요정"이 아니라, 어떤 장소(place), "요정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즉, 페어리 테일은 어떤 특별한 '장소/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보면, 그 이야기에서는 '나니아'라고 하는 나라, 그 장소, 그 공간이 거의 하나의 '캐릭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이런 저런 요정들, 괴물들, 인물들이 나와서, 그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의 재미'를 찾는 분들은 『나니아 연대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고, 왜 아이들이, 또 어떤 어른들이 『나니아 연대기』를 좋아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난 다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실 하나입니다. 바로 '나니아'라는 공간, 그것입니다. "나니아에 가보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는 우리 안에 어떤 그리움을 일으킵니다.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神)인" 어떤 공간을 향한 그리움 말입니다. 나니아는 나무가 춤을 추고, 별들이 노래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입니다. 나니아가 이렇게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인 것은 이 나니아를 창조한 존재, 아슬란이 바로 그렇게 살아 생동하는 존재, 만물을 살아 생동하게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에서는 아슬란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춤판이 벌어집니다. 『마법사의 조카』에 나오듯이, 태초에 아슬란의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따라, 그 노래에 맞춰 나니아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국(雪國)

 

그런데 이 춤판이 그친 적이 있습니다. 나니아에 축제가 금지된 시절이 있습니다. 바로, 루시가 옷장을 통해 (처음) 들어가보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모든 것이 자기 색을 잃고 백설에 뒤덮여 있는 설국(雪國)이었습니다.

 

"나니아는 겨울이죠. 아주 오랫동안 겨울이었어요."

 

나니아에서 루시가 처음 만난 인물(?) 툼누스가 한 말입니다. 루이스는 단조로워지고 삭막해지고, 만물이 목소리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웃음을 잃고, 경이를 잃고,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세계를 동토, 설국 같은 곳으로 여겼습니다. 현대인은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주(宇宙)라는 집을 잃고, 텅 빈 공간 속을 부유합니다. 예전 사람들이 Cosmos(질서, 아름다움)라고 불렸던 우주를 이제 우리는 the Space(빈 공간)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텅 빈 우주”라는 제하의 글에서 C. S. 루이스는 “철학이 시작된 이래 일정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인간) 사유의 운동”이 있는데, 그 운동이 “모든 나무는 님프였고 모든 행성은 신(神)이었던” 세상, “풍부하고 생동했던 우주”를 “텅 빈 우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텅 빈 우주"란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유스타스가 "우리 세계"라고 부르는 그 세계입니다. 영국 학교에서 전형적인 현대 교육을 받은 그 소년은 나니아 나라에서 별 신(神) 라만두를 만나고서는 신기해마지 않으며 말합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별은 그냥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가스 덩어리이거든요!” 그 아이에게 라만두가 한 대답은 실은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현대세계에 던지고자 했던 일성(一聲)이었습니다.

 

“얘야, 사실 너희 세계에서도 별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곧 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란다.”(Even in your world, my son, that is not what a star is, but only what it is made of.”)

 

“가스 덩어리가 아니라면, 그럼 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와닿았다면, 이제 여러분은 페어리 테일을 다시 읽을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2020.4월호




posted by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