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바이블칼리지 _ 영성고전산책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1. 3. 6. 13:12

'산책길'은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와 협력하여 <영성고전산책> 온라인 강의를 진행합니다. 기독교 영성사에 중요한 열두 권의 고전을 선별하여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2021년 상반기에 개설되는 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권 : 어거스틴의 《고백록》(강사 : 이종태) _ 4월 9일-16일

제2권 : 닛사의 그레고리의《모세의 생애》(강사 : 남기정) _ 5월7일-20일

제3권 :《베네딕트의 규칙서》(강사 : 권혁일) _ 6월 4일-17일

 

수강료는 각 권당 3만원인데, 3강의를 모두 신청하시는 분들은 8만원에 수강하실수 있다고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두란노 바이블칼리지 웹사이트를 참조하세요.

 

 

posted by 바람연필

사순절과 영적 독서

기타/영성 관련글 2021. 3. 5. 16:45

사순절과 영적 독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십일을 일컫는 말이다. 왜 사십일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며 준비하신 날수가 사십일인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며 기념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온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이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십일이고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십일이다. 사십일 동안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영성훈련들을 통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기다린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에 참여할 날을 기다린다.

 

사순절은 사십일 동안 영성훈련에 집중하는 기간이다. 여기에서 영성훈련이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을 잘 알아차리고 순종하기 위해 집중하는 모든 내적이고 외적인 방법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방법이라는 뜻에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고도 한다. 영성훈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묵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첫 번째 수단이다.

 

성경 묵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성경 묵상 방법 중 교회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이 영적 독서 또는 거룩한 독서이다. 라틴어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번역한 것이다. 귀고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네 가지 단계 또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그 네 가지 단계는 읽기, 묵상, 기도, 그리고 바라보기이다.

 

첫째 단계, 정해진 성경 본문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읽는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선택한다.

 

둘째 단계, 선택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은 능동적으로 정신, 마음, 그리고 의지를 동원해서 전인격적으로 말씀을 마주하고 반응하는 행위이다. 지성을 동원해서 말씀을 이해하고, 감정을 동원해서 말씀을 느끼며, 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단계, 묵상하면서 올라온 마음들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기도한다. 죄를 깨닫고 탄식하는 마음이 올라오면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은혜를 깨닫고 느끼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결단의 기도를 드리고, 또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청원의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단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사랑의 임재 안에 고요히 머문다. 렉시오 디비나를 소개하는 영성 고전 <수도승의 사다리>를 쓴 귀고 2세는 이 네 가지 요소가 성경 묵상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 한다: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바라봄]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바라봄]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경험 되지 않으면 마음은 어느새 메마르거나, 오류에 빠지거나, 냉담한 상태에 빠지고, 열매 맺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날마다 최소한 30분씩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성경 묵상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성경 묵상은 아침에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 묵상은 사실 묵상의 시작일 뿐이다. 아침에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을 마음에 담아 하루 종일 생활하면서 수시로 되새기는 것이 진정한 묵상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구체적인 순간에 적용 되고 나를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이러한 성경 묵상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바로 시편 119편 103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루 종일 묵상하면서 깨닫고 느낀 것을 영성 일기장에 기록해놓으면 나중에 영적으로 힘든 시기에 도움이 된다.

 

성경을 묵상할 때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까? 사순절 시기에 하는 묵상의 주요 주제는 죄, 죽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첫째, 사순절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악 된 습관을 고치기에 좋은 시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아울러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죄악 된 습관을 벗어버리려면 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 들어야 한다. 죄 묵상에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십계명(출애굽기 20:1-17), 사도 바울의 악덕 목록(갈라디아서 5:19-21, 디모데후서 3:1-5).

 

둘째, 사순절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겸손해지기에 좋은 시기이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이 시작 되는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했다. 예배 시간에 목회자가 재를 머리에 발라주면서 창세기 3장 19절을 읽어 주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수도원 영성의 위대한 스승인 요한 클리마쿠스는 <천국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자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영성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부단히 노력하더라도 주님께 진 빚을 갚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을 자기 생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경건하게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가장 큰 죄인 교만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우리가 얼마나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살고 있는 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부활의 감격을 크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인내와 희생의 삶을 결심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또는 일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때 올라온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시기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이 새롭게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기에 적합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은 당연히 복음서이다. 복음서를 한 권 정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읽고 묵상해보라. 우선 예수님을 더 잘 아는 것을 목표로 기도하며 묵상한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정보를 축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격적으로 사귀어 안다는 의미이다. 복음서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2021년 사순절에 특별히 성경 묵상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은 코로나 재앙이다. 우리는 현재 인류의 역사에 남을 감염병 재앙의 한 가운데에 있다. 성장의 가도를 질주하던 인류 문명이 강제로 멈춤을 당했다. 이 재앙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반드시 묵상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재앙 및 탄식과 관련된 본문들을 읽고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 백성이 경험한 열 가지 재앙(출애굽기 7-12장), 피조물의 탄식(로마서 8:18-22).

 

이번 사순절 성경 묵상을 통해 죄악 된 습관을 한 가지 극복하고, 더 겸손한 마음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되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강학

 

영락교회 「만남」(통권565호, 2021년 3월) 게재.

posted by 바람연필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기타/영성 관련글 2021. 3. 3. 22:26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블루(Blue)와 부재(不在)

 

“코로나 블루(corona blue)”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19 대유행으로 인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바로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사람들과의 단절감은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신앙인들까지도 우울감 속에 욱여넣고 있다. 아무리 어둡고 어려운 시대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날마다 경험한다면, 잘 살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전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주요한 장은 집회였다. 주일은 물론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교회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때를 따라 열리는 사경회, 부흥회, 수련회 등의 집회를 통해서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집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일예배도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해 우울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참으로 어둡고 메마른 시대다. 그러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성경이다.  

 

 

갈멜에서 호렙으로

 

열왕기상 18장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대결하여 승리한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멜 산 꼭대기에서 일종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 집회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다(왕상 18:24, 37-39). 또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삼년 동안의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렸고,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아합의 병거를 앞질러서 달려갔다. 곧,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명백하게 보이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회 후에 이세벨이 격노하여 “내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왕상 19:2)고 엘리야를 협박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갔다. 그는 이세벨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두려움과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던 그를 호렙 산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호렙 산에서의 하나님은 갈멜 산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셨다. 갈멜에서 하나님은 기적으로, 불로 응답하셨다. 그러나 호렙에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이 명백하게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방법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는 침묵 가운데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한글개역개정에서 “세미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부드러운 고요(정적)의 소리”(דְּמָמָ֥ה דַקָּֽה ק֖וֹל / 콜 드마마아 다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영어성경 NRSV에서는 이 부분을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라고 번역한다(왕상 19:12).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원래 정적, 고요, 침묵이란 소리가 없는 것인데, 순전한 침묵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다.

 

 

장애물을 넘어서서 


이처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놀라운 현상으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는 대중 집회가 어려운 이때에, 홀로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2018)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우리의 모래시계 같은 인생에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이 삶을 교회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독교 유산이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로 변해 가면서 갈수록 더 피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복 있는 사람, 2018), 151.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 비록 유진 피터슨은 북미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개신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삶.” 이것은 새로운 삶의 형태, 또는 새로운 영성훈련 방법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사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삶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공생애 중에도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던 삶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고독과 침묵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이라고 하면,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고독(孤獨)’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solitude’(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를 구분한다. 먼저 solitude는 혼자 있는 상태인데, 특히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loneliness’는 홀로 있어 친구나 말을 나눌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행감을 의미한다.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s.v.v. “solitude,” “loneliness.”
 흔히 영성생활에서 강조되는 고독은 loneliness, 곧 외로움이 아니라 solitude다. 

 


참된 고독과 침묵이란


그렇다면 영성훈련으로서의 고독과 침묵은 무엇일까?


1. 먼저 고독은 대중 속으로의 도피를 중지하고 자신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두움이 존재한다. 죄나 상처, 두려움이나 불안, 근심이나 걱정 등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 어두운 감정들과 생각들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잊기 위해 대중 속으로 도피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즐긴다. 그러나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내면의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존재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고독은 그러한 도피를 중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 혼자서는 그러한 어두움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도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2. 또한 고독은 부적절한 집착으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갈망하는 존재들이다. 산다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많은 활동들로 채운다.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성취감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만족감을 위해 더 맛있는 것을 찾아서 먹고, 더 좋은 옷이나 물건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갈망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고독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물질, 쾌락 등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부적절한 집착들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 354-430)고백록에서 말했듯이 우리 영혼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다음으로 침묵은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6:7)고 가르치셨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기술이었다. 신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술이 바로 제의와 결합된 기도였다. 그들에게서 기도는 신을 조종하는 마법의 언어또는 주문(呪文)이었으며, 이교의 제사장은 그러한 언어를 숙지한 기술자였다.

 

비슷하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려고마법과 같은 기도를 쏟아낸다. 어떤 이들은 유창한 말로 기도하는 것, 또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기도를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방언이 하나님의 신비에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말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언어로 기도할 때에 그 언어가 하나님의 가슴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김현승의 유명한 시, 가을의 기도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면, 무성한 낙엽들과 같은 말들이 떨어지고 침묵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겸허한 모국어”, 곧 가장 진실된 언어를 채우신다.


4. 나아가 침묵은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공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언어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엄밀히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어 말로 기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비공개의 방, 즉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언어화된 은 내면에 있는 생각과 감정 등을 표현하는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 언어(primary speech)로서의 기도를 침묵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침묵은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언어를 초월하여, 깊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공간이다.


종합하면 고독과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고 내적 자아가 깨어나는 성소다. 

 


고독, 공동체, 사역

 

20세기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된 고독은 인격체(person)의 집”이라고 했다.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Directions, 1962), 53.) 여기서 인격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적 자아, 곧 ‘참 자아’(true self)를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거짓 자아, 곧 가면을 쓰거나 왜곡된 자아의 정체가 폭로되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참 자아가 깨어나는 집과 같은 곳이 바로 참된 고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참된 고독은 고립과 반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깨어난 참 자아들은 서로를 찾아 공동체(community)를 이루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J.M. Nouwen: 1932-1996)도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공동체를 이룬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며 …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두란노, 2007), 150.)
 
그러나 공동체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집단(collectivity)이다. 머튼에 의하면 집단은 개인들(individuals), 곧 거짓 자아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들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가면을 쓴 채, 오직 집단에 순응하여, 집단의 목소리를 낸다. 거짓 고독은 이러한 개인들의 도피처다. 그저 사람이 싫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거짓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고독 속에서는 참된 자아가 깨어날 수 없고, 개인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공모자들이다. 모일 수 있을 때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요즘처럼 모이지 못할 때는 개인으로, 여전히 거짓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거짓 자아의 가면 속에서 그 영혼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질식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지금, 참된 고독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만큼이나 매우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렇게 개인들이 인격체들 변화될 때에야 우리의 교회도 참다운 공동체로 새로워질 수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런 ‘공동체’와 ‘집단’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교회일수록 ‘공동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일수록 ‘집단’에 더 가까울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인격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개인’에 더 가깝다. 그러한 ‘개인’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인이며, ‘개인들’이 경영하는 교회는 ‘이익집단’이나, 잘 해 봐야 사적 ‘종교 집단’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생색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이타심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섬긴다. 그리고 그 사역이 마친 후에는 다시 예수님께서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고독의 자리로 물러간다(눅 3:15-16). 마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고독과 공동체와 사역이 어우러져서, 온전한 영성생활이 이루어지게 된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고독과 침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1. 매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자. 오늘날은 원하지 않지만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비자발적인 고독을 자발적인 고독으로 바꾸어보자. “나와 함께 거하자.”는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현존 가운데로 나아가자. 우리가 “주님,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주님은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요 1:38-39). 주님이 계신 곳, 고독과 침묵 속으로 매일 나아가자. 처음에는 5분도 좋다. 처음부터 욕심내기보다 짧은 시간부터 시작해서 점점 시간을 늘려 가면 된다. 타이머로 시간을 설정해 두고, 그 시간만큼은 침묵 속에 앉아 있자. 


2.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한다. 참된 고독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전 3:16). 그러한 진리를 그저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주님께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 지식을 현실화 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가운데, 마음속을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이 떠오르면, 가볍게 주님께 말씀 드리고 흘려보낸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만히 침묵 속에 앉아 있으라. 거짓 자아의 그 비밀스러운 정체가 폭로되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이다. 그러나 거짓 자아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3. 침묵 시간이 좀 더 늘어나면, 침묵 가운데 거룩한 읽기, 영적 일기 쓰기, 성찰의 기도 등을 하는 것도 좋다. 단순히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독교 영성 전통은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 해왔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각자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훈련을 찾아서 실천해 보라. 그런데 그러한 활동들도 몇 분간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고독을 함께 나눌 동반자 그룹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이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보호자다. 이러한 동반자 그룹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자신의 고독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오늘날처럼 그것이 어려울 때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적절한 어플리케이션이나 프로그램들을 활용하여 영상과 음성으로 또는 음성만으로도 그룹 모임을 가질 수 있다. 


5. 고독을 인도하고 안내할 영적 지도자를 찾는다. 여행에도 여행가이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에도 영적 안내자가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영적 생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영성지도자를 찾으라.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 지도자지만, 자신도 역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한 영혼이다. 성도들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찾아 왔을 때에, 그저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스스로 영성에 대한 공부와 훈련에 좀 더 시간과 열심을 내어야 한다.


6.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매일의 짧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외에도 한 달에 하루 ‘고독의 날’(a day of solitude)을 가지고, 일 년에 며칠 온전히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연례 리트릿’ 또는 ‘기도 주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고 할 일이 많은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그러한 시간을 가진다면, 영적 여정에 매우 많은 유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라는 질문에는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이러한 질병과 악을 방치하시는가?”라는 신정론(theodicy)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의문과 씨름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 포비아(church-phobia)”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한 경우에 목사와 교인들은 진리와 생명의 전달자가 아니라 거짓과 바이러스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들’(christs)이 됨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개인’이 죽고 ‘인격체’로 다시 살아날 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성육신’하실 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고후 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고후 2:15).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집단’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거듭날 때 교회가 다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야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보며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라며 탄성을 터트리게 되지 않을까?(말 3:12).

 

권혁일. 「목회와신학」(통권379호, 2021년 1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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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Season 8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1. 2. 21. 11:13

'산책길'과 '레 미제라블'이 함께 하는 <영성나눔> season 8이 봄과 함께 시작됩니다. 지난 시즌 7에 이어 '도시의 영성'이라는 주제 아래 매달 첫째(또는 둘째) 목요일 저녁에 온오프라인에서 만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포스터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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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시즌 7-3 : 일상의 영성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11. 17. 21:17

영성나눔 시즌 7-3


로렌스 형제와 함께 하는 '일상의 영성'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마지막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도시의 영성”을 주제로 진행 중인 시즌 7, 세번째 강좌는 “로렌스 형제와 함께하는 <일상의 영성>”입니다. 전세계적인 전염병 상황으로 인해 새롭게 재편되는 일상 생활 양식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리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박세훈 (산책길 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영성학 교수)
    • 일시 : 2020. 12. 3.(목) 저녁 7:30
    • 장소 : 현장 참여(선착순 7명) 및 온라인(신청자에게 참여 링크 제공)



posted by 바람연필

영성나눔 시즌 7-2 : 신도의 공동생활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10. 25. 13:39

영성나눔 시즌 7-2


본회퍼 : 신도의 공동생활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두 번째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지난 10월 첫 모임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 되었으나,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 방침에 따라 두 번째 모임은 일부 현장 참여와 온라인 모임을 병행하여 진행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유재경 (산책길 연구원, 대덕교회 위임목사)
    • 일시 : 2020. 11. 5.(목) 저녁 7:30
    • 장소 : 현장 참여(선착순 7명) 및 온라인(신청자에게 참여 링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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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시즌 7-1 : 시편 기도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9. 21. 22:53

영성나눔 시즌 7-1


올려다 볼 하늘이 있어 다행이다 

- 시편 기도 -



코로나19로 연기되었던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첫 번째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권혁일 (산책길 연구원, 영락수련원 지도목사)
    • 일시 : 2020. 10. 8.(목) 저녁 7:30
    • 장소 : 온라인 (Zoom, 신청하신 분께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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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나셨다_토머스 머튼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20. 4. 9. 15:50

 

 

그가 살아나셨다

He Is Risen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지음

권혁일 옮김



이 글은 토머스 머튼(1915-1968)19679월에 쓴 에세이 “He Is Risen”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의 사후인 1975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Argus Communications에서 소책자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후 The Merton Annual 9 (1996)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그가 살아나셨고, 그는 여기에 안 계신다. 그분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는 중이다.”(16:6-7)[각주: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움직이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그 손으로 붙들고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같은 장소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묘[각주:2]에서 드리는 예배the Holy Sepulchre cult는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일 때에만 그리스도교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오직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조건 아래에서만 타당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이동한다는 조건, 우리가 아직 가있지 않은 곳으로 가시는 그분을 기꺼이 따라 간다는 조건,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 곳으로 그분을 찾으러 간다는 조건, 갈릴리로간다는 조건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한 것을 믿도록, 단지 이것만을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부활을 체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생명은, 이 활력은 사랑과 만남의 힘으로 표출됩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시고, 상호 만남과 상호 헌신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이 미래를 함께 세웁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라 불립니다. 그 나라는 이미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현재적인 실재reality입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를 함께 건설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완성되도록 그분과 함께 협력합니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교회의 메시지입니다. 단지 부활주일에만이 아니라 연중 매일, 그리고 매년,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교회는 이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부활절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활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증명하려고 애써야할 교리가 아닙니다. 또는 논쟁해야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이자 행동입니다.

이러한 진리들 위에 자신의 전 삶을 세우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전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행동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분을 만난 것처럼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압니다. 그러한 만남은 꼭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인격적/개인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세례는 이와 같은 만남의 확증이자 표시입니다.

그런데 세례는 이어지는 그리스도와의 만남들 속에서 반드시 살아내어져야 합니다. , 성찬 안에서, 그리고 다른 성례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과 들음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선포된 것임을 깨닫는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러한 만남들 속에서 세례가 반드시 실제로 살아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우리가 그곳에 있는 것조차 몰랐던 무언가를 깨웁니다.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해방시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던 힘입니다. 그것은 소망이며, 삶을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또한 그것은 회복력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할 때 다시 일어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능력이며, 창조적 변형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패배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파괴하려고 하거나 우리의 인간적 그리고 영적 성장을 방해하려는 모든 것들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활절기에 진행되는 일련의 행사들을 통해 우리의 안에 있는 죽음과 생명의 결투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격렬하고 필사적인 싸움입니다. 우리 안의 삶과 죽음의 전투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에 대항하는 인간의 절망이 벌이는 전쟁입니다.

다시 살아난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죽어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전에는 그와 함께 부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조적 변형의 역동에, 부활과 갱신의 역동에, 사랑의 역동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입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가 정녕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며 인간적 편견의 제한과 금기에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히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단지 그가 더 높은 법칙, 곧 은혜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아도 되며,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는 모든 미신들, 모든 맹목적인 금기들과 종교적 허식들, 사실상 공허한 율법주의의 모든 형식들로부터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언제 다시 읽어보십시오. 완전한 갱신을 향한 교회의 부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과감히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과감히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해야 합니다. 그는 반드시 인기 없는 일들에서조차도 과감히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는 다수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생각하기에 복음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결정들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그가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다른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이 이룬 업적 때문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은혜로 부르심을 받는다.”[각주:3] 이 진술은 그리스도인의 열등의식을 효과적으로 없앱니다. 그 열등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도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성 바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군중의 의견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 군중 속에 숨고, 군중과 함께 달립니다. 심지어 그 군중이 폭도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혼자라고 느끼고, 도덕적으로 벌거벗었다고 느끼곤 하는데, 그들은 그러한 느낌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있는 그리스도인은 과감히 군중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겸손해서 홀로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에 주의를 기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는 종종 제도화된 인간 권력 구조가 내세우는 목적과 계획에 정반대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면, 우리는 수난의 외로움 속에 계신 그분의 곁을 과감히 지켜야 합니다. 마치 현대 국가가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에게 등을 돌리는 것처럼, 모든 기득권층이, 즉 종교적 기득권층과 사회적 기득권층 모두가 그분을 향해 등을 돌릴 때도 말입니다. 사실상 사도들 중에는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유대 정치의 극좌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 지망자a would-be freedom fighter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심문과 처형을 공부한다면, 그분이 정죄된 죄목이 바로 그가 합법적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싸우는 혁명가, 체제전복적인 급진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철저히 모든 유대 정치 집단들의 바깥에 서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정치적 혁명 운동으로 보이도록 왜곡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위한 투사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형태의 폭압, 모든 형태의 지배 성령, 사랑의 법,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를 제외한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의 지배 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셨는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이 싸움에서 절정을 이루는 전투였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이해하면, 우리는 성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칭송하며 한 다음과 같은 말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은 우리로 자유 안에 머물게 하려고 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51)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을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위해 어떤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의 개종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적 과도함religious overkill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뿐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제의적 관습들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리스도교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자신들은 유대교의 율법 준수를 통해서 여전히 보호받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과도함은 우리 시대의 세상에서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단순히 존재하기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는 부와 권력의 편에 서는 것에 대한 정당화와 지지를 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문자적으로 과도함의 종교가 됩니다. 그러한 종교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적들을 완전히 씨가 마를 때까지 파멸시킵니다. 이를 행하기 위해 그는 이 일에 방해가 되는 신약성서의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들은 모두 [고의로] 잊어버립니다!

성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방종에 굴복할 위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종은 성령과 정반대되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5:14-16).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리될 수 없는 자기 부인의 엄격함을 서술해 나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들을 모두 준수하였기 때문이 아니며, 우리가 종교적 영웅들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고통하고 분투하는 인간들이며,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죄인들이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죄수들이고, 우리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모욕하는 권세들에 대항하여 영적 무기를 든 반항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도움 없이도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우리를 그분 주위로 모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또는 우리가 지금까지 그 전투로부터 도망치며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렸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부활 이야기는 매우 암시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핵심과 중심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 체험은 종종 사도들과 다른 부활의 증인들의 체험의 패턴을 따라갑니다.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진 활력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종종 잊는 것은 모든 부활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증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무덤으로 간 여인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분의 몸을 방부 처리하는 것, 오직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그녀들이 옮기기에는 너무 무거운 돌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시신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 돌을 굴려 줄 누군가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삶에서도 발견되는 일종의 정신적 패턴입니다. 우리도 너무나도 자주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입술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가 죽었다고 몰래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대한 돌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그분의 시신에 접근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의 시신의 종교cult가 됩니다. 그러한 종교는 우리가 그분에게 갈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돌을 옮기는 문제로 인한 분노와 절망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진정 살아있는 신앙이기를 그치고 그저 율법주의적이고 제의적인 형식이 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대신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형식적 숭배일 뿐입니다. 그러한 죽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와 빛으로서 여겨지지 않고, 일종의 신성한 ’, 대단히 거룩한 물건object, 신학적 유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과 빛을 어떤 다른 것으로 대체해버린 결과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가까이 계신 살아계신 주님의 강력한 임재 대신에 우리는 경건한 이미지들과 추상적 개념들로 이루어진 구조를 세워서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최소한 그분은 송장 같은 밀랍 인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서 이 움직이지도 않는 물체를 숭배하고, 온갖 종류의 향유로 방부 처리를 하며,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것이 강력한 마술로 당신을 부유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종교적 생각들과 습관들과 전례들과 관습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보다 우리에게 더 실제적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모든 종교적 액세서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의 길을 방해하거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 사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종교적 법을 철저히 준수하던 때를 회고하며, 그러한 경건은 모두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원했습니다. 여기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얻는 최고의 유익보다 더 대단한 것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들을 쓰레기와 같이 여기고 그것들을 잃어도 좋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에 이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완전만을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전부는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또한 그분의 죽음의 본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고통에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8-11)

거룩한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돌이 굴려져 옮겨졌다는 사실은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예수의 몸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호한 종교적 문제들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묘석墓石 뒤의 죽은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말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 돌을 굴려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몸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아니며, 생명 없는 물건도 아닙니다. 소유물의 일부도 아니며, 심히 종교적인 가보heirloom도 아닙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그는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생활, 그리스도교 예배, 그리스도교 공동체, 성찬, 이 모든 것들이 한정된 제의적 경건에 의해 모호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경건은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명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가 시신인 것처럼, 거룩한 물체인 것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 부활하신 구세주의 잔치, 곧 어린양의 잔치에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생명의 떡으로 나아갑시다. 이 떡은 죽은 자의 음식이 아니라 참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잔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그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보다 앞서 그의 나라로 가십니다! 할렐루야!





  1. 옮긴이 주 | 이 글에 직접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저자가 읽었던 성경 번역본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모두 원문에 나오는 영어 성경을 우리말로 옮긴 것들이다. 머튼은 Jerusalem Bible (1966)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 옮긴이 주 |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터에 세워진 교회다. 이 교회는 주후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지가 되어 왔다. 그리스어로 된 이 교회의 원래 이름은 “부활의 교회”(Church of the Anastasis)다. [본문으로]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n.4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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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시즌 6-4 : 마틴 루터의 기도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19. 11. 22. 15:34

영성나눔 시즌 6-4

마틴 루터의 기도


‘산책길’과 '레 미제라블'이 함께하는 '영성나눔' 시즌 6의 마지막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산책길 이강학 대표가 강사로 섬깁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이강학 교수(산책길 대표연구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일시 : 2019. 12. 5.(목) 저녁 7:30
    • 장소 : 레 미제라블 (서울 용산 녹사평대로 26길 24.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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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대림절 일일수련_장엄한 기적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19. 11. 22. 09:27

산책길과 영락수련원이 함께 준비한 '2019 대림절 일일수련'이 "장엄한 기적"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포스터를 참조하여 신청하세요. 인원이 제한되어 있으니 원하시는 분들은 일찍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 언제 : 2019. 12. 7.(토) 오전 9:30-오후4:00

  • 어디서 : 영락수련원(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신성리 667)
  • 신청 : 031-743-6537 / retreatcenter.youngna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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