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나눔 시즌 7-3 : 일상의 영성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11. 17. 21:17

영성나눔 시즌 7-3


로렌스 형제와 함께 하는 '일상의 영성'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마지막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도시의 영성”을 주제로 진행 중인 시즌 7, 세번째 강좌는 “로렌스 형제와 함께하는 <일상의 영성>”입니다. 전세계적인 전염병 상황으로 인해 새롭게 재편되는 일상 생활 양식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리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박세훈 (산책길 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영성학 교수)
    • 일시 : 2020. 12. 3.(목) 저녁 7:30
    • 장소 : 현장 참여(선착순 7명) 및 온라인(신청자에게 참여 링크 제공)



posted by 바람연필

영성나눔 시즌 7-2 : 신도의 공동생활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10. 25. 13:39

영성나눔 시즌 7-2


본회퍼 : 신도의 공동생활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두 번째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지난 10월 첫 모임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 되었으나,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 방침에 따라 두 번째 모임은 일부 현장 참여와 온라인 모임을 병행하여 진행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유재경 (산책길 연구원, 대덕교회 위임목사)
    • 일시 : 2020. 11. 5.(목) 저녁 7:30
    • 장소 : 현장 참여(선착순 7명) 및 온라인(신청자에게 참여 링크 제공)



posted by 바람연필

영성나눔 시즌 7-1 : 시편 기도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9. 21. 22:53

영성나눔 시즌 7-1


올려다 볼 하늘이 있어 다행이다 

- 시편 기도 -



코로나19로 연기되었던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첫 번째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권혁일 (산책길 연구원, 영락수련원 지도목사)
    • 일시 : 2020. 10. 8.(목) 저녁 7:30
    • 장소 : 온라인 (Zoom, 신청하신 분께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장엄한 춤 (나니아 영성 이야기 6)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6

장엄한 춤

(나니아 영성 이야기 6)

 

“잠시 후, 루시와 작은 파우누스는 손을 맞잡고 기쁨에 겨워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마녀의 집 안뜰에서 석상(石像)이 되어있던 툼누스를 아슬란이 숨을 불어넣어 되살려내자 벌어진 장면입니다. 옷장을 통해 루시가 나니아에 오게 되었을 때 처음 만난 인물(?)이 바로 툼누스였지요. 툼누스는 파우누스(Faunus), 즉 목신(牧神)이었습니다. 신화적 의미에서 자연만물을 뜻하는 그 신을 딱딱한 돌로 만들어놓은 건 하얀 마녀였습니다.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神)"이었던 코스모스, 나니아를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모든 것이 자기 색을 잃고 백설에 뒤덮여 있는 설국(雪國),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로 만들어버린 하얀 마녀 말입니다.


아슬란은 그 마녀가 지배하는 겨울 왕국에 봄을 몰고 옵니다. 마녀와 싸워 이겨 봄을 가져옵니다. 그 싸움을 이기기 위해 아슬란은 돌탁자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지요. 그렇습니다. 봄이 ‘자연히’ 오는 법은 없습니다. 봄은 “피 흘리기까지”(히 12:4) 싸워 이긴 누구의 ‘은혜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 /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 너, 먼데서 이기고 온 사람아 (이성부, '봄' 중에서)

 

나니아에 다시 찾아온 봄은 “먼데서 이기고 온” 봄이었습니다. 나니아의 주(主)인 존재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는 봄이었습니다. 그 봄은 돌처럼 굳어 죽어있던 나니아의 만물과 만인을 살려냅니다.

 

“꼭 박물관 같아.”

 

살아움직이던 동물들이 석상이 되어 모여있는 마녀의 집 안뜰을 보며 루시가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아슬란의 숨이 그들 안으로 불어넣어지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방에서 석상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안뜰은 이제 더 이상 박물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곳은 마치 활기 찬 동물원 같았다.”

 

박물관 같았던 곳이 동물원 같은 곳이 된 것. 그것이 마녀의 집 안뜰에서 벌어진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자기 색깔과 호흡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숨쉬고 움직이게 되는 것, “깨어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들이 되는 것, 그것이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리는 구원이었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다시 춤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석상들은 춤추지 못하지요. 하지만 아슬란의 숨을 받아 살아숨쉬게 된 동물들은 “아슬란의 꽁무니를 쫓아 뛰어나디며 빙글빙글 에워싸고 춤을 추”어 댔습니다. 죽음을 삼키어버리는 이 부활 세레모니를 「나니아 연대기」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죽은 듯이 새하얗던 안뜰은 온통 눈부신 빛깔로 가득했다...죽음 같은 정적은 사라지고 행복에 겨운 동물들의 울음소리, 요란하게 발 구르는 소리, 고함 소리, 만세 소리,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온 뜰이 떠나갈 듯 했다.”

 

장엄한 춤

 

「나니아 연대기」에서 루이스가 그리는 신은 “그 앞에서 우리가 춤출 수 있는 신”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있나요? 하나님을 절대군주 같은 분으로만 알고 있다면 그런 하나님 앞에서는 춤출 마음이란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구원받은 백성들은 아슬란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나 신나게들 춤을 추어댔는지 거대한 사자 아슬란의 모습이 그 춤판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게 될 정도였다고 「사자, 마녀, 옷장」은 전합니다.


사실은, 이러한 거대한 춤판이 벌어지는 순간이야말로 나니아의 신, 아슬란의 진짜 모습이 계시되는 순간입니다. 아슬란의 본체는 다름 아니라 거대한 춤, 장엄한 춤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기독교의 신은 다른 종교나 철학의 신처럼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존재, “일종의 춤”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태초에 ‘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춤이, 말입니다. 그 춤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라고 우리를,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이 춤추자"고 말입니다. 이 춤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듣게 됩니다. "Shall we dance?"라는 말씀 말입니다. 나니아의 백성들은 나니아의 주(主) 아슬란에게서 이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니아에서 아슬란이 있는 곳에서는 늘 춤판이 벌어집니다.


나니아의 숲속에서 벌어지는 이 춤판은 안전한 학교 교실에서만 세계에 대해 배웠던 이들이라면 무서움을 느낄만한 야성(野性)과 원시(原始)와 이교(異敎)가 약동하는 공간, 숲속 거목들과 드라이어드들과 파우누스들이, 바쿠스들과 실레노스들과 마이나스들이, 난장이들과 요정들과 거인들이 각양각색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피들과 플루트와 북 소리에 맞춰 거침없이 몸을 흔들며 뛰어노는 현장입니다. 수잔과 루시도 겁이 났습니다.

 

“만일 아슬란이 없는 자리에서 저 바쿠스며 저 야성적인 여자[마이나스]들이랑 같이 있게 된다면 난 무서울 것 같애.” 

“나도 그래.” 루시가 맞장구를 쳤다. (「캐스피언 왕자」 11장)

 

그러나 그 자리에 아슬란이 있습니다. 왕(王)의 왕(王), 주(主)의 주(主), 모든 “신(神)들 중에 뛰어난”(시 136:2) 아슬란이 그 자리 한가운데에서 그 겁나도록 신나는(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춤판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참 신은 우리를 그 거대한 춤에 참여케 합니다. 생명 없는 물체가 되어버린 만물을 깨워 우리와 “손을 맞잡고 기쁨에 겨워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게 만들어줍니다. 장엄한 춤이신 당신 앞에서.


「나니아 연대기」에서 파우누스와 이 춤을 추는 인간은 루시입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루시 말입니다. 설국(雪國)이 되어버린 세계는 아슬란의 등을 타고 오는 이 루시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 8:19-21)



<빛과 소금> 2020년 8월호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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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반짝이는 눈 (나니아 영성 이야기 5)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4

나니아 영성 이야기 5

루시, 반짝이는 눈



"루시가 [아슬란을] 가장 자주 보았어(Lucy sees him most often)."

 

나니아 이야기에서 루시는 "보는 사람"입니다. 페벤시 가(家) 아이들 중에서 가장 어린 아이였던 루시는 그 아이들 중에서도 아슬란을 가장 자주 보는 이였습니다. 'Lucy'라는 이름은 라틴어 'lux', 즉 '빛'에서 온 말입니다. 빛이 있어서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지요. 루시는 분명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니아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아이 말입니다.


아이는 자라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아이가 된다지요? 여기, 나이 들어 다시 어린 아이가 된 한 노(老) 시인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나이 60에 겨우 /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 눈이 열렸다. / 신이 지으신 오묘한 / 그것을 그것으로 / 볼 수 있는 / 흐리지 않는 눈 /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 채색하지 않고 / 있는 그대로의 꽃 /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 눈이 열렸다. / 세상은 /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 신이 지으신 /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 지복한 눈 /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 신의 옆자리로 살며시 / 다가가 / 아름답습니다. / 감탄할 뿐 / 신이 빚은 술잔에 / 축배의 술을 따를 뿐 (‘개안(開眼)’ 박목월)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사람이라야 정말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렘 5:21) 사람에 불과하지요. 노(老) 시인은 자신은 나이 60이 되어서야 "겨우" 그런 눈이 열리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 떠 보게 되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는 그렇게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한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연대기적으로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마법사의 조카』에는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나니아의 창조자는 세상을 기계 제작자가 기계를 제작해내듯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슬란은 나니아를 시인이 시를 짓듯 창조해냈습니다. 시인이 시를 짓듯 노래해냈습니다. 나니아의 창세기에서는 아슬란이 노래를 부르자 나니아의 모든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견딜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그 소리와 더불어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소리들이 들려왔다....별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그 첫 번째 소리가, 그 깊은 목소리가 그 별들을 나타나게 하고 노래 부르게 만든 것이었다.” (《마법사의 조카》 8장)

 

아슬란의 노래가 별들을 (무로부터) 불러낸 것이었습니다. 아슬란의 "견딜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는 나니아의 나무들을 불러내고, 동물들을 불러내고, 물들을 불러냅니다. 아름다움(to kalon)은 부름(kaleo)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창조자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불려나온 것들입니다. 해야, 달아, 소나무야, 밤나무야, 토끼야, 거북아, 강물아, 샘물아, 하고 부르시며 "너, 있어라" 하시는 그 말씀으로 있게 된 것들입니다.


나니아의 태초의 말씀은 노래였습니다. 태초에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로 말미암아, 그 노래를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나니아가 노래의 나라, 춤의 나라일 수밖에요. 나니아에서 무시로 벌어지는 춤판, 정례로 열리는 축제는 창조자의 사랑의 선물이자 기쁨의 산물인 이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한” 세계를 경이와 “감탄”, 감사와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나이 60에 비로소 눈이 열렸다는 시인은 노래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꽃”은 불꽃이라고. 눈 떠 보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꽃은 다 불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았다는, 그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처럼 말입니다(출 3:4-5). “있는 그대로의” 꽃과 나무는 이미 다 불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꽃과 나무는 “스스로 있는” 분께서 그렇게 “있게 하시기”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그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왜냐하면 눈 떠보면 이 세상에 “당연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창조자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의 모든 것을 창조한 다음 아슬란은 자신이 노래 불러 지어낸 그 나라에 복을 선포했습니다.

 

“나니아여, 나니아여, 나니아여, 깨어나라. 사랑하라. 생각하라. 말하라.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되어라. 말하는 동물들이 되어라. 성스러운 물이 되어라.”

 

나니아는 나무와 동물과 물이, 소나무와 밤나무, 토끼와 거북, 강물과 샘물이 아담의 아들들, 이브의 딸들과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는 나라입니다. 사람처럼 그것들도 “있으라” 하시는 창조자의 말씀을 듣는 존재, “있어서 참 좋다” 하시는 창조자의 노래가 스며들어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만물은 실은 영물(靈物)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영(Spiritus Creator)에 붙들려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렇게 영물로서 알아보고, 돌보는 존재가 바로 만물의 영장(靈長), 사람입니다. 나니아의 첫 번째 왕과 왕비가 된 사람은 런던에 살 때 자신의 말에게 친절했던 마부 프랭크와 그의 아내 헬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하얀 마녀에 의해 나니아가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되어버렸던 시기, 비버 부부는 페벤시 가(家) 아이들에게 이런 예언의 시를 들려줍니다.

 

“아담의 육신과 아담의 뼈가 / 케어 패러벨 성의 왕좌에 앉을 때 / 악의 시대가 끝나리라.”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받고, 말하는 동물에게서 예언의 말을 듣고, 만물에게서 목소리와 색깔을 빼앗아버리는 악과 싸우며, 걸어다니는 나무의 호위를 받는 사람입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신이 지으신 /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 지복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불붙어 있는 꽃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임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온 땅에 가득한 “주님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사 35:2)을 보는 사람입니다.



<빛과 소금> 2020년 7월호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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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0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착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존재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페벤시 가(家)의 아이들도 아슬란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주(主)인 아슬란을 처음 보게 되는 순간, 아이들은 그 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여러분은 떨어보셨습니까? 공포심 때문에가 아니라 경외심 때문에 말입니다. 공포(恐怖)와 경외(敬畏)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혹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나니아에 가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을 예배해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예(禮)와 배(拜)

 

예배시간에 예배당 안에 있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禮拜)란 예(禮)를 갖추어 배(拜), 즉 절한다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으신 분, 그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분 발 앞에 장로 요한이 “엎드러진” 것처럼 말입니다(계 1:17; 5:5).


나니아는 예(禮)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 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또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합당한 예를 갖춰 대합니다. 서로 무례(無禮)를 범치 않습니다. 매너와 예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나니아가 ‘예의 나라’(禮儀之國)인 것은 나니아의 삶의 중심에 예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禮)란 본래 예배 시에 가져야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존귀(worth)하신 분으로 알고 예배(worth-ship)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동료 인간들을 예로써 대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캐스피안에게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슬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이다. 이는 가장 비천한 거지의 신분이라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게 할 만큼 명예로운 일이며,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도 부끄러워 어깨를 숙이게 할 만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거지라도 인간인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아무리 황제라도 인간인 이상 죄인 중의 한 사람이기에 누구를 멸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니아 나라에서는 거지도 황제도 아슬란 앞에서 몸을 굽혀 절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함께 예배하는 자로 대합니다. 예로써 대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알게 됩니다. 나니아는 경외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공간입니다. 나니아는 “너무도 선하면서 동시에 너무도 무서운” 아슬란을 만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겁(怯)과 신(神)

 

아슬란을 만난 아이들은 몸을 떨었습니다. 아슬란과의 만남은 늘 그렇습니다. 겁이 납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아슬란을 만나면 겁이 나면서도, 동시에 신이 납니다. 겁이 나면서 신이 나고, 신이 나면서 겁이 납니다.


왜 겁이 날까요? 무시무시한(terrible) 존재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신이 날까요? 그 존재는 또한, 무시무시하게 선한(good)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이 무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해본 사람은 아직 진짜 선을 만나보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선은 그저 봄볕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진짜 선은 무시무시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무시무시합니다. 태양처럼 무시무시한 선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서게 되면, 누구도 그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엎드러지게 됩니다. 떨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시 2:11)하게 됩니다.


진짜 기쁨은 우리를 떨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이 납니다. 신이 나는데, 겁나도록 신이 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무게의 기쁨이 내 작은 영혼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

 

우리를 겁나게 하면서 또한 신나게 하는 무엇으로서의 ‘거룩’을 루돌프 오토라는 독일의 종교학자는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거룩이란 우리를 두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매료시키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10권 목록의 첫 번째 책으로 그 독일 학자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든 바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문학가로서 루이스의 가장 큰 업적은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를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아슬란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슬란은 아이들을, 또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을 떨게 만듭니다.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사로잡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어른들이 온갖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외하올 분에, 또 경이로운 것들에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 가슴이 뛰는 아이가 되어야 하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신” 분 앞에서 엎드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신나지 않는 것은 신(神)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신은 우리를 신나게, 겁나도록 신나게 만드는 신입니다.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자의 등에 올라탔는데요! 「사자, 마녀, 옷장」에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아슬란은 무시무시한 포효를 울리고는 루시와 수잔을 등에 태우고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그 거대한 사자의 따듯한 황금빛 등 위에서 수잔은 앞에 앉아 갈기를 꽉 붙들었고, 루시는 그 뒤에서 수지를 꼭 잡았습니다. 아이들은 겁이 났지만, 그 질주는 “아이들이 나니아에서 경험한 가장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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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6. 29. 14:59

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옷장을 통해 나니아에 오게된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마치 꿈속에서 뭔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뜻은 잘 모르면서도, 그러나 너무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말, 그 말 때문에 그 꿈 전체가 좋은 꿈이 되기도 하고 악몽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말,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꿈속에서.  


사람은 왜 꿈을 꿀까요? 그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워하는 이는 꿈을 꾸지요. 사실, 종교나 예술은 인류가 꿔온 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운 것이 있기에 꾸게 된 꿈들, 보고 싶은 것이 있기에 그려본 것들 말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인류가 꾸어온 '좋은 꿈'이라고 했습니다. 꿈이지만 뭔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꿈 말입니다. 가령,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弘益人間)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왔다는 그런 신화들 말입니다. 신화는 물론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보다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신화는 힘이 셉니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쁨”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신화 읽기를 즐겼습니다. 신화에 담긴, 신화가 일으키는 어떤 그리움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읽을 때 종종 자신을 찾아와 압도하곤 하던 그리움을 일컬어 "기쁨"(Jo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가 말하는 "기쁨"은 사실,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누리는(enjoy) 무엇이라기보다는 겪는(suffer) 무엇이었습니다. 영혼을 압도해 오는 어떤 허기, 어떤 갈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은 이 세상 그 어떤 배부름이나 만족보다도 우리 영혼을 매료시킵니다. 사정없이 영혼을 후벼 파는 허기요 갈증이지만, 우리 영혼은 이 허기, 이 갈증을 몰랐던 때로 결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을 모르고 사느니, 이 허기, 이 갈증을 껴안고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봄을 좋아하시나요?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봄을 '누린다'기 보다는 봄을 '겪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루이스의 말을 풀이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그저 봄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샤워'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온통 '물들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을 '입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니까 울긋불긋한 옷이라도 차려 입고서 봄나들이를 가는 것인가 봅니다.) 보면, 어른들은 그렇게 봄 구경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지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애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 마냥 봄인데 / 보일 리가 있나요. " ("봄, 교실에서" 고준식) 


네, 어른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들의 내면은 을씨년스럽기 때문입니다.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봄의 수혈이 필요한 것이지요. 봄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 안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 잠기고, 그것을 흡입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봄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봄을 앓습니다. 봄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우리말 ‘아름답다’는 말은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리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그리움, ‘아름다움의 바다’인 하늘을 그리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이라는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이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우리를 정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슬란, 봄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니아에서 아슬란은 봄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아니, 아슬란 자체가 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슬란이 오는 것이 곧 봄이 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루시를 비롯해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옷장을 통해 들어가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땅에서 하얀 마녀에게 영혼을 팔아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버 씨 부부를 통해 예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아슬란이 오실 때 악이 바로 잡히리라. 

그의 우렁찬 포효에 슬픔이 사라지고,

그가 이를 드러낼 때에 겨울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갈기를 흔들 때에 봄은 다시 찾아오리라.“


뭔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나요? ‘꿈’ 속에서 뭔가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꾸게 되는 꿈속에서. 



이종태 <빛과 소금> 2020. 5월호



(이미지 출처: https://bit.ly/2Bjaxm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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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루시에게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사자, 마녀, 옷장』을 절친 오웬 바필드(Owen Barfield)의 딸이자 자신의 대녀(代女, goddaughter)인 루시 바필드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헌사에 적었습니다.

 

"너는 이제 요정 이야기를 읽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지만]...하지만 언젠가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될 게다."

 

루시는 당시 15살이었으니까 요정 이야기 책을 좋아하지 않을 나이였긴 합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루시가 언젠가는 다시 요정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아이는 크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아" 지게 되는 법이니까요.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또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된]"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얻는 것도 많지만 잃어버리는 것도 참 많습니다. 인생사가,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뭔가 잃어버리는 것이 꼭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고, 그래서 '세상'인 가 봅니다.


어른이 되면 잃어버리는 것들에 뭐가 있을까요? 동심(童心)을 잃게 되는데, 워즈워스의 말을 빌리자면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른들은 무지개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지요.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과학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볼 때는 아이들이 무지개를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귀엽긴 하지만, 아직 머리가 더 커야 합니다.


인류가 이제 머리가 클 만큼 컸다고 자부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근/현대'(modern) 입니다. 무지하고 몽매(蒙昧)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계몽(啓蒙)된 시대"(aufgekläartes Zeitalter), "성인(成人)이 된 세계"(world come of age)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은 더 이상 태양을 보고 절하지 않고, 무지개를 볼 때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대신, 현대인은 행성에 우주탐사선을 보내고,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 현상을 만들어내지요.


루이스는 현대 세계에서 스스로를 계몽되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해 『나니아 연대기』를 썼습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것들, 현대 세계에서 어른들이 잃고 살아가는 것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대부(代父, godfather)가 되어준 루시가 자라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대견스러워 했겠지만, 루시가 언젠가는 현대의 보통 성인들보다 더 성숙해져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는"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요정 이야기를 읽어본 지가 언제입니까?

 

Faerie

 

『나니아 연대기』는 '페어리 테일'(fairy tale)입니다. 그런데 루이스와 더불어 ('페어리 테일' 읽고 쓰는 어른들 모임이었던) 잉클링스(Inklings)의 멤버였던 J. R. R. 톨킨에 따르면, 'fairy tale' 은 본래 "요정(fairies)에 대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Faire"나 "Faerie"는 원래 "요정"이 아니라, 어떤 장소(place), "요정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즉, 페어리 테일은 어떤 특별한 '장소/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보면, 그 이야기에서는 '나니아'라고 하는 나라, 그 장소, 그 공간이 거의 하나의 '캐릭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이런 저런 요정들, 괴물들, 인물들이 나와서, 그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의 재미'를 찾는 분들은 『나니아 연대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고, 왜 아이들이, 또 어떤 어른들이 『나니아 연대기』를 좋아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난 다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실 하나입니다. 바로 '나니아'라는 공간, 그것입니다. "나니아에 가보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는 우리 안에 어떤 그리움을 일으킵니다.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神)인" 어떤 공간을 향한 그리움 말입니다. 나니아는 나무가 춤을 추고, 별들이 노래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입니다. 나니아가 이렇게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인 것은 이 나니아를 창조한 존재, 아슬란이 바로 그렇게 살아 생동하는 존재, 만물을 살아 생동하게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에서는 아슬란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춤판이 벌어집니다. 『마법사의 조카』에 나오듯이, 태초에 아슬란의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따라, 그 노래에 맞춰 나니아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국(雪國)

 

그런데 이 춤판이 그친 적이 있습니다. 나니아에 축제가 금지된 시절이 있습니다. 바로, 루시가 옷장을 통해 (처음) 들어가보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모든 것이 자기 색을 잃고 백설에 뒤덮여 있는 설국(雪國)이었습니다.

 

"나니아는 겨울이죠. 아주 오랫동안 겨울이었어요."

 

나니아에서 루시가 처음 만난 인물(?) 툼누스가 한 말입니다. 루이스는 단조로워지고 삭막해지고, 만물이 목소리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웃음을 잃고, 경이를 잃고,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세계를 동토, 설국 같은 곳으로 여겼습니다. 현대인은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주(宇宙)라는 집을 잃고, 텅 빈 공간 속을 부유합니다. 예전 사람들이 Cosmos(질서, 아름다움)라고 불렸던 우주를 이제 우리는 the Space(빈 공간)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텅 빈 우주”라는 제하의 글에서 C. S. 루이스는 “철학이 시작된 이래 일정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인간) 사유의 운동”이 있는데, 그 운동이 “모든 나무는 님프였고 모든 행성은 신(神)이었던” 세상, “풍부하고 생동했던 우주”를 “텅 빈 우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텅 빈 우주"란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유스타스가 "우리 세계"라고 부르는 그 세계입니다. 영국 학교에서 전형적인 현대 교육을 받은 그 소년은 나니아 나라에서 별 신(神) 라만두를 만나고서는 신기해마지 않으며 말합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별은 그냥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가스 덩어리이거든요!” 그 아이에게 라만두가 한 대답은 실은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현대세계에 던지고자 했던 일성(一聲)이었습니다.

 

“얘야, 사실 너희 세계에서도 별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곧 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란다.”(Even in your world, my son, that is not what a star is, but only what it is made of.”)

 

“가스 덩어리가 아니라면, 그럼 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와닿았다면, 이제 여러분은 페어리 테일을 다시 읽을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202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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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나니아 영성 이야기 1)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4. 24. 21:33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나니아 영성 이야기 1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


루이스는 세상이 달리 보이게 만들어주는 작가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사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글을 읽고, 또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것 때문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이 달리 보이는 체험을 선물로 받고, 또 선물로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우리더러 '달라지라'고 (닦달)하는 소리들로 가득합니다. 너가 달라져야 성공할 수 있다, 너가 달라져야 행복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들 말합니다.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심지어 교회 강단에서도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우리를 달라지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잠깐 뭔가를 결심하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그런 결심은 오래가지도 못하고,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들어주는 건 '결심'이 아니라 '회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回心), 마음의 근본적 변화, 말입니다. 


사람은, 세상이 달리보일 때 비로소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구원을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닫혔던 눈이 열리는 것, 그래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회심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게 된 어떤 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전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것이지요. 


루이스는 '보는 눈'을 강조한 작가였습니다.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Much depends on the seeing eye)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이들이 쓴 글들이,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세상을]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세계는 커집니다. 특별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이의 글은 우리를 더 큰 세계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우리로 그 안에서 성장하게 해줍니다. 


제게는 루이스의 글이 그런 더 큰 세상을 보게 해주는 눈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지면에 얼마간 연재될 저의 글은 그 눈으로 보게 된 세상에 대한 저의 간략한 탐험기입니다.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기억하십니까? 「사자, 마녀, 옷장」에서 그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한동안 머물렀던 한 노(老) 교수의 집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저택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그 집 안을 탐험하다 루시는 "커다란 옷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을 발견하게 되고, 그 옷장 안에 들어가 보았다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거대한 모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게 되지요. 


루이스에게 세계는 바로 그런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커다란 집과 같은 곳이고, 저와 여러분은 그 집안 곳곳을 탐험하는 아이가 되라는 초대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마 18:3)라는 초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에게는 세계는 집과 같습니다. 텅 빈 공간이 아닙니다. 가득한 장소입니다. 엄마가 있고, 규칙이 있고, 친한 동물이 있고, 놀 것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루이스가 우리로 상상해보게 하는 집은 아주 거대한 집,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집, 많은 비밀의 방들이 있는 집입니다. 그 나니아 작가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우주가 바로 그런 집이라는 것입니다. 집 우(宇), 집 주(宙), 우주(宇宙)라는 집, 말입니다. 


이런 우주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기를 초대하는 이야기가 바로 「나니아 연대기」입니다. 나니아 이야기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험은 아슬란이라는 무시무시하도록 선한 존재가 다스리는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모험입니다. 나니아라는 우주, 집 안 탐험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집에서만 모험할 수 있습니다. 집을 떠난 사람, 집이 없는 사람은 모험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뿐,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모험은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이 있고, 그 땅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창 12: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이 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24:1).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아래 땅에서만 모험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게 길을 떠나, 태초부터 이어지는 모험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태초의 말씀과 종말의 노래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태초와 종말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들을 믿고, 전하고, 짓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루이스가 지은 이야기 「나니아 연대기」는 우리로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종말에 있을 노래를 듣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뜻 있는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성경 이야기를 닮은 이야기이고,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주는, 다시 말해 우리를 나 자신이라는 좁은 곳에서 꺼내 하나님의 세계라는 “넓은 곳”(시 18:19)으로 데려가주는 힘을 가졌습니다. 나니아 이야기의 마력으로 눈을 떠 보게 되는 세계는 얼마나 아득하고 까마득한 신비인지요(天地玄黃 宇宙洪荒)!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세계,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창조자인 아슬란을 두고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루시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위험하지요. 하지만 선한 분이세요.“나니아 이야기가 보여주는 믿음의 삶이란 이 위험(危險)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탐험(探險)하고 모험(冒險)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삶입니다.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며 비밀의 방 옷장을 열어보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부활 생명의 삶은 결코 소심하거나 무거운 삶이 아닙니다. 이는 기대 넘치는 모험의 삶, 어린아이처럼 늘 하나님께 ‘다음은 또 뭐죠, 아빠?’라고 묻는 삶입니다.”(롬 8:15 메시지성경)


이종태, <빛과 소금> 202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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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총새에 불이 붙듯

'목사들의 목사' 유진 피터슨의 마지막 선물
[서평]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복있는사람)




"유진 피터슨은 '목사'였다."

이것은 3년 6개월 전 몬태나주에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적어 본 방문기의 첫 문장이다. 그랬다. 피터슨은 영성신학을 가르친 교수이기도 하고, 성경 번역자이기도 하고,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 온 모든 일을 언제나 "목사로서" 한 일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날도 그랬다. <메시지>(복있는사람) 성경 한국어판 완역 기념 인터뷰를 위한 만남이었는데, 인터뷰 중에도, 또 인터뷰 전후 대화에서도, 그가 말할 때의 작은 떨림에서마저 느껴졌던 단어는, '영성'도 <메시지>도 그 무엇도 아닌 '목사'였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목사 됨의 영광과 그 무게에 대하여 그처럼 눈빛을 반짝거리며 말하는 목사를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한 것 같다고.


그날 대화 중 피터슨은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 저서가 될 것 같은 책의 원고를 며칠 전 출판사에 넘겼다고 했다. 미국에서 작년 5월 출간되었고 이번에 복있는사람 출판사에서 역간한 <물총새에 불이 붙듯>이 바로 그 책이다. '말씀으로 형성된 하나님의 길에 관한 대화'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피터슨이 1962년 개척하여 29년간 목회한 '그리스도우리왕장로교회' 강단에서 전한 설교들 가운데 마흔아홉 개를 선별하여 엮은 것으로, 일곱 세트에 각각 일곱 설교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진 피터슨의 '마지막' 책이 설교 모음집이라는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설교는 '목사'의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설교들은 '목사' 피터슨의 '마지막 말'(last words)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들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저작을 즐겨 읽어 온 독자라면, 이 책을 펼쳐 읽어 보고서 금세 알게 된다. 그동안 피터슨이 해 온 모든 말은 그의 이런 설교들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고, 또 이런 설교들 속으로 녹아 들어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피터슨의 영성에서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는 '일치'(congruence)를 떠올릴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설교와 그의 신학은 '일치'한다. 그에게 설교는 신학함(theologieren)이었고, 그에게 신학은 영혼을 돌보는 일(care of the soul)이었다. 그의 신학과 설교의 일치는, 그가 추구한 더 큰 맥락의 일치, 존재와 일의 일치의 한 양상이다. 피터슨은 '목사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하나님에 대한 말"인 신학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로 바꾸는 것이 설교가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피터슨의 설교는 그래서 '설교'가 아니다. "내게 설교하지 마!"라고 할 때의 그 '설교' 말이다. 그 '설교'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훈계, 선동, 과시, 계몽, 세뇌의 말들, 겁주고 흥분시키는 웅변들, 그 뻔한 소리, 잔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시시한 소리들 말이다. 무엇보다 피터슨의 설교는 우리를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이는 설교다. 그 "낯설고 새로운 세계" 속으로 말이다. 피터슨 목사는 많은 이가 성경을 '사랑'하도록 도왔다. 경이에서 비롯하는 사랑, '두렵고 떨림'이 따르는 사랑 말이다. 성서라는 그 드넓고 현묘한 세계에 들어가 본 사람은, 성서가 이 세상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성서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피터슨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와 보게 되는 세상은 얼마나 다른지! <물총새에 불이 붙듯>에 있는 설교들은 요즘의 흔한 설교들처럼 우리보고 달라지라고 닦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세상이 달리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성서의 세계 안으로 우리를 깊이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이 달리 보일 때 비로소 진정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책 제목 <물총새에 불이 붙듯>은 예수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제라드 맨리 홉킨스(1844~1889)의 시구다.

물총새에 불이 붙고, 잠자리 날개가 빛과 하나 되듯,
우물 안으로 굴러든 돌이 울리고,
켜진 현들이 저마다 말하고, 흔들리는 종이
자신의 소리를 널리 퍼뜨리듯,
모든 피조물은 한 가지 같은 일을 한다.
각자 내면에 거주하는 제 존재를 밖으로 내보낸다.
자기 스스로를 발현한다. 그것이 '나'라고 명시한다.
'내가 하는 것이 나이며, 그 때문에 내가 왔다'고 외친다.

더 있다. 의로우신 그분은 의를 행하고,
은혜도 지키시니 그 모든 행위가 은혜롭다.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는 그분,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수만 곳을 다니시며,
아름답게 노니시기 때문이다. 자기 눈이 아닌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아버지에게 아름답게. (18쪽)

_제라드 맨리 홉킨스, As Kingfishers Catch Fire, Dragonflies Draw Flame

"물총새에 불이 붙듯"은 가히 피터슨의 목회 일생과 영성 여정을 견인했다고 할 수 있는 시의 첫 구절로, 피터슨의 '마지막 말'의 제사(epigraph)로 더없이 딱 맞는 글귀다. 피터슨은 추구했다. 물총새가 날 때 제 빛깔―불붙은 듯한!―을 내고, 돌이 구르고 현이 켜지고 종이 울릴 때 각기 제소리를 내듯, 각 존재의 하는 일이 곧 그 존재의 발현인 경지, "일치"의 경지 말이다. 존재와 일의 일치를 추구했던 피터슨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그가 목사로서 하는 일의 일치를 추구했다. 그는 믿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대로 설교하고자 했다. "내가 하는 것이 나다"(What I do is me)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원했다.

홉킨스의 시는 "내가 하는 것이 나"인 경지는 곧 그리스도께서 내 안팎으로 "수만 곳을 다니시며/아름답게 노니시는" 경지라고 노래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경지인 것이다. <물총새에 불이 붙듯>은 무엇보다 우리 안에 이런 일치를 향한 소원을 불붙여 준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존재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의 삶이, 내가 일을 하고 삶을 사는 '방식'이 일치하기를 갈망하게 된다. 설교를 듣고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들 중 이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물총새에 불이 붙듯>은 '목사들의 목사'라 불리는 유진 피터슨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그는 주일 아침 예배 한 시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이라고 믿었고, 29년간을 그렇게 그 믿음대로 목양하고 설교하며 살았던 목사였다. '목사'의 말을 들어 보자.



이종태, <뉴스앤조이> 2018.06.29




posted by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