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 바이블칼리지 _ 영성고전산책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1. 3. 6. 13:12

'산책길'은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와 협력하여 <영성고전산책> 온라인 강의를 진행합니다. 기독교 영성사에 중요한 열두 권의 고전을 선별하여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2021년 상반기에 개설되는 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권 : 어거스틴의 《고백록》(강사 : 이종태) _ 4월 9일-16일

제2권 : 닛사의 그레고리의《모세의 생애》(강사 : 남기정) _ 5월7일-20일

제3권 :《베네딕트의 규칙서》(강사 : 권혁일) _ 6월 4일-17일

 

수강료는 각 권당 3만원인데, 3강의를 모두 신청하시는 분들은 8만원에 수강하실수 있다고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두란노 바이블칼리지 웹사이트를 참조하세요.

 

 

posted by 바람연필

사순절과 영적 독서

기타/영성 관련글 2021. 3. 5. 16:45

사순절과 영적 독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십일을 일컫는 말이다. 왜 사십일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며 준비하신 날수가 사십일인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며 기념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온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이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십일이고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십일이다. 사십일 동안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영성훈련들을 통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기다린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에 참여할 날을 기다린다.

 

사순절은 사십일 동안 영성훈련에 집중하는 기간이다. 여기에서 영성훈련이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을 잘 알아차리고 순종하기 위해 집중하는 모든 내적이고 외적인 방법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방법이라는 뜻에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고도 한다. 영성훈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묵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첫 번째 수단이다.

 

성경 묵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성경 묵상 방법 중 교회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이 영적 독서 또는 거룩한 독서이다. 라틴어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번역한 것이다. 귀고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네 가지 단계 또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그 네 가지 단계는 읽기, 묵상, 기도, 그리고 바라보기이다.

 

첫째 단계, 정해진 성경 본문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읽는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선택한다.

 

둘째 단계, 선택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은 능동적으로 정신, 마음, 그리고 의지를 동원해서 전인격적으로 말씀을 마주하고 반응하는 행위이다. 지성을 동원해서 말씀을 이해하고, 감정을 동원해서 말씀을 느끼며, 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단계, 묵상하면서 올라온 마음들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기도한다. 죄를 깨닫고 탄식하는 마음이 올라오면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은혜를 깨닫고 느끼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결단의 기도를 드리고, 또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청원의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단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사랑의 임재 안에 고요히 머문다. 렉시오 디비나를 소개하는 영성 고전 <수도승의 사다리>를 쓴 귀고 2세는 이 네 가지 요소가 성경 묵상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 한다: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바라봄]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바라봄]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경험 되지 않으면 마음은 어느새 메마르거나, 오류에 빠지거나, 냉담한 상태에 빠지고, 열매 맺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날마다 최소한 30분씩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성경 묵상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성경 묵상은 아침에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 묵상은 사실 묵상의 시작일 뿐이다. 아침에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을 마음에 담아 하루 종일 생활하면서 수시로 되새기는 것이 진정한 묵상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구체적인 순간에 적용 되고 나를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이러한 성경 묵상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바로 시편 119편 103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루 종일 묵상하면서 깨닫고 느낀 것을 영성 일기장에 기록해놓으면 나중에 영적으로 힘든 시기에 도움이 된다.

 

성경을 묵상할 때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까? 사순절 시기에 하는 묵상의 주요 주제는 죄, 죽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첫째, 사순절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악 된 습관을 고치기에 좋은 시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아울러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죄악 된 습관을 벗어버리려면 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 들어야 한다. 죄 묵상에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십계명(출애굽기 20:1-17), 사도 바울의 악덕 목록(갈라디아서 5:19-21, 디모데후서 3:1-5).

 

둘째, 사순절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겸손해지기에 좋은 시기이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이 시작 되는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했다. 예배 시간에 목회자가 재를 머리에 발라주면서 창세기 3장 19절을 읽어 주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수도원 영성의 위대한 스승인 요한 클리마쿠스는 <천국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자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영성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부단히 노력하더라도 주님께 진 빚을 갚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을 자기 생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경건하게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가장 큰 죄인 교만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우리가 얼마나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살고 있는 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부활의 감격을 크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인내와 희생의 삶을 결심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또는 일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때 올라온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시기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이 새롭게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기에 적합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은 당연히 복음서이다. 복음서를 한 권 정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읽고 묵상해보라. 우선 예수님을 더 잘 아는 것을 목표로 기도하며 묵상한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정보를 축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격적으로 사귀어 안다는 의미이다. 복음서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2021년 사순절에 특별히 성경 묵상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은 코로나 재앙이다. 우리는 현재 인류의 역사에 남을 감염병 재앙의 한 가운데에 있다. 성장의 가도를 질주하던 인류 문명이 강제로 멈춤을 당했다. 이 재앙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반드시 묵상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재앙 및 탄식과 관련된 본문들을 읽고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 백성이 경험한 열 가지 재앙(출애굽기 7-12장), 피조물의 탄식(로마서 8:18-22).

 

이번 사순절 성경 묵상을 통해 죄악 된 습관을 한 가지 극복하고, 더 겸손한 마음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되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강학

 

영락교회 「만남」(통권565호, 2021년 3월) 게재.

posted by 바람연필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기타/영성 관련글 2021. 3. 3. 22:26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블루(Blue)와 부재(不在)

 

“코로나 블루(corona blue)”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19 대유행으로 인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바로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사람들과의 단절감은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신앙인들까지도 우울감 속에 욱여넣고 있다. 아무리 어둡고 어려운 시대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날마다 경험한다면, 잘 살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전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주요한 장은 집회였다. 주일은 물론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교회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때를 따라 열리는 사경회, 부흥회, 수련회 등의 집회를 통해서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집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일예배도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해 우울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참으로 어둡고 메마른 시대다. 그러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성경이다.  

 

 

갈멜에서 호렙으로

 

열왕기상 18장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대결하여 승리한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멜 산 꼭대기에서 일종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 집회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다(왕상 18:24, 37-39). 또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삼년 동안의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렸고,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아합의 병거를 앞질러서 달려갔다. 곧,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명백하게 보이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회 후에 이세벨이 격노하여 “내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왕상 19:2)고 엘리야를 협박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갔다. 그는 이세벨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두려움과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던 그를 호렙 산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호렙 산에서의 하나님은 갈멜 산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셨다. 갈멜에서 하나님은 기적으로, 불로 응답하셨다. 그러나 호렙에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이 명백하게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방법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는 침묵 가운데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한글개역개정에서 “세미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부드러운 고요(정적)의 소리”(דְּמָמָ֥ה דַקָּֽה ק֖וֹל / 콜 드마마아 다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영어성경 NRSV에서는 이 부분을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라고 번역한다(왕상 19:12).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원래 정적, 고요, 침묵이란 소리가 없는 것인데, 순전한 침묵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다.

 

 

장애물을 넘어서서 


이처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놀라운 현상으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는 대중 집회가 어려운 이때에, 홀로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2018)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우리의 모래시계 같은 인생에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이 삶을 교회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독교 유산이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로 변해 가면서 갈수록 더 피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복 있는 사람, 2018), 151.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 비록 유진 피터슨은 북미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개신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삶.” 이것은 새로운 삶의 형태, 또는 새로운 영성훈련 방법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사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삶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공생애 중에도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던 삶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고독과 침묵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이라고 하면,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고독(孤獨)’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solitude’(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를 구분한다. 먼저 solitude는 혼자 있는 상태인데, 특히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loneliness’는 홀로 있어 친구나 말을 나눌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행감을 의미한다.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s.v.v. “solitude,” “loneliness.”
 흔히 영성생활에서 강조되는 고독은 loneliness, 곧 외로움이 아니라 solitude다. 

 


참된 고독과 침묵이란


그렇다면 영성훈련으로서의 고독과 침묵은 무엇일까?


1. 먼저 고독은 대중 속으로의 도피를 중지하고 자신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두움이 존재한다. 죄나 상처, 두려움이나 불안, 근심이나 걱정 등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 어두운 감정들과 생각들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잊기 위해 대중 속으로 도피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즐긴다. 그러나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내면의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존재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고독은 그러한 도피를 중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 혼자서는 그러한 어두움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도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2. 또한 고독은 부적절한 집착으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갈망하는 존재들이다. 산다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많은 활동들로 채운다.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성취감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만족감을 위해 더 맛있는 것을 찾아서 먹고, 더 좋은 옷이나 물건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갈망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고독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물질, 쾌락 등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부적절한 집착들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 354-430)고백록에서 말했듯이 우리 영혼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다음으로 침묵은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6:7)고 가르치셨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기술이었다. 신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술이 바로 제의와 결합된 기도였다. 그들에게서 기도는 신을 조종하는 마법의 언어또는 주문(呪文)이었으며, 이교의 제사장은 그러한 언어를 숙지한 기술자였다.

 

비슷하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려고마법과 같은 기도를 쏟아낸다. 어떤 이들은 유창한 말로 기도하는 것, 또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기도를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방언이 하나님의 신비에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말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언어로 기도할 때에 그 언어가 하나님의 가슴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김현승의 유명한 시, 가을의 기도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면, 무성한 낙엽들과 같은 말들이 떨어지고 침묵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겸허한 모국어”, 곧 가장 진실된 언어를 채우신다.


4. 나아가 침묵은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공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언어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엄밀히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어 말로 기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비공개의 방, 즉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언어화된 은 내면에 있는 생각과 감정 등을 표현하는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 언어(primary speech)로서의 기도를 침묵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침묵은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언어를 초월하여, 깊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공간이다.


종합하면 고독과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고 내적 자아가 깨어나는 성소다. 

 


고독, 공동체, 사역

 

20세기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된 고독은 인격체(person)의 집”이라고 했다.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Directions, 1962), 53.) 여기서 인격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적 자아, 곧 ‘참 자아’(true self)를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거짓 자아, 곧 가면을 쓰거나 왜곡된 자아의 정체가 폭로되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참 자아가 깨어나는 집과 같은 곳이 바로 참된 고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참된 고독은 고립과 반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깨어난 참 자아들은 서로를 찾아 공동체(community)를 이루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J.M. Nouwen: 1932-1996)도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공동체를 이룬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며 …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두란노, 2007), 150.)
 
그러나 공동체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집단(collectivity)이다. 머튼에 의하면 집단은 개인들(individuals), 곧 거짓 자아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들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가면을 쓴 채, 오직 집단에 순응하여, 집단의 목소리를 낸다. 거짓 고독은 이러한 개인들의 도피처다. 그저 사람이 싫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거짓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고독 속에서는 참된 자아가 깨어날 수 없고, 개인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공모자들이다. 모일 수 있을 때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요즘처럼 모이지 못할 때는 개인으로, 여전히 거짓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거짓 자아의 가면 속에서 그 영혼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질식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지금, 참된 고독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만큼이나 매우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렇게 개인들이 인격체들 변화될 때에야 우리의 교회도 참다운 공동체로 새로워질 수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런 ‘공동체’와 ‘집단’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교회일수록 ‘공동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일수록 ‘집단’에 더 가까울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인격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개인’에 더 가깝다. 그러한 ‘개인’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인이며, ‘개인들’이 경영하는 교회는 ‘이익집단’이나, 잘 해 봐야 사적 ‘종교 집단’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생색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이타심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섬긴다. 그리고 그 사역이 마친 후에는 다시 예수님께서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고독의 자리로 물러간다(눅 3:15-16). 마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고독과 공동체와 사역이 어우러져서, 온전한 영성생활이 이루어지게 된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고독과 침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1. 매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자. 오늘날은 원하지 않지만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비자발적인 고독을 자발적인 고독으로 바꾸어보자. “나와 함께 거하자.”는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현존 가운데로 나아가자. 우리가 “주님,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주님은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요 1:38-39). 주님이 계신 곳, 고독과 침묵 속으로 매일 나아가자. 처음에는 5분도 좋다. 처음부터 욕심내기보다 짧은 시간부터 시작해서 점점 시간을 늘려 가면 된다. 타이머로 시간을 설정해 두고, 그 시간만큼은 침묵 속에 앉아 있자. 


2.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한다. 참된 고독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전 3:16). 그러한 진리를 그저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주님께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 지식을 현실화 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가운데, 마음속을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이 떠오르면, 가볍게 주님께 말씀 드리고 흘려보낸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만히 침묵 속에 앉아 있으라. 거짓 자아의 그 비밀스러운 정체가 폭로되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이다. 그러나 거짓 자아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3. 침묵 시간이 좀 더 늘어나면, 침묵 가운데 거룩한 읽기, 영적 일기 쓰기, 성찰의 기도 등을 하는 것도 좋다. 단순히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독교 영성 전통은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 해왔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각자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훈련을 찾아서 실천해 보라. 그런데 그러한 활동들도 몇 분간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고독을 함께 나눌 동반자 그룹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이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보호자다. 이러한 동반자 그룹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자신의 고독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오늘날처럼 그것이 어려울 때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적절한 어플리케이션이나 프로그램들을 활용하여 영상과 음성으로 또는 음성만으로도 그룹 모임을 가질 수 있다. 


5. 고독을 인도하고 안내할 영적 지도자를 찾는다. 여행에도 여행가이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에도 영적 안내자가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영적 생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영성지도자를 찾으라.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 지도자지만, 자신도 역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한 영혼이다. 성도들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찾아 왔을 때에, 그저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스스로 영성에 대한 공부와 훈련에 좀 더 시간과 열심을 내어야 한다.


6.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매일의 짧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외에도 한 달에 하루 ‘고독의 날’(a day of solitude)을 가지고, 일 년에 며칠 온전히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연례 리트릿’ 또는 ‘기도 주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고 할 일이 많은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그러한 시간을 가진다면, 영적 여정에 매우 많은 유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라는 질문에는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이러한 질병과 악을 방치하시는가?”라는 신정론(theodicy)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의문과 씨름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 포비아(church-phobia)”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한 경우에 목사와 교인들은 진리와 생명의 전달자가 아니라 거짓과 바이러스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들’(christs)이 됨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개인’이 죽고 ‘인격체’로 다시 살아날 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성육신’하실 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고후 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고후 2:15).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집단’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거듭날 때 교회가 다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야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보며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라며 탄성을 터트리게 되지 않을까?(말 3:12).

 

권혁일. 「목회와신학」(통권379호, 2021년 1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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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Season 8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1. 2. 21. 11:13

'산책길'과 '레 미제라블'이 함께 하는 <영성나눔> season 8이 봄과 함께 시작됩니다. 지난 시즌 7에 이어 '도시의 영성'이라는 주제 아래 매달 첫째(또는 둘째) 목요일 저녁에 온오프라인에서 만납니다. 자세한 내용은 포스터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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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시즌 7-3 : 일상의 영성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11. 17. 21:17

영성나눔 시즌 7-3


로렌스 형제와 함께 하는 '일상의 영성'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마지막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도시의 영성”을 주제로 진행 중인 시즌 7, 세번째 강좌는 “로렌스 형제와 함께하는 <일상의 영성>”입니다. 전세계적인 전염병 상황으로 인해 새롭게 재편되는 일상 생활 양식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자리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박세훈 (산책길 연구원, 장로회신학대학교 영성학 교수)
    • 일시 : 2020. 12. 3.(목) 저녁 7:30
    • 장소 : 현장 참여(선착순 7명) 및 온라인(신청자에게 참여 링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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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시즌 7-2 : 신도의 공동생활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10. 25. 13:39

영성나눔 시즌 7-2


본회퍼 : 신도의 공동생활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두 번째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지난 10월 첫 모임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진행 되었으나,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 방침에 따라 두 번째 모임은 일부 현장 참여와 온라인 모임을 병행하여 진행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유재경 (산책길 연구원, 대덕교회 위임목사)
    • 일시 : 2020. 11. 5.(목) 저녁 7:30
    • 장소 : 현장 참여(선착순 7명) 및 온라인(신청자에게 참여 링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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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나눔 시즌 7-1 : 시편 기도

기타/영성 동네 소식 2020. 9. 21. 22:53

영성나눔 시즌 7-1


올려다 볼 하늘이 있어 다행이다 

- 시편 기도 -



코로나19로 연기되었던 산책길 X 레 미제라블 영성나눔〉 시즌 7의 첫 번째 강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레미제라블 블로그(클릭)를 참조해 주세요.


    • 강사 : 권혁일 (산책길 연구원, 영락수련원 지도목사)
    • 일시 : 2020. 10. 8.(목) 저녁 7:30
    • 장소 : 온라인 (Zoom, 신청하신 분께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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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춤 (나니아 영성 이야기 6)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6

장엄한 춤

(나니아 영성 이야기 6)

 

“잠시 후, 루시와 작은 파우누스는 손을 맞잡고 기쁨에 겨워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마녀의 집 안뜰에서 석상(石像)이 되어있던 툼누스를 아슬란이 숨을 불어넣어 되살려내자 벌어진 장면입니다. 옷장을 통해 루시가 나니아에 오게 되었을 때 처음 만난 인물(?)이 바로 툼누스였지요. 툼누스는 파우누스(Faunus), 즉 목신(牧神)이었습니다. 신화적 의미에서 자연만물을 뜻하는 그 신을 딱딱한 돌로 만들어놓은 건 하얀 마녀였습니다.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神)"이었던 코스모스, 나니아를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모든 것이 자기 색을 잃고 백설에 뒤덮여 있는 설국(雪國),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로 만들어버린 하얀 마녀 말입니다.


아슬란은 그 마녀가 지배하는 겨울 왕국에 봄을 몰고 옵니다. 마녀와 싸워 이겨 봄을 가져옵니다. 그 싸움을 이기기 위해 아슬란은 돌탁자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지요. 그렇습니다. 봄이 ‘자연히’ 오는 법은 없습니다. 봄은 “피 흘리기까지”(히 12:4) 싸워 이긴 누구의 ‘은혜로’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 /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 너, 먼데서 이기고 온 사람아 (이성부, '봄' 중에서)

 

나니아에 다시 찾아온 봄은 “먼데서 이기고 온” 봄이었습니다. 나니아의 주(主)인 존재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는 봄이었습니다. 그 봄은 돌처럼 굳어 죽어있던 나니아의 만물과 만인을 살려냅니다.

 

“꼭 박물관 같아.”

 

살아움직이던 동물들이 석상이 되어 모여있는 마녀의 집 안뜰을 보며 루시가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아슬란의 숨이 그들 안으로 불어넣어지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사방에서 석상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안뜰은 이제 더 이상 박물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곳은 마치 활기 찬 동물원 같았다.”

 

박물관 같았던 곳이 동물원 같은 곳이 된 것. 그것이 마녀의 집 안뜰에서 벌어진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자기 색깔과 호흡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숨쉬고 움직이게 되는 것, “깨어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들이 되는 것, 그것이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리는 구원이었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다시 춤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석상들은 춤추지 못하지요. 하지만 아슬란의 숨을 받아 살아숨쉬게 된 동물들은 “아슬란의 꽁무니를 쫓아 뛰어나디며 빙글빙글 에워싸고 춤을 추”어 댔습니다. 죽음을 삼키어버리는 이 부활 세레모니를 「나니아 연대기」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죽은 듯이 새하얗던 안뜰은 온통 눈부신 빛깔로 가득했다...죽음 같은 정적은 사라지고 행복에 겨운 동물들의 울음소리, 요란하게 발 구르는 소리, 고함 소리, 만세 소리,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온 뜰이 떠나갈 듯 했다.”

 

장엄한 춤

 

「나니아 연대기」에서 루이스가 그리는 신은 “그 앞에서 우리가 춤출 수 있는 신”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있나요? 하나님을 절대군주 같은 분으로만 알고 있다면 그런 하나님 앞에서는 춤출 마음이란 생겨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구원받은 백성들은 아슬란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나 신나게들 춤을 추어댔는지 거대한 사자 아슬란의 모습이 그 춤판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게 될 정도였다고 「사자, 마녀, 옷장」은 전합니다.


사실은, 이러한 거대한 춤판이 벌어지는 순간이야말로 나니아의 신, 아슬란의 진짜 모습이 계시되는 순간입니다. 아슬란의 본체는 다름 아니라 거대한 춤, 장엄한 춤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기독교의 신은 다른 종교나 철학의 신처럼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존재, “일종의 춤”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태초에 ‘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사랑의 춤이, 말입니다. 그 춤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라고 우리를, 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이 춤추자"고 말입니다. 이 춤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이 말씀을 듣게 됩니다. "Shall we dance?"라는 말씀 말입니다. 나니아의 백성들은 나니아의 주(主) 아슬란에게서 이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니아에서 아슬란이 있는 곳에서는 늘 춤판이 벌어집니다.


나니아의 숲속에서 벌어지는 이 춤판은 안전한 학교 교실에서만 세계에 대해 배웠던 이들이라면 무서움을 느낄만한 야성(野性)과 원시(原始)와 이교(異敎)가 약동하는 공간, 숲속 거목들과 드라이어드들과 파우누스들이, 바쿠스들과 실레노스들과 마이나스들이, 난장이들과 요정들과 거인들이 각양각색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피들과 플루트와 북 소리에 맞춰 거침없이 몸을 흔들며 뛰어노는 현장입니다. 수잔과 루시도 겁이 났습니다.

 

“만일 아슬란이 없는 자리에서 저 바쿠스며 저 야성적인 여자[마이나스]들이랑 같이 있게 된다면 난 무서울 것 같애.” 

“나도 그래.” 루시가 맞장구를 쳤다. (「캐스피언 왕자」 11장)

 

그러나 그 자리에 아슬란이 있습니다. 왕(王)의 왕(王), 주(主)의 주(主), 모든 “신(神)들 중에 뛰어난”(시 136:2) 아슬란이 그 자리 한가운데에서 그 겁나도록 신나는(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춤판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참 신은 우리를 그 거대한 춤에 참여케 합니다. 생명 없는 물체가 되어버린 만물을 깨워 우리와 “손을 맞잡고 기쁨에 겨워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게 만들어줍니다. 장엄한 춤이신 당신 앞에서.


「나니아 연대기」에서 파우누스와 이 춤을 추는 인간은 루시입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루시 말입니다. 설국(雪國)이 되어버린 세계는 아슬란의 등을 타고 오는 이 루시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롬 8:19-21)



<빛과 소금> 2020년 8월호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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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반짝이는 눈 (나니아 영성 이야기 5)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4

나니아 영성 이야기 5

루시, 반짝이는 눈



"루시가 [아슬란을] 가장 자주 보았어(Lucy sees him most often)."

 

나니아 이야기에서 루시는 "보는 사람"입니다. 페벤시 가(家) 아이들 중에서 가장 어린 아이였던 루시는 그 아이들 중에서도 아슬란을 가장 자주 보는 이였습니다. 'Lucy'라는 이름은 라틴어 'lux', 즉 '빛'에서 온 말입니다. 빛이 있어서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지요. 루시는 분명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니아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아이 말입니다.


아이는 자라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아이가 된다지요? 여기, 나이 들어 다시 어린 아이가 된 한 노(老) 시인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나이 60에 겨우 /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 눈이 열렸다. / 신이 지으신 오묘한 / 그것을 그것으로 / 볼 수 있는 / 흐리지 않는 눈 /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 채색하지 않고 / 있는 그대로의 꽃 /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 눈이 열렸다. / 세상은 /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 신이 지으신 /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 지복한 눈 /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 신의 옆자리로 살며시 / 다가가 / 아름답습니다. / 감탄할 뿐 / 신이 빚은 술잔에 / 축배의 술을 따를 뿐 (‘개안(開眼)’ 박목월)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사람이라야 정말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렘 5:21) 사람에 불과하지요. 노(老) 시인은 자신은 나이 60이 되어서야 "겨우" 그런 눈이 열리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 떠 보게 되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는 그렇게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한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연대기적으로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마법사의 조카』에는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나니아의 창조자는 세상을 기계 제작자가 기계를 제작해내듯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슬란은 나니아를 시인이 시를 짓듯 창조해냈습니다. 시인이 시를 짓듯 노래해냈습니다. 나니아의 창세기에서는 아슬란이 노래를 부르자 나니아의 모든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견딜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그 소리와 더불어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소리들이 들려왔다....별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그 첫 번째 소리가, 그 깊은 목소리가 그 별들을 나타나게 하고 노래 부르게 만든 것이었다.” (《마법사의 조카》 8장)

 

아슬란의 노래가 별들을 (무로부터) 불러낸 것이었습니다. 아슬란의 "견딜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는 나니아의 나무들을 불러내고, 동물들을 불러내고, 물들을 불러냅니다. 아름다움(to kalon)은 부름(kaleo)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창조자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불려나온 것들입니다. 해야, 달아, 소나무야, 밤나무야, 토끼야, 거북아, 강물아, 샘물아, 하고 부르시며 "너, 있어라" 하시는 그 말씀으로 있게 된 것들입니다.


나니아의 태초의 말씀은 노래였습니다. 태초에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로 말미암아, 그 노래를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나니아가 노래의 나라, 춤의 나라일 수밖에요. 나니아에서 무시로 벌어지는 춤판, 정례로 열리는 축제는 창조자의 사랑의 선물이자 기쁨의 산물인 이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한” 세계를 경이와 “감탄”, 감사와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나이 60에 비로소 눈이 열렸다는 시인은 노래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꽃”은 불꽃이라고. 눈 떠 보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꽃은 다 불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았다는, 그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처럼 말입니다(출 3:4-5). “있는 그대로의” 꽃과 나무는 이미 다 불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꽃과 나무는 “스스로 있는” 분께서 그렇게 “있게 하시기”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그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왜냐하면 눈 떠보면 이 세상에 “당연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창조자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의 모든 것을 창조한 다음 아슬란은 자신이 노래 불러 지어낸 그 나라에 복을 선포했습니다.

 

“나니아여, 나니아여, 나니아여, 깨어나라. 사랑하라. 생각하라. 말하라.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되어라. 말하는 동물들이 되어라. 성스러운 물이 되어라.”

 

나니아는 나무와 동물과 물이, 소나무와 밤나무, 토끼와 거북, 강물과 샘물이 아담의 아들들, 이브의 딸들과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는 나라입니다. 사람처럼 그것들도 “있으라” 하시는 창조자의 말씀을 듣는 존재, “있어서 참 좋다” 하시는 창조자의 노래가 스며들어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만물은 실은 영물(靈物)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영(Spiritus Creator)에 붙들려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렇게 영물로서 알아보고, 돌보는 존재가 바로 만물의 영장(靈長), 사람입니다. 나니아의 첫 번째 왕과 왕비가 된 사람은 런던에 살 때 자신의 말에게 친절했던 마부 프랭크와 그의 아내 헬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하얀 마녀에 의해 나니아가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되어버렸던 시기, 비버 부부는 페벤시 가(家) 아이들에게 이런 예언의 시를 들려줍니다.

 

“아담의 육신과 아담의 뼈가 / 케어 패러벨 성의 왕좌에 앉을 때 / 악의 시대가 끝나리라.”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받고, 말하는 동물에게서 예언의 말을 듣고, 만물에게서 목소리와 색깔을 빼앗아버리는 악과 싸우며, 걸어다니는 나무의 호위를 받는 사람입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신이 지으신 /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 지복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불붙어 있는 꽃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임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온 땅에 가득한 “주님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사 35:2)을 보는 사람입니다.



<빛과 소금> 2020년 7월호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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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7. 31. 11:20


나니아 영성 이야기 4

아슬란, 유다의 사자


“나니아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착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운 존재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페벤시 가(家)의 아이들도 아슬란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니아의 주(主)인 아슬란을 처음 보게 되는 순간, 아이들은 그 사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여러분은 떨어보셨습니까? 공포심 때문에가 아니라 경외심 때문에 말입니다. 공포(恐怖)와 경외(敬畏)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혹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나니아에 가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을 예배해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예(禮)와 배(拜)

 

예배시간에 예배당 안에 있다고 해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禮拜)란 예(禮)를 갖추어 배(拜), 즉 절한다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엎드러진다는 것입니다. 눈은 불꽃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고,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으신 분, 그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분 발 앞에 장로 요한이 “엎드러진” 것처럼 말입니다(계 1:17; 5:5).


나니아는 예(禮)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 나라에서는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또 윗사람도 아랫사람을 합당한 예를 갖춰 대합니다. 서로 무례(無禮)를 범치 않습니다. 매너와 예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나니아가 ‘예의 나라’(禮儀之國)인 것은 나니아의 삶의 중심에 예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禮)란 본래 예배 시에 가져야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존귀(worth)하신 분으로 알고 예배(worth-ship)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동료 인간들을 예로써 대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캐스피안에게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슬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담 경과 이브 부인의 후손이다. 이는 가장 비천한 거지의 신분이라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게 할 만큼 명예로운 일이며,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도 부끄러워 어깨를 숙이게 할 만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거지라도 인간인 이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며, 아무리 황제라도 인간인 이상 죄인 중의 한 사람이기에 누구를 멸시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니아 나라에서는 거지도 황제도 아슬란 앞에서 몸을 굽혀 절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함께 예배하는 자로 대합니다. 예로써 대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배우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니아에서 알게 됩니다. 나니아는 경외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공간입니다. 나니아는 “너무도 선하면서 동시에 너무도 무서운” 아슬란을 만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겁(怯)과 신(神)

 

아슬란을 만난 아이들은 몸을 떨었습니다. 아슬란과의 만남은 늘 그렇습니다. 겁이 납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아슬란을 만나면 겁이 나면서도, 동시에 신이 납니다. 겁이 나면서 신이 나고, 신이 나면서 겁이 납니다.


왜 겁이 날까요? 무시무시한(terrible) 존재 앞에 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신이 날까요? 그 존재는 또한, 무시무시하게 선한(good)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이 무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해본 사람은 아직 진짜 선을 만나보지 못한 것입니다. 진짜 선은 그저 봄볕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진짜 선은 무시무시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무시무시합니다. 태양처럼 무시무시한 선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서게 되면, 누구도 그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엎드러지게 됩니다. 떨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시 2:11)하게 됩니다.


진짜 기쁨은 우리를 떨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겁이 납니다. 신이 나는데, 겁나도록 신이 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크기와 높이와 깊이와 무게의 기쁨이 내 작은 영혼 안으로 밀고 들어오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

 

우리를 겁나게 하면서 또한 신나게 하는 무엇으로서의 ‘거룩’을 루돌프 오토라는 독일의 종교학자는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거룩이란 우리를 두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매료시키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10권 목록의 첫 번째 책으로 그 독일 학자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든 바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문학가로서 루이스의 가장 큰 업적은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에트 파시난스’를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아슬란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슬란은 아이들을, 또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을 떨게 만듭니다.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사로잡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어른들이 온갖 것들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외하올 분에, 또 경이로운 것들에 사로잡힐 줄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 가슴이 뛰는 아이가 되어야 하고,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신” 분 앞에서 엎드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신나지 않는 것은 신(神)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 신은 우리를 신나게, 겁나도록 신나게 만드는 신입니다.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자의 등에 올라탔는데요! 「사자, 마녀, 옷장」에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아슬란은 무시무시한 포효를 울리고는 루시와 수잔을 등에 태우고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그 거대한 사자의 따듯한 황금빛 등 위에서 수잔은 앞에 앉아 갈기를 꽉 붙들었고, 루시는 그 뒤에서 수지를 꼭 잡았습니다. 아이들은 겁이 났지만, 그 질주는 “아이들이 나니아에서 경험한 가장 멋진 일”이었습니다.


그건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기도 합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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