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살아나셨다_토머스 머튼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20. 4. 9. 15:50

 

 

그가 살아나셨다

He Is Risen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지음

권혁일 옮김



이 글은 토머스 머튼(1915-1968)19679월에 쓴 에세이 “He Is Risen”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의 사후인 1975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Argus Communications에서 소책자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후 The Merton Annual 9 (1996)에 전문이 게재되었다



그가 살아나셨고, 그는 여기에 안 계신다. 그분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는 중이다.”(16:6-7)[각주: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움직이는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그 손으로 붙들고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같은 장소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묘[각주:2]에서 드리는 예배the Holy Sepulchre cult는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장소에서 드리는 예배일 때에만 그리스도교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은 오직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조건 아래에서만 타당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이동한다는 조건, 우리가 아직 가있지 않은 곳으로 가시는 그분을 기꺼이 따라 간다는 조건,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 곳으로 그분을 찾으러 간다는 조건, 갈릴리로간다는 조건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한 것을 믿도록, 단지 이것만을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역동적인 움직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부활을 체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 생명은, 이 활력은 사랑과 만남의 힘으로 표출됩니다. ,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역사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사시고, 상호 만남과 상호 헌신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이 미래를 함께 세웁니다. 그 미래는 하나님의 나라라 불립니다. 그 나라는 이미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현재적인 실재reality입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를 함께 건설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완성되도록 그분과 함께 협력합니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교회의 메시지입니다. 단지 부활주일에만이 아니라 연중 매일, 그리고 매년,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교회는 이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부활절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활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증명하려고 애써야할 교리가 아닙니다. 또는 논쟁해야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의 생명이자 행동입니다.

이러한 진리들 위에 자신의 전 삶을 세우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의 전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행동에 의해 변화됩니다.

그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분을 만난 것처럼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을 압니다. 그러한 만남은 꼭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인격적/개인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세례는 이와 같은 만남의 확증이자 표시입니다.

그런데 세례는 이어지는 그리스도와의 만남들 속에서 반드시 살아내어져야 합니다. , 성찬 안에서, 그리고 다른 성례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과 들음 안에서,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선포된 것임을 깨닫는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러한 만남들 속에서 세례가 반드시 실제로 살아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우리가 그곳에 있는 것조차 몰랐던 무언가를 깨웁니다.

그리스도와의 참된 만남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해방시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던 힘입니다. 그것은 소망이며, 삶을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또한 그것은 회복력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패배했다고 생각할 때 다시 일어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장하고 변화하는 능력이며, 창조적 변형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패배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파괴하려고 하거나 우리의 인간적 그리고 영적 성장을 방해하려는 모든 것들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활절기에 진행되는 일련의 행사들을 통해 우리의 안에 있는 죽음과 생명의 결투를 노래합니다. 이것은 격렬하고 필사적인 싸움입니다. 우리 안의 삶과 죽음의 전투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소망에 대항하는 인간의 절망이 벌이는 전쟁입니다.

다시 살아난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죽어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전에는 그와 함께 부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조적 변형의 역동에, 부활과 갱신의 역동에, 사랑의 역동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의해서입니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했을 때, 그가 정녕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며 인간적 편견의 제한과 금기에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히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단지 그가 더 높은 법칙, 곧 은혜와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아도 되며,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는 모든 미신들, 모든 맹목적인 금기들과 종교적 허식들, 사실상 공허한 율법주의의 모든 형식들로부터의 자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언제 다시 읽어보십시오. 완전한 갱신을 향한 교회의 부름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과감히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과감히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해야 합니다. 그는 반드시 인기 없는 일들에서조차도 과감히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필요하다면, 그는 다수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생각하기에 복음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결정들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그가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다른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들이 이룬 업적 때문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은혜로 부르심을 받는다.”[각주:3] 이 진술은 그리스도인의 열등의식을 효과적으로 없앱니다. 그 열등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도 결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성 바울의 자유에 대한 가르침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군중의 의견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 군중 속에 숨고, 군중과 함께 달립니다. 심지어 그 군중이 폭도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군중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혼자라고 느끼고, 도덕적으로 벌거벗었다고 느끼곤 하는데, 그들은 그러한 느낌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있는 그리스도인은 과감히 군중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겸손해서 홀로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에 주의를 기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는 종종 제도화된 인간 권력 구조가 내세우는 목적과 계획에 정반대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면, 우리는 수난의 외로움 속에 계신 그분의 곁을 과감히 지켜야 합니다. 마치 현대 국가가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에게 등을 돌리는 것처럼, 모든 기득권층이, 즉 종교적 기득권층과 사회적 기득권층 모두가 그분을 향해 등을 돌릴 때도 말입니다. 사실상 사도들 중에는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은 유대 정치의 극좌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 저항하여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 지망자a would-be freedom fighter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심문과 처형을 공부한다면, 그분이 정죄된 죄목이 바로 그가 합법적인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싸우는 혁명가, 체제전복적인 급진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철저히 모든 유대 정치 집단들의 바깥에 서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정치적 혁명 운동으로 보이도록 왜곡되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위한 투사였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형태의 폭압, 모든 형태의 지배 성령, 사랑의 법,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를 제외한 그 누구 또는 그 무엇의 지배 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셨는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이 싸움에서 절정을 이루는 전투였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이해하면, 우리는 성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칭송하며 한 다음과 같은 말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은 우리로 자유 안에 머물게 하려고 하신 것이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51)에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을 꾸짖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위해 어떤 규례들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갈라디아의 개종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적 과도함religious overkill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이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뿐만이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제의적 관습들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리스도교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자신들은 유대교의 율법 준수를 통해서 여전히 보호받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과도함은 우리 시대의 세상에서 그저 그리스도인으로 단순히 존재하기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는 부와 권력의 편에 서는 것에 대한 정당화와 지지를 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문자적으로 과도함의 종교가 됩니다. 그러한 종교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적들을 완전히 씨가 마를 때까지 파멸시킵니다. 이를 행하기 위해 그는 이 일에 방해가 되는 신약성서의 원수 사랑에 대한 말씀들은 모두 [고의로] 잊어버립니다!

성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방종에 굴복할 위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종은 성령과 정반대되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5:14-16).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리될 수 없는 자기 부인의 엄격함을 서술해 나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들을 모두 준수하였기 때문이 아니며, 우리가 종교적 영웅들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대신 우리는 고통하고 분투하는 인간들이며,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죄인들이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죄수들이고, 우리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모욕하는 권세들에 대항하여 영적 무기를 든 반항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도움 없이도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우리를 그분 주위로 모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또는 우리가 지금까지 그 전투로부터 도망치며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렸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합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부활 이야기는 매우 암시적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핵심과 중심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활 체험은 종종 사도들과 다른 부활의 증인들의 체험의 패턴을 따라갑니다.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진 활력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종종 잊는 것은 모든 부활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증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무덤으로 간 여인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분의 몸을 방부 처리하는 것, 오직 이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그녀들이 옮기기에는 너무 무거운 돌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의 시신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 돌을 굴려 줄 누군가를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삶에서도 발견되는 일종의 정신적 패턴입니다. 우리도 너무나도 자주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입술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가 죽었다고 몰래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대한 돌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그분의 시신에 접근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의 시신의 종교cult가 됩니다. 그러한 종교는 우리가 그분에게 갈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돌을 옮기는 문제로 인한 분노와 절망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진정 살아있는 신앙이기를 그치고 그저 율법주의적이고 제의적인 형식이 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대신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형식적 숭배일 뿐입니다. 그러한 죽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와 빛으로서 여겨지지 않고, 일종의 신성한 ’, 대단히 거룩한 물건object, 신학적 유물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과 빛을 어떤 다른 것으로 대체해버린 결과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가까이 계신 살아계신 주님의 강력한 임재 대신에 우리는 경건한 이미지들과 추상적 개념들로 이루어진 구조를 세워서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최소한 그분은 송장 같은 밀랍 인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서 이 움직이지도 않는 물체를 숭배하고, 온갖 종류의 향유로 방부 처리를 하며,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것이 강력한 마술로 당신을 부유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종교적 생각들과 습관들과 전례들과 관습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보다 우리에게 더 실제적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모든 종교적 액세서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의 길을 방해하거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바울 사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종교적 법을 철저히 준수하던 때를 회고하며, 그러한 경건은 모두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한 가지만 원했습니다. 여기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얻는 최고의 유익보다 더 대단한 것은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라 믿습니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들을 쓰레기와 같이 여기고 그것들을 잃어도 좋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에 이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완전만을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전부는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또한 그분의 죽음의 본을 따름으로써 그분의 고통에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8-11)

거룩한 여인들이 그리스도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돌이 굴려져 옮겨졌다는 사실은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예수의 몸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호한 종교적 문제들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묘석墓石 뒤의 죽은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들은 말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 돌을 굴려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몸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아니며, 생명 없는 물건도 아닙니다. 소유물의 일부도 아니며, 심히 종교적인 가보heirloom도 아닙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그는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생활, 그리스도교 예배, 그리스도교 공동체, 성찬, 이 모든 것들이 한정된 제의적 경건에 의해 모호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경건은 부활하신 주님을 영으로, 생명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가 시신인 것처럼, 거룩한 물체인 것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 부활하신 구세주의 잔치, 곧 어린양의 잔치에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생명의 떡으로 나아갑시다. 이 떡은 죽은 자의 음식이 아니라 참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잔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잔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그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보다 앞서 그의 나라로 가십니다! 할렐루야!





  1. 옮긴이 주 | 이 글에 직접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저자가 읽었던 성경 번역본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모두 원문에 나오는 영어 성경을 우리말로 옮긴 것들이다. 머튼은 Jerusalem Bible (1966)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 옮긴이 주 |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터에 세워진 교회다. 이 교회는 주후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지가 되어 왔다. 그리스어로 된 이 교회의 원래 이름은 “부활의 교회”(Church of the Anastasis)다. [본문으로]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n.40.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마카리우스와 조랑말(토머스 머튼)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19. 7. 15. 12:27
토머스 머튼의 시를 한 편 우리말로 옮겨서 공유합니다. 마카리우스(Macarius of Egypt)는 4C의 사막 교부입니다. 이 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사막에서의 고독과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어 자신과 하나님과 형제 자매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지게 한다는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충분할 듯합니다. 혹시 인용하실 분은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카리우스와 조랑말

 

 

사막의 언저리에 위치한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의 생각에는) 그녀는

마법에 걸려

조랑말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먼저 그녀를 질책했다.

“왜 너는 이렇게 말로 변해야 했느냐?”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에게 고삐를 채워

뜨거운 황무지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는 마카리우스라 불리는

성인이 수도실에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 그들은 말했다.

“여기 있는 이 젊은 암말은

저희의 딸입니다, 또는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사악한 사람들이,

마법사들이, 이 아이를

지금 당신이 보시는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기도해 주셔서

이 아이를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바꾸어 주십시오.”

 

“저의 기도는” 마카리우스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눈에는 암말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들은 이 착한 아이를

짐승이라 부릅니까?"

 

그러나 그는 그녀를 부모들과 함께

자신의 수도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그 소녀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가 어떠한 사랑으로 그의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는지를 그들이 보았을 때에

그들은 즉시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결코 짐승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바뀐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녀였다.

 

“그대들의 원수들은

(마카리우스가 말했다)

여러분 자신의 눈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비뚤어진 생각이

(은자는 말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을

새나 짐승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여러분 자신의 나쁜 의도가

(맑은 눈을 가진 이가 말했다)

세상을 유령들로 가득 채웁니다.”

 

 

토머스 머튼 지음, 권혁일 옮김

『분노의 계절의 상징들』에서

 


Macarius and the Pony

 

 

People in a village

At the desert's edge

Had a daughter

Who was changed (they thought)

By magic arts

Into a pony.

 

At first they berated her

“Why do you have to be a horse?”

She could think of no reply.

 

So they led her out with a halter

Into the hot waste land

Where there was a saint

Called Macarius

Living in a cell.

 

“Father” they said

“This young mare here

Is, or was, our daughter.

Enemies, wicked men,

Magicians, have made her

The animal you see.

Now by your prayers to God

Change her back

Into the girl she used to be.”

 

“My prayers” said Macarius,

“Will change nothing,

For I see no mare.

Why do you call this good child

An animal?”

 

But he led her into his cell

With her parents:

There he spoke to God

Anointing the girl with oil;

And when they saw with what love

He placed his hand upon her head

They realized, at once.

She was no animal.

She had never changed.

She had been a girl from the beginning.

 

“Your own eyes

(said Macarius)

Are your enemies.

Your own crooked thoughts

(said the anchorite)

Change people around you

Into birds and animals.

Your own ill-will

(said the clear-eyed one)

Peoples the world with specters.”

 

By Thomas Merton(1915-1968)

from Emblems of a Season of Fury

New Directions, 1963.

 

Macarius of Egypt (300-391)

 

 

 

posted by 바람연필

윤동주의 〈그 여자〉와 '위안부' 소녀들을 위한 탄원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16. 1. 10. 19:20

오늘은 윤동주 시인(1917-1945)의 〈그 여자〉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를 함께 읽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시인의 육필원고에 있는 그대로, 곧 당시의 맞춤법을 고치지 않고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젓슴니다.


오날도 가을바람은 그냥붐니다.


길가에 떨어진 불근 능금은

지나든 손님이 집어갓슴니다.


1937. 7. 26.



겉으로만 보면 가을 풍경의 한 장면을 그린 짧고 평범한 회화적인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함께 읽어야 할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윤동주평전》을 쓴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송우혜 님은 이 시가 고대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Sappho)의 〈한 처녀〉라는 작품을 패러디한 시라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사포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시지요. 



한 처녀


저 높은 가지 끝에서

불그스레 익는

아름다운 사과와도 같으니

따지 않음은 잊은 것이 아니요

높아서 손이 닿지 못함이다.


- 사포





송우혜 님은 이 두 작품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였습니다. "사포의 한 처녀와 윤동주의 그여자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양자는 제목에서부터 기본구도까지 아주 흡사하게 닮은꼴이다. 그러나 '여자'를 노래한 시각은 정반대이다. 사포는 뭇 남성들로서는 감히 '손이 닿지 못하는,' 마치 높은 가지 끝의 붉은 사과와도 같이 고고하고 드높은 기품의 아름다운 처녀의 존재를 노래했다. 그러나 윤동주의 비평정신은 이 시에 불만을 느꼈다. …… 그는 아무리 '손에 닿지 못하는' 곳에 있다 해도 결국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처녀들의 운명임을, 제 또래보다 먼저 피어난 뛰어난 처녀가 '지나는 손님'으로 묘사될 만큼 엉뚱한 인간에게 허망하게 걸려드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실체임을, 날카롭게 피력한 것이다."[각주:1]


그러면 윤동주 시인은 왜 사포의 낭만시를 풍자적인 시로 바꾼 것일까요? 윤동주가 이 시를 쓴 날짜는 1937년 7월 26일입니다. 그가 북간도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에 재학할 때로 노구교(루거우 다리) 사건(1937년 7월 7일)으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직후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중국과 일본은 지속적으로 대립해왔습니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자신들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전선을 상해까지 확장시켜 제1차 상해사변(1932)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때 상해의 일본육해군이 '위안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위안소는 점차 중소도시로 확장되어 갔다고 합니다.[각주:2] 또한, 여러 사람들(피해자, 가해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가 살았던 북간도 곳곳에도 위안소가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참조: 지린성의 일본군 위안소) 그렇다면 1937년 당시 북간도 조선인들의 중심지인 용정에 있었던 윤동주도 '위안부'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윤동주의 시 〈그 여자〉에 나오는 길가에 떨어져 버린 "붉은 능금"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소녀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능금을 집어간 "지나던 손님"은 남의 땅을 점령하러 들어온 일본군인들이 아닐까요? 시인이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 이런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그 여자〉를 읽어보면, 담담한 문체로 쓰여진 진술이 오히려 매우 슬프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시적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붉은 능금을 집어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인은 스무살의 젊은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슬픈 일을 시로 기록해 두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윤동주의 〈그 여자〉를 사포의 〈한 처녀〉와 다시 한 번 대조해보면, 2연이 다음과 같은 단 한 줄로 되어 있어 시선을 끕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가을바람"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람은 인간의 힘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영역, 나아가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에게 자연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윤동주는 〈또 태초의 아침〉이라는 시에서 바람에 전깃줄이 잉잉 우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을바람이 오늘도 그냥 불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능금이 떨어지고 지나던 사람이 그것을 집어가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별다른 관여 없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것으로 시인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능금이 무게로 인해 저절로 떨어졌는지, 바람에 떨어졌는지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데, 만약 바람에 떨어진 것이라면 비극적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비극에 하나님도 결과적으로 거든 것이 되니까요. 어쨌든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하나님의 침묵 또는 방관은 현실에 비극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로 제시됩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이 시는 굉장히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고백으로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일종의 탄원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윤동주는 시편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리고 외사촌 동생인 김정우 시인에게 시편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기도 하였습니다.[각주:3] 시편에 나오는 많은 탄원시들에는 시인(또는 공동체)가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시편 137편 7절에서는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당시 히브리인들이 당한 원통한 일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그 여자〉도 그냥 부는 가을바람처럼 방관하시는 듯한 하나님을 향해 외친 시인의 탄원이 아닐까요? 당시의 험악한 상황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격정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시인은 당시 소녀, 또는 처녀들이 일본군들에게 끌려가 당하는 비극을 "기억해주십시오,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무언의 외침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안타깝게도 당시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분들이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한일 외교부 장관이 공동기자회견문의 형식을 통해 '위안부' 관련 합의를 발표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번 합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합의가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이유를 들어 보면, 그들 중에는 '위안부' 관련 사안을 '문제'로 인식하는 이들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위안부 문제"라고 자주 표현해서 그런지 어떤 이들은 '위안부' 이슈가 한일 사이의 외교와 경제 협력을 가로막는 골치 아픈 '문제 거리'이고, 그래서 적당한 수준에서 빨리 풀어 해치워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위안부' 관련 사안은 결코 그런 '문제 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비극이며, 결코 지워져서는 안 되는 역사입니다. 한일 간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번 합의로 더욱 상처받은 '위안부' 피해자들, 이젠 고령의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다시 탄원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일로 우리 국민들 사이에, 한일 사이에 분열의 골이 더 깊어지는 이 안타까운 상황으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더욱 간절하게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1. 송우혜. 『윤동주평전』, 제3판. (서울: 서정시학, 2015), 253-54. [본문으로]
  2. 양현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사적 성찰과 반성." 기독교사상 666 (June 2014): 18-29. [본문으로]
  3. 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 『나라사랑』 23 (1976년): 1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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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의 <동생을 위해> 그리고 4월 16일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14. 5. 16. 08:54

2014년 4월 16일, 고난주간 수요일, 세월호가 조난당하고 삼백 여명의 꽃다운 생명이 바닷속에 잠겼다. 

1943년 4월 16일, 고난주간 금요일 밤, 토마스 머튼의 동생 존 폴 머튼이 영국 해협에서 조난 당하고, 다음날 이른 새벽 바다 위에서 숨을 거뒀다.


존 폴 머튼(John Paul Merton, 1918-1943)은 당시 캐나다 공군 소속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탄 비행기가 고도를 잃고 바다에 추락했고, 그 충격으로 그는 척추가 부러져 버렸다. 함께 탑승하고 있던 동료 두 명이 그를 간신히 고무보트로 끌어 올렸지만, 그는 세 시간 정도 갈증 속에서 버티며 기도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동료들은 구조를 기다리며 바다 위를 표류하다가 표류 넷째 날 존의 시신을 수장하였고, 다섯째 날에 구조되었다. 양친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에 토마스와 존 두 사람에게 서로는 참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토마스 머튼은 동생의 죽음 소식에 크게 슬퍼했고, 그의 세 시간의 목마름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목마름을 보았다. 아래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토마스 머튼이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애가(歌)인데, Thirty Poems(1944)라는 그의 첫 번째 시집에 실렸다가 후에 그의 자서전 《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 초판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세월호 사고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애도하며, 머튼의 시를 한글로 다시 옮긴다. 




동생을 위해 : 1943년 작전 중 실종됨

 


사랑스런 아우야, 내가 잠들지 않으면

나의 눈은 너의 무덤에 놓는 꽃이란다

그리고 내가 빵을 먹지 못하면

나의 금식은 버들처럼 네가 죽은 곳에 살리라

내가 뜨거운 열기 속에 갈증을 적실 물을 찾지 못하면

나의 갈증은 너, 가련한 여행자를 위한 샘이 되리라

 

네 가련한 몸은 어디,

어느 적막하고 연기 자욱한 나라에

누웠느냐, 실종되었느냐, 그리고 죽었느냐?

그리고 네 불행한 영혼은

어떤 처참한 풍경 속에 길을 잃었느냐?

 

오라, 나의 노동 속에 안식처를 찾으라

그리고 내 슬픔 속에 네 머리를 눕혀라,

아니 차라리 내 생명과 피를 가져라

그래서 널 위해 더 좋은 침대를 사라

아니 내 숨과 내 죽음을 가져라

그래서 널 위해 더 좋은 안식을 사라

 

모든 전사들이 총탄에 맞고

깃발들이 먼지 속으로 추락할 때

너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여전히 말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우리 모두를 위해.

 

네 사월의 잔해 속에 그리스도가 학살당하고

내 봄의 폐허 속에 그리스도가 눈물을 쏟는다.

그의 눈물의 돈이

너의 약하고 외로운 손으로 떨어지리라

그러면 너를 다시 사서 너의 땅으로 돌아오라.

그의 눈물의 침묵이 

종소리처럼 너의 낯선 무덤에 떨어지리라.

그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오라그들이 너를 집으로 부른다.

 

 

/ 토마스 머튼 지음, 권혁일 옮김.

Thomas Merton(1915-1968), "For my Brother : Reported Missing in Action, 1943," in The Collected Poems of Thomas Merton (New York: New Directions, 1977), 35-36.




posted by 바람연필

구름, 영성 생활의 인도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12. 11. 12. 16:04
  •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을 때도
    그 안개가 실은
    하나님의 임재 구름이라고 믿고 걸아가야겠습니다.

    BlogIcon 산처럼 2012.11.14 07:08 신고


"어떤 이가 이집트에서 달아나 국경선을 벗어났는데, 유혹의 공격을 받아 겁에 질리게 되면, 그 때마다 인도자는 높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원수가 그를 추격하여 군대로 포위할 때마다 인도자는 바다를 변화시켜서 그가 건널 수 있도록 만든다.

 

이렇게 바다를 건널 때에 구름이 인도자로 섬겼다. 우리보다 앞선 이들은 구름을 성령의 은혜로 바르게 해석하였다. 성령은 합당한 이들을 선 그 자체이신 하나님(the Good)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성령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 물을 통과해서 지나간다. 왜냐하면 그 인도자가 그를 위해 물 사이로 길을 내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그는 '자유'로 안전하게 인도되어지며, 그를 속박하기 위해서 추격하던 이는 물속에서 파멸된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c.335-395), The Life of Moses, bk. 2, ch.120-121. 



※ 닛사의 그레고리우스는 모세의 생애를 (1)빛에서 출발하여 (2)구름을 지나 (3)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적 여정으로 해석하였다. 위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죄된 삶(이집트)을 떠난 이후에 유혹(이집트군의 추격)을 받아 다시 죄의 속박에 빠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그 때에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하여 바다를 건너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에서 구름(영적 황량함, 건조함, 침체 또는 불명확함 등)은 물리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

어둔 밤 - 십자가의 성 요한

기타/고전 새롭게 읽기 2012. 7. 6. 16:39


    어둔 밤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불타 열망하며

좋아라, 순전한 은혜여

아무도 모르게 나왔다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옷을 바꿔입고, 비밀계단을 오른다
좋아라, 순전한 은혜여

캄캄한 속에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행복한 밤에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은밀한 곳

빛도 없이 길잡이도 없이

나도 아무것도 보지 못 했다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빛밖엔


4. 그 빛이 나를

정오의 빛보다 더욱 확실히 인도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5. 아, 나를 인도하는 밤이여

새벽보다 더 사랑스러운 밤이여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자를

한몸으로 묶어주는 밤이여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자를 변화시키고


6. 내 가슴의 꽃밭

오직 그분만을 지켜온 그곳

거기서 당신이 잠드셨을 때

나는 당신을 어루만지고

잣나무의 바람이 부채가 되고


7. 작은 탑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나는 그분의 머리채를 만져드릴 때

부드러운 당신의 손으로

내 목에 상처를 내시니

나의 모든 감각은 끊어졌다


8. 망각 속에 나 자신을 남겨두고

사랑하는 그분께 내 얼굴 기대이니

모든 것이 멈추고, 나도 사라진다

백합화 떨기 속에

내 시름 버려두고 돌아선다


십자가의 성 요한 지음

권혁일 옮김

왼편의 작품은 16세기 스페인에 살았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Juan de la Cruze, 1542. 6. 24.- 1591. 12. 14.)의 "어둔 밤(The Dark Night)"라는 시이다.

이것은 연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 체험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은 그의 수도원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들에 의해 납치 되어 어두운 감방에서 약 아홉달 동안 갇혀 지냈는데, 이 때 그가 경험한 고통과 은혜를 "어둔 밤"과 "영적 찬송 (Spiritual Canticle)"이라는 시에 담아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 "어둔 밤"을 해설한 주석서가 바로 <갈멜의 산길>과 <어둔 밤>이라는 영성 고전 작품들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긴 두 권의 책들보다 이 시 한편이 '어둔 밤'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어둔 밤'은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모든 영적, 육적 욕망으로부터 정화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과의 연합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둔 밤을 주시고,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의 다른 욕망들이 어두워지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욱 불타게 하신다. 우리의 삶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고 삶의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품으며 기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