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과 영적 독서

기타/영성 관련글 2021. 3. 5. 16:45

사순절과 영적 독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십일을 일컫는 말이다. 왜 사십일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며 준비하신 날수가 사십일인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며 기념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온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이다. 대림절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십일이고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십일이다. 사십일 동안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영성훈련들을 통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기다린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에 참여할 날을 기다린다.

 

사순절은 사십일 동안 영성훈련에 집중하는 기간이다. 여기에서 영성훈련이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의 활동을 잘 알아차리고 순종하기 위해 집중하는 모든 내적이고 외적인 방법들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방법이라는 뜻에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고도 한다. 영성훈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 묵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첫 번째 수단이다.

 

성경 묵상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성경 묵상 방법 중 교회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이 영적 독서 또는 거룩한 독서이다. 라틴어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번역한 것이다. 귀고2세는 <수도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네 가지 단계 또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그 네 가지 단계는 읽기, 묵상, 기도, 그리고 바라보기이다.

 

첫째 단계, 정해진 성경 본문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읽는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선택한다.

 

둘째 단계, 선택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은 능동적으로 정신, 마음, 그리고 의지를 동원해서 전인격적으로 말씀을 마주하고 반응하는 행위이다. 지성을 동원해서 말씀을 이해하고, 감정을 동원해서 말씀을 느끼며, 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셋째 단계, 묵상하면서 올라온 마음들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기도한다. 죄를 깨닫고 탄식하는 마음이 올라오면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은혜를 깨닫고 느끼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결단의 기도를 드리고, 또 지혜와 용기를 주시도록 청원의 기도를 드린다.

 

마지막 단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사랑의 임재 안에 고요히 머문다. 렉시오 디비나를 소개하는 영성 고전 <수도승의 사다리>를 쓴 귀고 2세는 이 네 가지 요소가 성경 묵상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 한다: “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도가 열정적일 때 [바라봄]에 이르는 것이지, 기도 없이 [바라봄]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경험 되지 않으면 마음은 어느새 메마르거나, 오류에 빠지거나, 냉담한 상태에 빠지고, 열매 맺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날마다 최소한 30분씩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성경 묵상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성경 묵상은 아침에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 묵상은 사실 묵상의 시작일 뿐이다. 아침에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을 마음에 담아 하루 종일 생활하면서 수시로 되새기는 것이 진정한 묵상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구체적인 순간에 적용 되고 나를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이러한 성경 묵상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바로 시편 119편 103절인 것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루 종일 묵상하면서 깨닫고 느낀 것을 영성 일기장에 기록해놓으면 나중에 영적으로 힘든 시기에 도움이 된다.

 

성경을 묵상할 때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까? 사순절 시기에 하는 묵상의 주요 주제는 죄, 죽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첫째, 사순절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악 된 습관을 고치기에 좋은 시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아울러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죄악 된 습관을 벗어버리려면 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이 들어야 한다. 죄 묵상에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들은 다음과 같다: 십계명(출애굽기 20:1-17), 사도 바울의 악덕 목록(갈라디아서 5:19-21, 디모데후서 3:1-5).

 

둘째, 사순절은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겸손해지기에 좋은 시기이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이 시작 되는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고 했다. 예배 시간에 목회자가 재를 머리에 발라주면서 창세기 3장 19절을 읽어 주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수도원 영성의 위대한 스승인 요한 클리마쿠스는 <천국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자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영성훈련이라고 강조했다: “부단히 노력하더라도 주님께 진 빚을 갚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을 자기 생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경건하게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면 가장 큰 죄인 교만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우리가 얼마나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살고 있는 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부활의 감격을 크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인내와 희생의 삶을 결심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또는 일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때 올라온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시기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이 새롭게 올라오는 것을 경험하기에 적합한 시기이다. 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성경 본문은 당연히 복음서이다. 복음서를 한 권 정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읽고 묵상해보라. 우선 예수님을 더 잘 아는 것을 목표로 기도하며 묵상한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정보를 축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격적으로 사귀어 안다는 의미이다. 복음서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가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이 동시에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더 가까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2021년 사순절에 특별히 성경 묵상의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은 코로나 재앙이다. 우리는 현재 인류의 역사에 남을 감염병 재앙의 한 가운데에 있다. 성장의 가도를 질주하던 인류 문명이 강제로 멈춤을 당했다. 이 재앙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반드시 묵상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재앙 및 탄식과 관련된 본문들을 읽고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 백성이 경험한 열 가지 재앙(출애굽기 7-12장), 피조물의 탄식(로마서 8:18-22).

 

이번 사순절 성경 묵상을 통해 죄악 된 습관을 한 가지 극복하고, 더 겸손한 마음으로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되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이강학

 

영락교회 「만남」(통권565호, 2021년 3월) 게재.

posted by 바람연필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기타/영성 관련글 2021. 3. 3. 22:26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블루(Blue)와 부재(不在)

 

“코로나 블루(corona blue)”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19 대유행으로 인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바로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사람들과의 단절감은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신앙인들까지도 우울감 속에 욱여넣고 있다. 아무리 어둡고 어려운 시대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날마다 경험한다면, 잘 살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전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주요한 장은 집회였다. 주일은 물론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교회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때를 따라 열리는 사경회, 부흥회, 수련회 등의 집회를 통해서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집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일예배도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해 우울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참으로 어둡고 메마른 시대다. 그러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성경이다.  

 

 

갈멜에서 호렙으로

 

열왕기상 18장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대결하여 승리한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멜 산 꼭대기에서 일종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 집회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다(왕상 18:24, 37-39). 또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삼년 동안의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렸고,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아합의 병거를 앞질러서 달려갔다. 곧,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명백하게 보이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회 후에 이세벨이 격노하여 “내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왕상 19:2)고 엘리야를 협박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갔다. 그는 이세벨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두려움과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던 그를 호렙 산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호렙 산에서의 하나님은 갈멜 산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셨다. 갈멜에서 하나님은 기적으로, 불로 응답하셨다. 그러나 호렙에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이 명백하게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방법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는 침묵 가운데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한글개역개정에서 “세미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부드러운 고요(정적)의 소리”(דְּמָמָ֥ה דַקָּֽה ק֖וֹל / 콜 드마마아 다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영어성경 NRSV에서는 이 부분을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라고 번역한다(왕상 19:12).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원래 정적, 고요, 침묵이란 소리가 없는 것인데, 순전한 침묵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다.

 

 

장애물을 넘어서서 


이처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놀라운 현상으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는 대중 집회가 어려운 이때에, 홀로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2018)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우리의 모래시계 같은 인생에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이 삶을 교회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독교 유산이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로 변해 가면서 갈수록 더 피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복 있는 사람, 2018), 151.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 비록 유진 피터슨은 북미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개신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삶.” 이것은 새로운 삶의 형태, 또는 새로운 영성훈련 방법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사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삶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공생애 중에도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던 삶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고독과 침묵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이라고 하면,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고독(孤獨)’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solitude’(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를 구분한다. 먼저 solitude는 혼자 있는 상태인데, 특히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loneliness’는 홀로 있어 친구나 말을 나눌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행감을 의미한다.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s.v.v. “solitude,” “loneliness.”
 흔히 영성생활에서 강조되는 고독은 loneliness, 곧 외로움이 아니라 solitude다. 

 


참된 고독과 침묵이란


그렇다면 영성훈련으로서의 고독과 침묵은 무엇일까?


1. 먼저 고독은 대중 속으로의 도피를 중지하고 자신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두움이 존재한다. 죄나 상처, 두려움이나 불안, 근심이나 걱정 등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 어두운 감정들과 생각들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잊기 위해 대중 속으로 도피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즐긴다. 그러나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내면의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존재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고독은 그러한 도피를 중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 혼자서는 그러한 어두움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도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2. 또한 고독은 부적절한 집착으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갈망하는 존재들이다. 산다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많은 활동들로 채운다.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성취감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만족감을 위해 더 맛있는 것을 찾아서 먹고, 더 좋은 옷이나 물건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갈망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고독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물질, 쾌락 등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부적절한 집착들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 354-430)고백록에서 말했듯이 우리 영혼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다음으로 침묵은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6:7)고 가르치셨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기술이었다. 신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술이 바로 제의와 결합된 기도였다. 그들에게서 기도는 신을 조종하는 마법의 언어또는 주문(呪文)이었으며, 이교의 제사장은 그러한 언어를 숙지한 기술자였다.

 

비슷하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려고마법과 같은 기도를 쏟아낸다. 어떤 이들은 유창한 말로 기도하는 것, 또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기도를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방언이 하나님의 신비에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말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언어로 기도할 때에 그 언어가 하나님의 가슴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김현승의 유명한 시, 가을의 기도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면, 무성한 낙엽들과 같은 말들이 떨어지고 침묵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겸허한 모국어”, 곧 가장 진실된 언어를 채우신다.


4. 나아가 침묵은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공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언어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엄밀히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어 말로 기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비공개의 방, 즉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언어화된 은 내면에 있는 생각과 감정 등을 표현하는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 언어(primary speech)로서의 기도를 침묵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침묵은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언어를 초월하여, 깊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공간이다.


종합하면 고독과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고 내적 자아가 깨어나는 성소다. 

 


고독, 공동체, 사역

 

20세기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된 고독은 인격체(person)의 집”이라고 했다.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Directions, 1962), 53.) 여기서 인격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적 자아, 곧 ‘참 자아’(true self)를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거짓 자아, 곧 가면을 쓰거나 왜곡된 자아의 정체가 폭로되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참 자아가 깨어나는 집과 같은 곳이 바로 참된 고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참된 고독은 고립과 반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깨어난 참 자아들은 서로를 찾아 공동체(community)를 이루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J.M. Nouwen: 1932-1996)도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공동체를 이룬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며 …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두란노, 2007), 150.)
 
그러나 공동체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집단(collectivity)이다. 머튼에 의하면 집단은 개인들(individuals), 곧 거짓 자아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들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가면을 쓴 채, 오직 집단에 순응하여, 집단의 목소리를 낸다. 거짓 고독은 이러한 개인들의 도피처다. 그저 사람이 싫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거짓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고독 속에서는 참된 자아가 깨어날 수 없고, 개인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공모자들이다. 모일 수 있을 때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요즘처럼 모이지 못할 때는 개인으로, 여전히 거짓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거짓 자아의 가면 속에서 그 영혼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질식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지금, 참된 고독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만큼이나 매우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렇게 개인들이 인격체들 변화될 때에야 우리의 교회도 참다운 공동체로 새로워질 수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런 ‘공동체’와 ‘집단’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교회일수록 ‘공동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일수록 ‘집단’에 더 가까울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인격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개인’에 더 가깝다. 그러한 ‘개인’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인이며, ‘개인들’이 경영하는 교회는 ‘이익집단’이나, 잘 해 봐야 사적 ‘종교 집단’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생색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이타심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섬긴다. 그리고 그 사역이 마친 후에는 다시 예수님께서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고독의 자리로 물러간다(눅 3:15-16). 마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고독과 공동체와 사역이 어우러져서, 온전한 영성생활이 이루어지게 된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고독과 침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1. 매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자. 오늘날은 원하지 않지만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비자발적인 고독을 자발적인 고독으로 바꾸어보자. “나와 함께 거하자.”는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현존 가운데로 나아가자. 우리가 “주님,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주님은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요 1:38-39). 주님이 계신 곳, 고독과 침묵 속으로 매일 나아가자. 처음에는 5분도 좋다. 처음부터 욕심내기보다 짧은 시간부터 시작해서 점점 시간을 늘려 가면 된다. 타이머로 시간을 설정해 두고, 그 시간만큼은 침묵 속에 앉아 있자. 


2.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한다. 참된 고독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전 3:16). 그러한 진리를 그저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주님께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 지식을 현실화 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가운데, 마음속을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이 떠오르면, 가볍게 주님께 말씀 드리고 흘려보낸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만히 침묵 속에 앉아 있으라. 거짓 자아의 그 비밀스러운 정체가 폭로되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이다. 그러나 거짓 자아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3. 침묵 시간이 좀 더 늘어나면, 침묵 가운데 거룩한 읽기, 영적 일기 쓰기, 성찰의 기도 등을 하는 것도 좋다. 단순히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독교 영성 전통은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 해왔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각자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훈련을 찾아서 실천해 보라. 그런데 그러한 활동들도 몇 분간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고독을 함께 나눌 동반자 그룹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이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보호자다. 이러한 동반자 그룹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자신의 고독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오늘날처럼 그것이 어려울 때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적절한 어플리케이션이나 프로그램들을 활용하여 영상과 음성으로 또는 음성만으로도 그룹 모임을 가질 수 있다. 


5. 고독을 인도하고 안내할 영적 지도자를 찾는다. 여행에도 여행가이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에도 영적 안내자가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영적 생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영성지도자를 찾으라.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 지도자지만, 자신도 역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한 영혼이다. 성도들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찾아 왔을 때에, 그저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스스로 영성에 대한 공부와 훈련에 좀 더 시간과 열심을 내어야 한다.


6.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매일의 짧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외에도 한 달에 하루 ‘고독의 날’(a day of solitude)을 가지고, 일 년에 며칠 온전히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연례 리트릿’ 또는 ‘기도 주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고 할 일이 많은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그러한 시간을 가진다면, 영적 여정에 매우 많은 유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라는 질문에는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이러한 질병과 악을 방치하시는가?”라는 신정론(theodicy)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의문과 씨름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 포비아(church-phobia)”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한 경우에 목사와 교인들은 진리와 생명의 전달자가 아니라 거짓과 바이러스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들’(christs)이 됨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개인’이 죽고 ‘인격체’로 다시 살아날 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성육신’하실 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고후 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고후 2:15).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집단’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거듭날 때 교회가 다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야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보며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라며 탄성을 터트리게 되지 않을까?(말 3:12).

 

권혁일. 「목회와신학」(통권379호, 2021년 1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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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은 하나님 체험, 사랑의 체험입니다

기타/영성 관련글 2019. 5. 27. 08:14

영성은 하나님 체험,

사랑의 체험입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곧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비슷하게 오늘날 한국에서 ‘영성(靈性)’이라는 말도 상황이나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영성을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령 영(靈)’과 ‘성품 성(性)’ 두 글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 영성은 지성(知性)이나 감성(感性)과 더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기능(faculty)의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성을 ‘사상’이나 ‘정신’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의 영성’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실제로는 그 내용은 마르틴 루터의 사상, 신념 등에 관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영성학의 분야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이현령비현령 같은 용어가 아니라 특정한 개념을 가진 단어입니다. 물론, 학자들마다 ‘영성’을 정의하는 표현은 다양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영어로 “lived experience of reality”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말로는 ‘실재(實在)에 대한 생생한 체험’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으므로,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생생한 체험(lived experience)’이란 독일어 ‘Erlebnis’를 번역한 말로서 다이빙 선수가 물속에 풍덩 빠졌다가 나오는 것처럼 짧지만, 그 체험 속에 들어가는 사람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하고 생생한 체험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리얼리티(reality)’, 곧 ‘실재’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객관적 대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산들바람이 불어와 자신의 뺨에 부딪히는 것을 느낀다면, 이때 그가 인식(경험)하는 대상은 산들바람입니다. 또는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때 인식의 대상은 갓난아기지요.

 

그런데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존재를 변화시키는 생생한 체험(lived experience)을 일으키는 대상은 일반적인 사물이나 현상이라기보다는 궁극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이 궁극적인 실재(the ultimate reality)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 체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현존(presence) 속으로 풍덩 빠지는 것과 같은 강력하고 생생한 체험이 영성학에서 말하는 기독교 영성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영성과 다른 종교 영성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원래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특수한 용어인데, 오늘날에는 일반명사가 되어서 다른 종교에서의 비일상적 체험을 뜻하기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영성’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spirituality’는 어원을 추적해보면 라틴어 ‘spiritualitas’에서 온 말로서,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사용한 ‘영(pneuma)’ 또는 ‘영적(pneunatikos)’이라는 표현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영성은 ‘영(spirit)’이 그 핵심에 있습니다.

 

이때 ‘영’은 먼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Holy Spirit)을 지칭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엡1:17 참조). 좀 더 정확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요14:16-17). 그래서 영성은 성령을 빼면 이른바 “앙꼬[팥소] 없는 찐빵”이 되고 맙니다.

 

또한 영성에서의 ‘영’은 인간의 ‘영’과도 관련됩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으로서의 인간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라고 했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만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게 되지요.

 

요약하면, 영성, 곧 하나님 체험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인식할 때 일어납니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은 나 자신의 외부에 있는 객관적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며, 또한 내가 성령 안에 있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말씀을 읽을 때, 기도할 때, 찬양할 때는 물론이고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바라보고 느낄 때, 그리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이와 같은 신비한 하나님 체험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하나님 체험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0-12).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서 수평적으로 동료 인간들과 서로 사랑하면, 수직적으로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긴 요한 사도도 그의 편지에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데, 이것을 인식하고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라고 말합니다(요일3:24).

 

이런 점에서 영성 생활(spiritual life)이란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 또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삶은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는 삶이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정수(精髓)입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영락교회 「만남」 545 (2019년 6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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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자존감인가?

기타/영성 관련글 2017. 7. 25. 09:04

왜 지금 자존감인가?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왔던 성민(가명)이를 기억한다. 그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업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 또한 또래의 왕따 문화에 피해자가 되어 고육지책으로 미국에 유학 오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성민이는 주눅 들어 있었다. 미국이란 낯선 곳에 처음 도착해서 그런지 몰라도, 성민이는 수줍음을 탔고, 말수도 적었고, 사교성도 없어서, 그 아이가 외톨이처럼 혼자 지내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목회자로서 영적 돌봄 사역의 차원에서 성민이의 적응과정을 오랜 기간 주의 깊게 지켜 보았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성민이가 무척 활발해지며, 밝아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교회 및 학교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며 중고등부 사역에 리더로서까지 섬기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1년여가 지난 후 성민이와 성공적인 적응과 변화의 비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대뜸 이 친구가 했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기선, 절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되더라구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오히려 개성을 존중해 주니까 맘이 편해지고, 그러다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그는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자신의 꿈을 준비해가는 자신만만한 청년이 되어 있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이민 목회 현장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청소년이 한국의 학교 문화에서는 주눅 들고 힘들어 했는데, 미국 학교에 출석하면서 말과 행동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변화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교육철학을 살펴보니, 미국 교육이 지향하는 핵심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되어 있었다. “너는 누구니?”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첫 번째 질문은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담아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도록 돕고, 자신이 타인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왔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와 문화에 영향을 받아왔는지를 인식하도록 도와 자신만의 꿈과 비전을 찾아가도록 안내한다. 두 번째는 주어진 문제와 상황 속에서 문제 해결 능력과 사고력을 기르며, 창의력을 배양시키는 질문으로 수업시간에 다양한 관점과 견해를 나누는 토론과 질문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 교육철학과 방법론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한국 유학생들의 얼굴에 여유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그들의 자신감과 여유는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존감은 한 인간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근간일 뿐 아니라, 인생의 비전과 소명을 찾고 실현해 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내적 가치이며 원동력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자존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지만,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닌, 사회적 동의와 관심이 무르익어가는 과정 속에 나타난 증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움 받을 용기’란 베스트셀러의 연속선상에 있는 심리학적 관심이며, 근성, 배짱, 맷집(grit)이란 자기계발 프레임의 확장된 형태로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자존감이란 프레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성숙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반가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자존감인가?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엄청난 정보의 양에 압도되면서, 요즘 사람들이 가지는 내면의 질문은 “남들은 직장도 갖고, 아이도 잘 기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지?”로 시작해서, 결국엔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이 길이 맞긴 맞을까?”로 귀결된다. 내 삶의 목적과 이유, 방향과 비전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 떠오를 때, 대답을 찾는 과정 중에 등장하는 본질적 가치와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자존감이란 인생의 엔진이다.


윤홍균 박사에 의하면, 자기효능감, 자기조절감, 자기안전감 등이 자존감의 바탕이 된다(“자존감 수업”).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신 스스로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는 정도와 능력을 자존감의 구성요소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념적으로는 자신감, 자만심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해야 할 일에 비해 내 능력이 월등하다 느끼면 자신감이 상승하지만, 내 능력에 비해 주어진 일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감이 떨어진다. 반면, 자만심은 내 능력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인해 주어진 과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에 대한 생각’이 자존감이라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대우를 받을 때 느끼는 상한 감정을 자존심이라 한다. 자존감은 경우에 따라 상하 곡선을 그릴 수 있지만, 자존심은 자존감이 바닥을 쳤을 때 주로 쓰는 표현이기에 감정적 자존감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것도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목표다. 이렇듯 건강한 자존감은 인간이 자신을 수용하는 방식이며,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방법이기에 정신 건강 향상과, 조화롭고 건강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다.  


자존감이 사회적인 열풍을 일으키며 담론화되는 이유에는 우리 한국인의 심리상태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대한 성찰이 존재한다. 한국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어 열등감은 가장 보편적이고 두드러진 현상이며 마음의 병들 중에 하나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이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건, 경제적 부를 누리는 사람이건,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을 더 혹독하게 대하거나, 자신의 열등감을 자녀나 배우자 혹은 주변인들에게 투사시켜 갈등과 문제를 증폭시키는 경우들을 상담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교회 내에서도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있으면, 주변인들이 불편해하거나 곤란에 처하게 되고, 공동체의 화합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왜 쉽게 열등감에 노출되며, 원치 않는 상처와 갈등, 관계문제를 재생산할까? 물론 한 인간의 비루한 성품, 혹은 온전하지 못한 인격성장을 거론하며,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축소시킬 수도 있지만,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감은 한국인들에게서 유독 정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에, 사회구조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열등감에 쉽게 공격당하고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동양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특징이 집단주의인데(최상진, “한국심리학”; 정수복,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집단 내에 다른 구성원들과의 비교의식이 한국인들의 열등감에 주요 원인으로 진단된다. 대표적인 현상으로, “엄친아,” “부친남 (부인 친구 남편)”이 있는데 특정하지 않은 선망의 대상, 혹은 부러움의 대상을 가상으로 상정해 두고, 그와 비교하여 자신의 아들이나 남편의 부족함을 한탄하고 자조하는 형태로 열등감을 생산해 낸다. 안타까운 사실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형태로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조장하거나, 가족의 자존심마저 해치는 상황을 한국인들은 유난히 많이 경험하고 있다. 존재의 특성을 계발하고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공동체 일원과 유사하거나 비슷해지는 것을 심리적 안정감으로 삼는 것이 집단주의의 심리적 특징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타인과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비교함으로써 자신과 가족들의 자존감을 뭉개고 열등감을 재생산하는 행위는 한국인들이 극복해야 할 잘못된 마음의 습관이다.  


둘째는 수치심을 자극하는 문화가 자존감을 낮추고 열등감을 고착시킨다. 유교문화권의 윤리는 마음 수양을 통해 개인의 양심을 고양시키는 데에 목표를 두며,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계도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옛적에 어린아이들이 밤새 오줌을 싸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동네를 돌며 소금을 받아오게 하는 풍습이 수치심의 자극을 통한 교육의 전통적 일례이다. 이 정신문화가 변질된 형태로 변형되어왔는데, 자율적 수치심이 아닌, 타율적 수치심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거나 욕보이는 악습이 형성되었고, 중고등학교와 직장 내에서 “왕따” 문화가 형성되면서, 수치심을 자극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열등감의 주요 원인으로 작동한다. 이 교육방법이 가족이나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관습적으로 활용이 되는데, 이웃과 군중 앞에서 개인을 훈계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의 정도가 심하게 되면 건강한 양심을 구비한 인간을 양성하기보다는, 권위주의적 리더에 복종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그로 인한 내면의 상처와 갈등관계를 재생산하게 된다. 이 방식은 특히 요즘 젊은이들에게 부작용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조언과 코치를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경쟁우위를 추구하는 세계관을 주입시키기보다는, 개인의 개성과 특별한 은사를 계발하여, 자신의 삶 안에서 소명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영적 돌봄 사역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환경에서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스스로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완벽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학교나 직장의 사회화 적응 과정 속에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요구받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 자살률과 청년의 우울증이 높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럴 경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거나, 관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인색하고 호되게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형성된다. 엄격한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책임감과 성실함에 과도한 초점을 맞춘 교육을 받다 보니, 자신을 사랑하거나, 자신을 존중하며 돌보는 방법을 습득하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훈육한다. 자존감이 향상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이런 열등감이 자신의 내면에만 작동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회생활에서 외연화가 되면, 가족, 친구, 직장, 및 교회 내에서 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양산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열등감이 위협적인 이유는 자신의 내면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 공동체 구성원에게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주변인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게 되는 심리적 이유를 잘 살펴보면, 시기와 질투가 열등감의 부정적, 파괴적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고, 이웃을 존중하지 못하고, 자식이나 타인의 개성과 차이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의 습관이나 성품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어린 시절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주요 원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열등감의 치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존감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할까? 낮은 자존감의 회복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무너진 자존심은 어떻게 치유를 시작해야 할까? 자존감의 시작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현재 나의 재산 가치, 직장 수입, 사회와 공동체 내의 지위나 영향력에 내 자존감의 뿌리를 둔다면, 바람 앞의 촛불과 같고, 사막에 핀 화려한 꽃과 같이 금방 사그라질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자존감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경쟁력 있는 능력이며 내적 가치라고 믿는다면,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 타인과 이웃이 아닌, 내게 소중한 가족, 부모님, 아내, 남편, 자식이 아닌, ‘나’ 자신이 내 자존감의 주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할 때,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영적 어른이나 멘토가 성공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주면 큰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물질의 풍요가 인생의 성공과 행복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현대사회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며, 각자의 인생이 추구할 수 있는 주관적 행복과 성공의 기준을 세워가도록 안내하는 것은 영적 스승과 멘토의 중요한 역할이라 할 것이다.


자존감의 출발이 자아로부터 시작된다면, 그 자아는 어떤 내면의 상태를 지향해야 할까? 자존감 향상의 궁극적 목표는 나의 일과 나의 소명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일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때, 근본적인 내적 원동력과 동기부여, 나아가 높은 자존감이 형상된다. 내가 행하는 과업이 내 인생의 존재이유와 결부되어 있다고 확신할 때, 자존감의 향상과 더불어 자신감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자존감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 거룩함과 존엄함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수용하는 영적 태도가 우리 크리스천의 궁극적인 자존감의 근원이다. 이 자의식 안에 우리의 자존감의 뿌리를 둘 수 있다. 더불어 내게 주신 소명, 오늘 내가 참여하고 있는 일, 혹은 직업은 내 인생의 존재 이유를 깨닫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자존감은 반석 위에 세워질 것이다. 영혼이 기도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이 어떠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저주하거나 불평하거나, 열등감을 조장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냉혹한 현실세계, 치열한 경쟁사회, 열등감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적으로 크리스천이 관심을 가져야 할 영적 가치는 영적 초연의 자세다. 우리의 자존감의 뿌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 영혼은 삶의 주도권과 자존감의 주인의식을 내려놓도록 요청받는다. 나의 자존감이 향상되었다고 우쭐되지 않으며, 자존심이 뭉개졌다고 내 삶의 목적과 이유를 부정하거나 저주하지 않는 영적 상태를 말한다. 사업이 큰 이익을 내었다고 해서 우쭐대지 않으며,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상실의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자식이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해서 자존심이 상할 필요도 없으며, 남편이 회사에서 승진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자존감의 근원될 수는 없다. 삶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여전히 나는 숭고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영적인 자유로움과 초연의 자세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우리 자존감의 첫 번째 토대이다.


두 번째 영적 가치는 욕망에 대한 영적분별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자세히 성찰하고 살펴보면, 그 안에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이 돈,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 물질에 쉽게 현혹되어 있다면,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자존감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 어렵다. 우리의 자존감의 근거를 욕망의 실현으로 상정한다며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금새 돈과 명예와 세상적 부요에서 만족하게 된다. 이제 영적 분별을 통해 우리의 욕망이 지향하는 방향을 바르게 고치거나 교정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사랑만으로 우리의 열망이 만족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라고 성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욕망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자존감은 든든하게 설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 초연과 욕망의 순화를 통해 우리의 자존감은 영적 토대 위에 세워지게 되며,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의 자존감은 자유와 해방,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구름위 햇살 이주형


(이 글은 기독교세계 2017년 6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posted by 구름위 햇살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기타/영성 관련글 2017. 5. 4. 15:11

기독영성가 읽기

C. S. 루이스 :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종태

그림자나라

《새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간디》(1982)의 감독자로 유명한 리차드 아텐보로(Richard Attenborough)의 1993년 작(作)으로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 받았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안소니 홉킨즈(Anthony Hopkins)와 데브라 윙거(Debra Winger)가 주연을 맡아 열연했는데, 어떤 비평가는 안소니 홉킨즈가 출연한 영화들 중 이 영화를 최고로 뽑기도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을 가르쳤던 C. S. 루이스와 미국 출신 작가 조이 그레샴(Joy Gresham)의 만남과 결혼과 사별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멜로드라마적 재미와 비극적 감동을 넘어 관객들을 삶과 사랑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종교적 물음으로 인도해주는 영화입니다.


C. S. 루이스(1898-1963)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만약 저서의 판매량과 인용횟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난 세기 영미권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저술가의 자리는 이 옥스브리지(Oxbridge) 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이견(異見)을 달 역사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계에서 루이스는 주로 《순전한 기독교》와 같은 기독교 변증서를 남긴 저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계 밖에서는 루이스는 판타지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서 더 유명합니다. 7권으로 구성된 이 연대기의 마지막 책인 《마지막 전투》는 아슬란의 창조물인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는데, 나니아의 종말을 보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루이스는 한 작중 인물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보렴. …그건 진짜 나니아가 아니란다. 그 나니아는 시작과 끝이 있었지. 그것은, 언제나 여기 이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진짜 나니아의 그림자나 사본에 불과해. 우리 세계인 영국과 다른 모든 나라가 아슬란이 계시는 진짜 세계의 그림자(shadow)나 사본(copy)인 것과 마찬가지이지. 루시, 나니아 일로 슬퍼하지 말아라. 옛 나니아에 있던 모든 귀중한 것들과 소중한 짐승들은 다 그 문을 통해 진짜 나니아로 들어왔으니까. 물론 다르기야 하지. 실물이 그림자와 다르고, 생시가 꿈과 다르듯이 말이다.”

루이스는 서구 기독교 신학과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히포의 주교 어거스틴(354-430)처럼 플라톤 철학을 창조적으로 이용해 복음적 세계관을 설파한 사상가요 영성가였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땅’, 즉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 영원한 진짜 세계의 사본이요 그림자입니다. 플라톤의 제자들은 스승의 철학을 이원론으로 발전(혹은 변질)시켰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초기교회 교부들(Church Fathers)은 이 땅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건 저 하늘에 있는 ‘진’ ‘선’ ‘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참 철학’인 기독교의 ‘말씀’의 신학과 영성으로 인도해주는 ‘몽학선생’(paidagogos)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교부들은, 또 어거스틴과 루이스는 하늘의 진선미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Logos)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바로 이 세상 모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흘러나오는 궁극적 원천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움

이런 식의 생각, 철학, 신학은 특유의 영성을 낳았는데, 바로 ‘하늘을 그리워하는’(eros) 영성입니다. 사람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 모든 ‘좋은’ 것들을 사랑하기 마련인데,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하늘’에 있는 실체(reality)의 ‘그림자’나 ‘사본’에 불과한 것들이기에, 이 땅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할수록 사람은--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하늘’을 동경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의 루이스의 공헌은 무엇보다, 여러 이유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희미해진 이런 영성을 현대인이 지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고 상상력을 통해 공명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해주었다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루이스는 이런 영성을 ‘(천국)소망’이라는 신학적 범주에 넣어 다음과 같이 설명/변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acutely)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국)소망’에 대한 루이스의 변증은 루이스 자신의 ‘실 체험’(lived experience)에 바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은 영적 회심기라 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루이스는 그가 “기쁨”(Joy)이라고 명명한 특별한 종류의 그리움에 대해 묘사하는데, 가슴을 벅차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아리게 만드는, 황홀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가져오는 그런 그리움이야말로 “내 인생 이야기의 주된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기독교로 회심한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집필한 책인 《순례자의 귀향》도 루이스의 “기쁨의 영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루이스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 존은 어느 날 어떤 “섬”을 흘낏 보게 되는데, “신처럼 지혜롭고 짐승처럼 자의식이 없는” 존재들이 거하는 그곳을 향한 가슴 아린 갈망에 존은 “흐느껴 울”게 됩니다. 《순례자의 귀향》은 자신을 울게 만든 그 “기쁨”을 추구하며 그 “거짓 대상들을 하나하나 밝히고 거짓임이 드러나면 단호히 내버리는” 길을 걸었던 루이스의 철학적 여정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가 지닌 고유한 풍취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루이스는 하나님(“동쪽 산” “지주님”)을 믿기 전에 “하늘/초월/궁극적 실재”(“섬”)를 추구했으며, 그의 신학과 영성은 그 “섬”이 실은 “동쪽 산”의 일부라는, 즉 하나님은 “하늘의 님”이시라는 발견과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늘” 이야기를 “wishful thinking”이라 하여 의심하고 조롱하는 서구 근대 시대정신의 눈치를 보는 서구 신학자들과 달리, 루이스는 “하늘” 이야기를 철학과 신학 담론의 중심에 끌어들여,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thoughtful wishing”이 어떻게 우리를 진리/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늘

루이스는 독창적인 신학사상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사상들은 다 교부들을 비롯하여, 보편적(catholic) 교회의 지적 영적 전통에 전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한 그리움’(Joy)에 대한 문학적 묘사와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그는 그 어떤 기독교 작가보다도 탁월했고 독창적이었습니다. 루이스는 천국/하늘/초월을 향한 인간의 ‘불멸의 그리움’을 자신의 내적 여정과 인간실존을 이해하게 하는 실마리로 보았고, 더 나아가 복음전도를 위한 일종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았습니다.


천국소망을 영성과 전도의 중심으로 삼았던 루이스는 ‘도피주의자’였을까요? 뜻밖의 답변으로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기를 즐겼던 루이스는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피(escape/탈출)에 대해 반대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간수임에 틀림없다.” 루이스에 따르면, 하늘/천국/초월에 대해 닫혀 있는(immanent frame)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이야말로 좁디좁은 감옥 안에 갇혀 지내는 수인(囚人)들입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고 또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그 삼위일체 댄스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죽음 너머 누리는 개인적 행복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천국을 희망하는 것은 실은 자기 건강을 돌보는 일이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일 같이 실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 되는 곳으로서, 천국 소망은 하나님 자신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르는 필연적 결론 같은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천국을 희망하고 누리기 위해선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누리고 싶어 하는 갈망’(appetite for God), 요즘 말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갈망, 소망은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역사를 읽어보면, 이 세상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었다고 루이스는 강조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이토록 무기력해진 것은 그들이 내세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천국도 잃고 이 세상도 잃어버릴 것이다....우리가 우리의 문명만을 주된 관심사로 삼을 때는 우리는 이 문명을 구원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문명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상’은 이 세상 너머의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갈망을 불온시합니다. 왜냐하면 이 갈망은 이 세상을 안으로부터 전복시키는 혁명적 힘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이의 마음에 ‘하늘을 향한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루이스의 글들은 분명 스크루테이프(루이스가 쓴 동명의 소설에 나오는 원로급 악마)의 불온서적 목록 상단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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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미국 GTU에서 영성학을 공부했다. 'C. S. 루이스의 경이의 영성'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한남대 등에 출강하며 서울여대 대학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C. S. 루이스 저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시편 사색》, 네가지 사랑》, 기적 등을 번역했다.



- <빛과 소금> 2017년 4월호



posted by 산처럼

헤르메스와 바울

기타/영성 관련글 2015. 8. 26. 14:47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사도행전 14:11-12)

 

바울과 바나바가 디모데의 고향이었던 루스드라에 갔다. 거기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고 바울은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서라."라고 말하며 그 사람을 걷게 했다. 헬레니즘 문화가 다스리던 그 고장에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한 일을 보고 그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 하였다. 그 고장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부르며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몇몇 주석에 보면 '일어나 걸으라.' 말한 것은 바울인데 왜 사람들이 바나바에게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했을까 질문하며 아마도 바울의 생김새가 신이라 하기에는 너무 못생겨 그랬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헤르메스 (Hermes).

성경을 읽다가 쉽게 넘겨버렸던 이름에 갑자기 눈이 멈추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언어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전령 역할을 했던 올림푸스 12신들 중의 하나이다. 고대에는 문자 뒤에는 신의 의미가 숨겨 있는데 이는 헤르메스와 같은 신적 도움 없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는 해석학(Hermeneutics)의 어원이 되었다.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던 루스드라 사람들. 아마도 사람의 말에는 기대 할 수 없는 신적인 능력이 바울을 통해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령, 설교자는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이기도 하지만 말씀의 능력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헤르메스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매주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고, 또 설교하는 내 눈 앞에 이 헤르메스라는 의미가 마치 사명처럼 다가온다.

 

소리벼리 정승구

 

 

 

posted by 소리벼리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3) : 삶을 하나로 묶기

기타/영성 관련글 2014. 10. 14. 13:45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3) 삶을 하나로 묶기



앞선 글에서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 삶을 하나로 묶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하나로 묶기  

    헨리 나우웬은 현대 신앙의 위기는 신앙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체험이 피상적이고 연속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되며 깊은 차원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려면침묵 기도로 형성된 내적인 고요 속에서 삶 그 자체를 주목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이렇게 삶 그 자체를 주목하면서때로는 깊은 기도 후때로는 간단한 성찰 후 삶에서 올라오는 느낌들을 간단히 기록해 놓습니다우리 삶이 깊은 일관성으로 빛을 발하는 때는 삶을 구성하시는 든든한 뒷배경이신 하나님 그분을 발견할 때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삶을 구성하는 큰 요소를 주목하면서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주목하는 시간을 가집니다단위는 한 달로 합니다삶의 각 영역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초점은 내면의 움직임이라고 일컫는 마음의 흐름마음의 반응을 의미합니다시시비비를 따지거나 행위의 선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음 항목 별로 한 달의 삶을 성찰해 봅니다. 

   

1. 영성 생활은 어떠했나?

a. 예배는 어땠는가?

    예배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 무엇인가예배를 통해 받은 은총은 무엇인가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가?

b. 기도는 어땠는가?

   얼마나 하고 있나그 횟수가 적절한가기도 분위기나 흐름이 어떤가크게 깨닫거나 응답받은 것이 있는가?

c. 영적독서는 어땠는가?

   성경이나 영적성장을 위해서 읽는 것들이것이 나에게 무슨 자극이 되는가 어떤 점에서 성장에 기여하는가새롭게 알아듣고 깨닫게 된 것이 있는가?


2. 몸은 어땠는가?

   몸에 대한 전반적인 상태수면식욕 등의 욕구질병 등의 영향.

   몸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는가?

   몸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는지 알게 된 점이 있는가?


3. 직장이나교회 사역 등 일은 어떠했나?

   일에 대해 드는 느낌은 어떠한가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가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가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는가?


4. 가족 관계는 어땠는가?

   주된 정서는 무엇인가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고하나님은 어떻게 임재하시며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는가?


5. 기타

a. 우리 사회정치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사건.

b. 친구 관계사적 모임 등.


이렇게 보면우리 삶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체라기보다는 경험적 사건들로 구성된 의미의 결합체라는 것이 다가옵니다그러면 이렇게 삶을 바라보면서 각각의 경험을 하나로 묶고 꿰는 기도를 해 봅니다.


첫째기도 준비를 합니다.

둘째삶의 사건 항목들을 머리 속에 천천히 떠올리며 기억합니다.

셋째하나님께 청합니다. '이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제게 나타내 보이신 삶의 신비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혹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당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길.'

넷째각 항목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도 하고전체적으로 떠올리기도 하면서 삶을 주목합니다그 사이에서 올라오는 느낌들기운들통찰들에 머물면서하나님과 교제합니다마음이 깊어지는 부분에 충분히 머물러 봅니다.

다섯째기도 알람이 끝나면한 달의 삶에 대해 감사합니다다음 달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주님께 자발적으로 대화합니다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여섯째물론 기도반추를 합니다.


침묵 기도를 일상 속에서 먼저 실천하고 계신 분들의 조언

 (1) 기도의 삶을 구조화하세요. 통성으로 주제를 외치는 기도보다 침묵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특히 이것을 원하고 이것이 기도를 바르게 하고 있다는 것에 깊게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기도가 밀려나게 되면나중에는 자포자기 된답니다기도를 제일 중요한 자리에 놓고또 언제든지 다시 시작하세요영 놓아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하려고 했더니만하나님께서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들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2) 혼자하지 말고 함께 하세요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혼자 집에서 하다말다 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다고 합니다매 주에 한 번씩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기도를 나누고한 주간 함께 기도할 본문들을 공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3)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이렇게 몇 주간에 걸친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나피정을 받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특히 기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고, 기도 방법을 배우는 데는 집중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하나님의 사랑을 깊은 차원에서 경험하기 위해 일상에서 벗어나 침묵과 고독’ 속에 머물면서 기도하는 피정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항해 이후

배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어떻게 될까요우리는 그 배에서 내릴 것입니다그렇다고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이것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입니다우리 육신의 삶이 마치는 날우리는 몸이라는 우리 배를 벗지만그렇다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의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우리에게 그 사랑을 확장하고 팽창해 나가면서우리를 무한히 성장시켜 나갑니다사랑의 각성은 죽고 나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한때면 끝나는 우리 삶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어나기 위해 나고 자라고 늙고 병들며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고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일상 중에 침묵 기도를 실천하시려는 분들은 눈을 좀 더 멀리 두십시오배가 도착하는 항구 그 이후까지 눈을 멀리 두십시오그 너머까지가 명백히 자각이 된다면결코 포기할 수도 없고게으를 수도 없으며그렇다고 조바심내거나 안달내지도 않게 됩니다그저 고요히 오늘의 항해를 할 뿐입니다오늘이라는 날하나님을 오늘만큼 알고 오늘 만큼 사랑하고 오늘만큼 함께 했으니오늘 배부를 것입니다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기면 됩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2) : 매일의 기도

기타/영성 관련글 2014. 10. 12. 13:36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2) 매일 기도



앞선 글에서는 우리의 삶은 배가 항구를 떠나 하나님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항해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5-10분 정도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시기를 권해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언제 : 삶의 리듬과 갈망

    매일 아침,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면서 기도를 언제어디서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인도함을 받습니다자기 나름의 시간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을 해야만 한다고 강압하고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나 자기혐오에 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차라리 자기 스스로 얼마나 원하는지를 더욱 기억하십시오원하는 것에 솔직하십시오그리고 몸하루 일정마음 상태 등을 봐가면서오늘 하루의 삶에서 언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최선인가를성령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우리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리듬이 있기 때문에자기에게 적합한 시간은 일상에서 곧 정해집니다기도 자리가 정해지지 않는 것은 원하는 힘을 덜 믿기 때문입니다기억하십시오우리가 원하는 것보다성령께서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원한다는 것을 강하게 믿어보세요믿음이 없으면하나님께 청해보세요.


2. 어떻게 : 침묵과 고독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환경이 침묵과 고독입니다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인간이 그 멀리 계신 하나님께 열심히 노력해서 도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이것은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이 나를 추구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과 일치는 분리된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이미 너무나 하나여서 분리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자각하는 것입니다이것은 깊은 고요내적인 침묵이 형성되면 그저 저절로 발견됩니다세상의 온갖 자극에 너무 시달린 감각으로 이런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침묵기도가 일상 속에 잘 녹아내리지 않는 이유는 개별적 차원의 기도 숙달에 있지 않습니다그것은 보다 더 큰 환경인 침묵과 물러남의 가치에 얼마나 눈을 뜨느냐에 있습니다침묵하는 까닭은 하나님께만 말하기 위함이고물러나는 까닭은 하나님하고만 머물고 싶다는 갈망의 형식적 표현입니다그러니 혼자 있는 시·공간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침묵 속에서 혼자 조용히 머물러 보십시오사방이 하나님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곧 느껴지실 것입니다아주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3. 무엇을?

    하나님을 추구하고하나님과 사랑 속에 머물고 싶어지려면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일단 하나님 그분 자체가 함께 머물기에 참 좋아야 합니다만일 하나님 앞에 고요히 머무는데우리가 그 하나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두렵다면 어떨까요하나님과의 관계가 권위적 관계로 경색되어 있어서자발적으로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분으로 느껴진다면 어떨까요혹은 하나님께 속마음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하거나아무리 기도해도 꿈적도 않는 경험이 반복되어 있으면 어떨까요혹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은 무조건적으로 응답하셔야만 하는, 곧 우리 비위를 맞춰주는 하나님으로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a. 성경

    이 모든 예는 온전하신 하나님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신비이시고 전부이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입니다이런 경우는 자기-경험의 세계 안에 하나님을 가둬두고 있는 것이고하나님을 오해한즉 자기-결핍을 투사한 하나님의 왜곡된 이미지를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왜곡하여 이해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 방식대로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이해해야 합니다그래서 침묵기도의 기본 자료는 언제나 성육하신 말씀이신 성경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복음서로 기도하는 것이 중심입니다말씀을 통해 자기-세계자기-이해를 벗어날 때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각성될수록항해에 대해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b. 그 자체

    자, 그런데 오늘의 항해일지에는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요한 사건이슈선택 문제 등을 놓고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그러면삶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머물면서 기도합니다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사건에서 마음이 불편한 경우죄책감이 느껴지거나 하는 경우도 좋습니다구체적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사안들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이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① 첫째, 묵상기도나 복음관상 때처럼 기도 준비를 합니다.


② 둘째, 기도할 내용을 요점으로 만듭니다

예) ○○와의 관계에서 불안하고 화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새롭게 볼 수 있을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무엇을 교훈하셨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


③ 셋째,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천천히 기도를 시작합니다


④ 넷째, 기도할 요점을 마음에 깊게 품으면서떠올려야 할 것들은 기억으로 떠올리면서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집중합니다감정이나 마음을 인지하면서하나님께서 요점으로 잡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집중합니다.


⑤ 다섯째, 처음에는 분심(산만한 마음)이 많고 어려울 것 같지만묵상기도가 익숙한 사람들은 삶으로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삶 자체로 기도하면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른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이것은 삶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삶을 묶어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⑥ 여섯째, 정해진 기도시간(40~60)이 다하면 기도를 마칩니다기도를 통해 은총을 받았 다면자연스럽게 찬미와 감사로 이어집니다그렇지 않았다면기도는 좀 더 반복을 해야 합니다.


⑦ 일곱째, 이 기도도 기도반추를 합니다.


c. 마음그 자체.

    몸이 아플 때나지쳤을 때진짜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또 마음이 힘들어묵상이나 생각 자체가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이 필요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이럴 때 진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무시면 됩니다.


① 첫째, 기도를 준비합니다시간자세장소 등.


② 둘째, 기도 요점을 확인합니다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몸마음을 품어 준다." 이때 성경 구절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③ 셋째,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들어, "몸이 쉼을 얻고 새 힘을 얻게 하소서마음의 상처를 위로하소서."


④ 넷째,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찬 마음으로 몸이나 마음을 품습니다분심은 흘리고다시 집중합니다.


⑤ 다섯째, 타이머가 울리면자발적인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⑥ 여섯째, 기도를 반추하여적습니다.


d. 중보 기도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살펴가면서혹은 삶 자체로 기도해 나가기 때문에 점차로 간구하는 것들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특히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우리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탄식과 한숨이 나오는 것들, 막막한 것들이 있습니다이때는 진정으로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① 첫째, 기도를 준비합니다.


② 둘째, 기도 요점을 확인합니다한 시간 동안 기도 속에 머물 내용주제입니다.예를 들어, "에볼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아프리카를 보살펴 주십시오바이러스가 안정화되고치료약이 개발되게 해 주십시오."


③ 셋째, 성령께 도움을 구하면서하나님께 청하는 기도를 시작합니다하나님의 임재의 현존을 자각합니다하나님께 기도요점에 대한 갈망과 안타까움 등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마음에 현존하신 하나님을 향해기도할 주제를 모읍니다간간히 침묵 중에 말로 드리기도 하지만더 중요한 것은 기도할 주제에 대한 마음의식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모아드리는 것입니다.


④ 넷째, 타이머가 울리면자발적인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⑤ 다섯째기도를 반추하여적습니다.



여기까지 매일의 기도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기도와 삶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 기도와 항해

기타/영성 관련글 2014. 10. 10. 07:19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기도와 항해


, 항해

    우리 삶은 한 척의 배가 이쪽 항구에서 떠나 저쪽 항구로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배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도착해서 닻을 내려야할 항구가 있고, 그 항구를 향해 방향을 조정하면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릅니다. 우리 인생, 삶이라는 이 배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목적지,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장 1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배가 도착해야 할 궁극적 항구는 하나님그분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이 배는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있습니다. ,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여러 가지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 기독교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기도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일치는 내적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심리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 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지, 하고 싶은 것이 같아졌다는 것이며, 더 이상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인간 안에 불타오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상징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바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세상,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 체계, 사고-생각 체계, 감각 체계, 삶의 방식과 하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마음에 담으면서,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배를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등 어떤 것이 마음에 담기는 지요?


항해의 분위기

    그러면 이 배의 이름과 그 규모는 어떠할까요? 이것은 이 배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예수님의 세례 체험에 나타납니다. 그 내용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자기-정체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에 가득 찬 기쁨이 하늘에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항구히 흔들림 없이 완전히 고착되어 있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가득한 기쁨을 받고 있는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지입니다.

    비록 이 배가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흔들릴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흔들어 대는 여러 환경적 요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니까요.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흔들리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전부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부분입니다. 항해의 더 큰 국면은 이 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항로를 따라 의연하게 운항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배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따라서 우리는 삶이 흔들릴 때, 이 배의 궁극적 정체성을 거듭하여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 청하면서,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이 바로 하늘이고, 그 하늘사이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정체성을 일깨우는 소리는 우리 삶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각성시킵니다.


항해, 선택인가?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쪽 항구에서 닻이 올라간 것 자체가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알건 모르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의 배는 이미 이쪽 항구를 떠나 저쪽 항구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항로에 자연스럽게 몸을, 마음을, 삶을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닻을 자발적으로 걷어 올려 운항준비만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넓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면서, 본인의 갈망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단순한 기도로 하나님께 간절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 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합니다. 5분, 10분 정도, 그렇게 조용히 마음의 방향을 잡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원한다.”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청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 다음 번에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posted by 비회원

방법 없는 사랑

기타/영성 관련글 2014. 5. 23. 08:16

사랑의 방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방법은 나를 구현하는 도구다. 그러나 방법이 고착되면 나는 도구에 묶여버린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서로 사랑해서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경우를 나 자신뿐아니라 많은 이들에게서 본다. 방법을 가지지 않은, 아니 항상 새로운 방법을 가지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만물보다 먼저 계신 성자 하나님은 사랑의 방법을 찾다 찾다 성육신을 통해 나사렛 예수가 되셨고, 나사렛 예수는 사람들의 편견 속에 새로운 사랑의 방법으로 십자가의 예수가 되셨으며, 무력한 예수는 새로운 사랑의 방법으로 부활의 주가 되셨고 부활의 주는 늘 함께하는 사랑을 위해 승천의 주가 되셨다. / 유재경



posted by 진정한 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