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
블루(Blue)와 부재(不在)
“코로나 블루(corona blue)”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19 대유행으로 인해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바로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사람들과의 단절감은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단절감이 신앙인들까지도 우울감 속에 욱여넣고 있다. 아무리 어둡고 어려운 시대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날마다 경험한다면, 잘 살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 전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주요한 장은 집회였다. 주일은 물론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매일 새벽 교회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회와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때를 따라 열리는 사경회, 부흥회, 수련회 등의 집회를 통해서 더욱 집중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집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주일예배도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해 우울감과 무력감을 호소하고 있다. 참으로 어둡고 메마른 시대다. 그러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성경이다.
갈멜에서 호렙으로
열왕기상 18장에는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대결하여 승리한 유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멜 산 꼭대기에서 일종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 집회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다(왕상 18:24, 37-39). 또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삼년 동안의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렸고,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아합의 병거를 앞질러서 달려갔다. 곧, 엘리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명백하게 보이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집회 후에 이세벨이 격노하여 “내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왕상 19:2)고 엘리야를 협박하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갔다. 그는 이세벨에게 잡히지는 않았지만, 두려움과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던 그를 호렙 산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그런데 호렙 산에서의 하나님은 갈멜 산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셨다. 갈멜에서 하나님은 기적으로, 불로 응답하셨다. 그러나 호렙에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과 같이 명백하게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방법이 아니라 눈에도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는 침묵 가운데 엘리야에게 나타나셨다. 한글개역개정에서 “세미한 소리”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부드러운 고요(정적)의 소리”(דְּמָמָ֥ה דַקָּֽה ק֖וֹל / 콜 드마마아 다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영어성경 NRSV에서는 이 부분을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라고 번역한다(왕상 19:12).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원래 정적, 고요, 침묵이란 소리가 없는 것인데, 순전한 침묵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다.
장애물을 넘어서서
이처럼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놀라운 현상으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에게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는 대중 집회가 어려운 이때에, 홀로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2018)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우리의 모래시계 같은 인생에 성령께서 숨을 불어넣으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하시도록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이 삶을 교회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독교 유산이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로 변해 가면서 갈수록 더 피상적이 되고 있습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복 있는 사람, 2018), 151.
“얕고, 시시하고, 시끄럽고, 겉만 화려한 종교적 이야기.” 비록 유진 피터슨은 북미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개신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듣고 기다리는 삶”, “주의하고 흠모하는 삶”,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삶”, “시간과 공간을 비워 놓는 삶.” 이것은 새로운 삶의 형태, 또는 새로운 영성훈련 방법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사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삶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공생애 중에도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던 삶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고독과 침묵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이라고 하면,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말에서 ‘고독(孤獨)’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solitude’(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를 구분한다. 먼저 solitude는 혼자 있는 상태인데, 특히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loneliness’는 홀로 있어 친구나 말을 나눌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행감을 의미한다. Collins Cobuild Advanced Learner’s English Dictionary, s.v.v. “solitude,” “loneliness.”
흔히 영성생활에서 강조되는 고독은 loneliness, 곧 외로움이 아니라 solitude다.
참된 고독과 침묵이란
그렇다면 영성훈련으로서의 고독과 침묵은 무엇일까?
1. 먼저 고독은 대중 속으로의 도피를 중지하고 자신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어두움이 존재한다. 죄나 상처, 두려움이나 불안, 근심이나 걱정 등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 어두운 감정들과 생각들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들을 잊기 위해 대중 속으로 도피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즐긴다. 그러나 그렇게 피한다고 해서 내면의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어 우리의 존재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고독은 그러한 도피를 중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 혼자서는 그러한 어두움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할지도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2. 또한 고독은 부적절한 집착으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갈망하는 존재들이다. 산다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많은 활동들로 채운다.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성취감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만족감을 위해 더 맛있는 것을 찾아서 먹고, 더 좋은 옷이나 물건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갈망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고독이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 물질, 쾌락 등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부적절한 집착들로부터 물러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 354-430)가 《고백록》에서 말했듯이 우리 영혼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다음으로 침묵은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고 가르치셨다. 당시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기술이었다. 신을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술이 바로 제의와 결합된 기도였다. 그들에게서 기도는 신을 조종하는 ‘마법의 언어’ 또는 ‘주문’(呪文)이었으며, 이교의 제사장은 그러한 언어를 숙지한 ‘기술자’였다.
비슷하게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려고’ 마법과 같은 기도를 쏟아낸다. 어떤 이들은 유창한 말로 기도하는 것, 또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이 기도를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는 방언이 하나님의 신비에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신성한 기도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말보다 깊은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언어로 기도할 때에 그 언어가 하나님의 가슴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김현승의 유명한 시, 〈가을의 기도〉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면, 무성한 “낙엽들”과 같은 말들이 떨어지고 침묵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겸허한 모국어”, 곧 가장 진실된 언어를 채우신다.
4. 나아가 침묵은 언어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공간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는 말처럼 언어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엄밀히 말해서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어 말로 기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비공개의 방, 즉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그에 의하면 언어화된 ‘말’은 내면에 있는 생각과 감정 등을 표현하는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는 언어화되기 이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원초적 언어(primary speech)로서의 기도를 침묵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침묵은 불완전한 언어를 버리고, 언어를 초월하여, 깊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거룩한 공간이다.
종합하면 고독과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고 내적 자아가 깨어나는 성소다.
고독, 공동체, 사역
20세기의 영성가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된 고독은 인격체(person)의 집”이라고 했다. (Thomas Merton, New Seeds of Contemplation (New Directions, 1962), 53.) 여기서 인격체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내적 자아, 곧 ‘참 자아’(true self)를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거짓 자아, 곧 가면을 쓰거나 왜곡된 자아의 정체가 폭로되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의 참 자아가 깨어나는 집과 같은 곳이 바로 참된 고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참된 고독은 고립과 반대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깨어난 참 자아들은 서로를 찾아 공동체(community)를 이루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J.M. Nouwen: 1932-1996)도 “고독과 고독이 만나면 공동체를 이룬다. 놀랍게도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 가족의 일원이며 … 다 상관되고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두란노, 2007), 150.)
그러나 공동체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정반대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집단(collectivity)이다. 머튼에 의하면 집단은 개인들(individuals), 곧 거짓 자아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들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가면을 쓴 채, 오직 집단에 순응하여, 집단의 목소리를 낸다. 거짓 고독은 이러한 개인들의 도피처다. 그저 사람이 싫어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거짓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 고독 속에서는 참된 자아가 깨어날 수 없고, 개인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공모자들이다. 모일 수 있을 때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요즘처럼 모이지 못할 때는 개인으로, 여전히 거짓 자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거짓 자아의 가면 속에서 그 영혼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질식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지금, 참된 고독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만큼이나 매우 절실하게 요청된다.
그렇게 개인들이 인격체들 변화될 때에야 우리의 교회도 참다운 공동체로 새로워질 수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런 ‘공동체’와 ‘집단’의 중간 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교회일수록 ‘공동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일수록 ‘집단’에 더 가까울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인격체’에 더 가깝고,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수록 ‘개인’에 더 가깝다. 그러한 ‘개인’은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껍데기뿐인 그리스도인이며, ‘개인들’이 경영하는 교회는 ‘이익집단’이나, 잘 해 봐야 사적 ‘종교 집단’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서 이루어진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나아간다. 생색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이타심으로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섬긴다. 그리고 그 사역이 마친 후에는 다시 예수님께서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고독의 자리로 물러간다(눅 3:15-16). 마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고독과 공동체와 사역이 어우러져서, 온전한 영성생활이 이루어지게 된다.
고독과 침묵으로의 초대
그러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고독과 침묵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1. 매일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자. 오늘날은 원하지 않지만 혼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비자발적인 고독을 자발적인 고독으로 바꾸어보자. “나와 함께 거하자.”는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현존 가운데로 나아가자. 우리가 “주님, 이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할 때, 주님은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요 1:38-39). 주님이 계신 곳, 고독과 침묵 속으로 매일 나아가자. 처음에는 5분도 좋다. 처음부터 욕심내기보다 짧은 시간부터 시작해서 점점 시간을 늘려 가면 된다. 타이머로 시간을 설정해 두고, 그 시간만큼은 침묵 속에 앉아 있자.
2.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고 그분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한다. 참된 고독은 나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전 3:16). 그러한 진리를 그저 지식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주님께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그 지식을 현실화 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는 가운데, 마음속을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이 떠오르면, 가볍게 주님께 말씀 드리고 흘려보낸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고 가만히 침묵 속에 앉아 있으라. 거짓 자아의 그 비밀스러운 정체가 폭로되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이다. 그러나 거짓 자아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한다.
3. 침묵 시간이 좀 더 늘어나면, 침묵 가운데 거룩한 읽기, 영적 일기 쓰기, 성찰의 기도 등을 하는 것도 좋다. 단순히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귐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독교 영성 전통은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 해왔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각자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훈련을 찾아서 실천해 보라. 그런데 그러한 활동들도 몇 분간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고독을 함께 나눌 동반자 그룹과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이자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보호자다. 이러한 동반자 그룹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자신의 고독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오늘날처럼 그것이 어려울 때는 온라인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적절한 어플리케이션이나 프로그램들을 활용하여 영상과 음성으로 또는 음성만으로도 그룹 모임을 가질 수 있다.
5. 고독을 인도하고 안내할 영적 지도자를 찾는다. 여행에도 여행가이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이, 하나님께로 가는 영적 여정에도 영적 안내자가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영적 생활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영성지도자를 찾으라.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 지도자지만, 자신도 역시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한 영혼이다. 성도들이 영적 갈망을 가지고 찾아 왔을 때에, 그저 “말씀을 읽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으로 안내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스스로 영성에 대한 공부와 훈련에 좀 더 시간과 열심을 내어야 한다.
6.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매일의 짧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 외에도 한 달에 하루 ‘고독의 날’(a day of solitude)을 가지고, 일 년에 며칠 온전히 고독과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연례 리트릿’ 또는 ‘기도 주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고 할 일이 많은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그러한 시간을 가진다면, 영적 여정에 매우 많은 유익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기적인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목회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제목 “코로나19 시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까?”라는 질문에는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왜 이러한 질병과 악을 방치하시는가?”라는 신정론(theodicy)적인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의문과 씨름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회 포비아(church-phobia)”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심한 경우에 목사와 교인들은 진리와 생명의 전달자가 아니라 거짓과 바이러스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들’(christs)이 됨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과 침묵 가운데 ‘개인’이 죽고 ‘인격체’로 다시 살아날 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성육신’하실 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고(고후 3:3),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고후 2:15).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집단’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거듭날 때 교회가 다시 “그리스도의 몸”(엡 4:12)으로서의 존엄과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야 세상 사람들도 교회를 보며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시다!”라며 탄성을 터트리게 되지 않을까?(말 3:12).
권혁일. 「목회와신학」(통권379호, 2021년 1월)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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