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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고독

영락수련원

우리가 사는 세상은 크고 작은 소음들과 현란한 불빛들로 가득합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공사장 소음, 한밤중에도 끊이지 않는 자동차의 소리,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소리, 구급차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 길거리와 쇼핑몰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사무실에서 들리는 복사기 소리, 컴퓨터 자판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이웃집에서 들리는 층간 소음, 집안의 TV, 청소기, 에어컨, 공기청정기, 헤어드라이어 등의 생활 소음 등이 우리가 사는 거의 모든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소음들 외에도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처리해야 할 수많은 잡다한 일들은 마치 소음과 같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어지럽힙니다. 


그리고 휴대전화나 이메일로는 아무리 번호나 주소를 차단해도 각종 스팸 메시지와 광고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길거리를 나서면 곳곳에 붙어 있는 간판들과 광고물들, 그리고 불빛들은 저마다 우리의 시선을 단 1초라도 더 붙잡아 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밤에도 건물에 달린 대형 광고판이나 간판의 네온사인은 꺼지지 않으며, 심지어 거리의 가로등과 건물의 불빛들은 창을 통해 방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현대인들의 숙면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뉴스와 감각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마주 앉아 있거나 혼자 길을 걷는 시간은 물론 틈틈이 생기는 삶의 여백과 침실까지도 침투합니다. 


이러한 현실의 소음은 우리의 귀를 먹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우리의 내면의 소리에, 형제자매들의 진실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현란한 도시의 불빛들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여 모든 것 안에서 빛나시는 주님을, 그리고 나의 참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인 형제자매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도시 생활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어두운 방 속에 놓인 화분 속의 식물처럼 점점 시들어 가기가 쉽습니다. 

 

포이메네스 영성수련은 침묵 수련입니다. 침묵 가운데, 성서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하루 세 번의 기도회가 포이메네스 영성수련의 가장 기본이 되는 뼈대입니다. 그리고 기도회 시간만이 아니라 나머지의 시간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기도의 연속으로 이어가기 위해서 침묵을 유지합니다. 


처음에는 침묵이 불편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한 내면을 어지럽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침묵을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두고 온 가족과 교회와 할 일들과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이 불청객처럼 불쑥불쑥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모두 잠시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주님께 귀기울인다면 점점 침묵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물을 준 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내어놓은 화분처럼 나의 시든 영혼이 다시 생기를 찾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과 고독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 가운데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성 훈련 방법이자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이 아니라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 NRSV)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1-12). 다윗은 종종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렸으며(시편 62:1), 선지자 예레미야도 고난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말없이 가만히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권면하였습니다(애 3:25-28). 예수님께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쁜 공생애 중에도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고독 가운데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사막으로 나아가 침묵과 고독 속에 하나님을 추구한 수도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뒤를 이어 많은 이들이 침묵과 고독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우리말에서 “고독”(孤獨)이라는 말에는 다른 이들과 떨어져 외롭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독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영어에서의 “고독”(solitude)은 혼자 있지만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를 말합니다. 참된 고독(solitude) 속에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참된 고독은 우리를 하나님의 고독으로 이끌어주며, 그곳에서 아버지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바라보게 합니다(출 33:11).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세상의 화려한 것들로부터 눈을 돌릴 때, 비로소 내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독은 아버지 하나님과 만나는 은밀한 골방(마 6:6)입니다. 우리는 고독이 주는 깊은 평화 속에서 세상이 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이 즐거운 하나님과 친교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Thomas, a Kempis: 1380-1471)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경건한 영혼은 유익을 입으며 자라나고 성경의 숨겨진 진리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매일 밤 자신에 대한 회개로 눈물로 홍수를 이루고 자기 자신을 닦고 정화시키는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세상적인 시끄러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침묵은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의 언어가 탄생하는 자궁입니다. 물론 침묵 가운데 기도할 때 실은 그 침묵 속에서 많은 말과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침묵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잡념 또는 분심(分心)과 싸우다가 지쳐서 침묵기도는 나와 맞지 않는다며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분심이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은 어지러운 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기도 중에 다른 생각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생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생각들과 연결된 감정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생각들에 매몰되지는 말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간단히 말씀드리고 흘려보낸(letting go) 뒤 다시 앞서 샛길로 빠진 지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정화되고 침묵 속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기도의 언어로 서서히 채워집니다. 언어의 옷을 입기 이전에 마음에 존재하는 기도인 “원초적인 언어”(primary speech)가 제대로 목소리를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가 매우 깊은 단계에 이르게 되면, 그 기도의 말이 다름 아닌 말씀(logos)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침묵은 인간의 언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이 만나는 공간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와의 대화에서 언어는 단지 상징일 뿐이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침묵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교사》).

 

오늘날 자기주장이 넘쳐나고 집단적인 행동을 선으로 간주하는 이 사회에서 침묵과 고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반사회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영성 생활을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침묵과 고독은 반드시 필요한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영성 생활의 토양(soil)이며, 침묵은 영성 생활의 공기(atmosphere)이기 때문입니다. 소란하고 번잡한 세속 생활 속에서 시들지 않고 영적 생명력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우리 삶에는 반드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포이메네스 영성수련은 며칠이나마 이러한 필수적이고 풍요로운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침묵과 침묵 사이에 있는 ‘나눔’과 ‘벗들의 모임’은 목회자로서 언제나 말하고 가르치는 일에 익숙해진 우리가 서로의 진실한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홀로 침묵 가운데 기도하고, 예배하며, 또한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유진 피터슨이 말한 “침묵으로 친구를 사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대한기독교서회, 151.). 이러한 풍요로운 침묵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이글은 필자가 포이메네스 영성수련 교재》(2022 여름)에 쓴 글을 옮겨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