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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생활/시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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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 흐르는 강 자신의 몸매지나왔던 길꼭 가보고 싶은 곳 집착않으니끊임없이 흐른다 고이지 않고 순간순간 흘러마침내 바다에 이른다자유다 오래된 오늘 임택동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그립다 여름엔 낙동강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집에서 좀 떨어진 어가골이란 곳에 가면어린 내가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물이 제법 있었다 젖가슴 높이 보다 더 깊은 물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가슴에 안은 채나는 그곳을 두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얕은 곳을 흐르다 깊어진 곳에 다다른 물은소용돌이치며 보조개를 씨익 머금은 채 조용히 웃음을 건네 오곤 하였다 깊어진 가슴 때문에 언제나 소용돌이가 있고또 소용돌이 때문에 깊어진 가슴들이 있다세차게 휘돌아 가슴을 뒤집어 놓는 싱긋, 깊어진 웃음하나 건네 줄 수 있는강물 같은 사람이 그립다. 오래된 오늘 임택동
나무 나무 힘 잃어가는 해를 산등성이가 겨우 떠받치고 있을 무렵뻗은 자신의 몸으로 그늘을 잔뜩 걸치고 있는 나무. 볕은 제법 따갑고 풀들은 성급한 봄단장을 했지만 아직 겨울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나무는 고독하다. 얕게 뿌리를 내린 것들은 작은 바람에도 안달하며 들떠 있지만깊은 나무는 자기 때를 알고 가만히 서있다. 지난 해 가뭄이 극심했을 무렵 지금 짙푸른 풀들은 흔적조차 없었다.하지만 나무는 푸른 잎을 피우고 지친 걸음을 내딛던 이들에게 그늘을 주었다. 오래된 오늘 임 택 동
가을이 들어선 날 가을이 들어선 날 이번 가을은 예의를 갖추었다.한 걸음씩 조심스레 다가와얼굴을 붉히고 있다. 모든 변화와 변신에는 갑작스러움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조심스러움이 아름답다. 하루 아침에 다 바뀌었다고하루 아침에 다 바뀔거라고입에 침을 튀기며 말하는 이들이여거짓을 삼가고이 가을 앞에 침묵하라. 신앙은 기쁜 긴장감을 둘러메고 청정한 걸음걸이로 쉼 없이 걸어가는 길이거늘... 오래된 오늘 임 택 동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_ 김준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_ 김준태 1980년 7월31일 저물어가는 오후 5시 동녘 하늘 뭉게구름 위에 그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이 앉아 계시는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몸이 아파 술을 먹지 못하고 대신 콜라로나 목을 축이면서 나는 정말 하느님을 보았다 나는 정말 하느님을 느꼈다 1980년 7월 31일 오후 5시 뭉게구름 위에 앉아 계시는 내게 충만되어 오신 하느님을 나는 광주의 신안동에서 보았다 그런 뒤로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고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좋아졌다 내 몸뚱이가 능금처럼 붉어지고 사람들이 이쁘고 환장하게 좋았다 이 숨길 수 없는 환희의 순간 세상 사람들 누구나를 보듬고 첫날밤처럼 씩씩거려 주고 싶어졌다 아아 나는 절망하지 않으련다 아아 나는 미워하거나 울어버리거나 넋마저 놓고 헤..
주현절 Epiphany - the blessing of the waters 성수(聖水)에 파리가 빠지면 성수가 더렵혀진다고 생각하는 건불신앙이다. 성수에 파리가 빠지면파리가 성화(聖化)된다. 거룩한 파리가 된다. 그 물에 빠지면모든 것이 거룩해진다. 만물이 성물(聖物)이 되며만인이 성도(聖徒)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요단 강, 죽음의 강 물에 당신의 몸을 담그셨기에이제 세상에 거룩하지 않은 물은 없다. 성수는 도도히 흘러하느님의 집에서는 세례수가 되고 사람의 집에서는세숫물이 된다. 그 물로 깨끗이 씻어환히 빛나는 얼굴. 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다. 하느님의 얼굴 같은사람의 얼굴. / 이종태
마땅한 삶 (안토니우스) 마땅한 삶 불의와 불법 몸과 가슴이 짓밟힌 이들의 신음소리가 5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예수의 발자취를 따르겠노라고옛 집을 떠나 온 사람들 소낙비로 전신을 노크하는 하늘소리에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막 수도승이었던안토니우스,예수의 삶을 옹골차게 살아내었구나. / 오래된 오늘 (임택동) 그(안토니우스)는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얼마나 열심히 도와줬던지 마치 그가 제 삼자가 아닌 피해 당사자쪽인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안토니우스의 생애》, ch 87
꽃, 비, 그리고 사순절 꽃, 비, 그리고 사순절 누구하나 눈길 주지 않는 외로움아무도 손 내밀어 덜어주지 않는 아픔이 있다.그럼에도 길가의 풀들이 꽃망울을 머금었다. 온 밤을 가슴 졸이며한 줌의 소망조차 흩어지는 암울함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는 이른 새벽 절박함그럼에도 해쓱해진 얼굴을 들고 묵묵히 걸어갈 길이 있다.피워 올려야 하는 꽃이 있다.숨(Ruach)을 들이키며 내뱉는 살아있는 사람(Adam)의 마땅한 길과 꽃이 있다. 남 모르게 견뎌온 지난 겨울길가의 풀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천상(Heaven)에서 떨어지는 봄 소낙비가 박수치며 기뻐하고 있다. /임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