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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옷장을 통해 나니아에 오게된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마치 꿈속에서 뭔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뜻은 잘 모르면서도, 그러나 너무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말, 그 말 때문에 그 꿈 전체가 좋은 꿈이 되기도 하고 악몽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말,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꿈속에서.  


사람은 왜 꿈을 꿀까요? 그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워하는 이는 꿈을 꾸지요. 사실, 종교나 예술은 인류가 꿔온 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운 것이 있기에 꾸게 된 꿈들, 보고 싶은 것이 있기에 그려본 것들 말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인류가 꾸어온 '좋은 꿈'이라고 했습니다. 꿈이지만 뭔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꿈 말입니다. 가령,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弘益人間)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왔다는 그런 신화들 말입니다. 신화는 물론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보다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신화는 힘이 셉니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쁨”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신화 읽기를 즐겼습니다. 신화에 담긴, 신화가 일으키는 어떤 그리움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읽을 때 종종 자신을 찾아와 압도하곤 하던 그리움을 일컬어 "기쁨"(Jo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가 말하는 "기쁨"은 사실,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누리는(enjoy) 무엇이라기보다는 겪는(suffer) 무엇이었습니다. 영혼을 압도해 오는 어떤 허기, 어떤 갈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은 이 세상 그 어떤 배부름이나 만족보다도 우리 영혼을 매료시킵니다. 사정없이 영혼을 후벼 파는 허기요 갈증이지만, 우리 영혼은 이 허기, 이 갈증을 몰랐던 때로 결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을 모르고 사느니, 이 허기, 이 갈증을 껴안고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봄을 좋아하시나요?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봄을 '누린다'기 보다는 봄을 '겪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루이스의 말을 풀이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그저 봄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샤워'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온통 '물들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을 '입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니까 울긋불긋한 옷이라도 차려 입고서 봄나들이를 가는 것인가 봅니다.) 보면, 어른들은 그렇게 봄 구경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지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애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 마냥 봄인데 / 보일 리가 있나요. " ("봄, 교실에서" 고준식) 


네, 어른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들의 내면은 을씨년스럽기 때문입니다.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봄의 수혈이 필요한 것이지요. 봄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 안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 잠기고, 그것을 흡입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봄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봄을 앓습니다. 봄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우리말 ‘아름답다’는 말은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리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그리움, ‘아름다움의 바다’인 하늘을 그리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이라는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이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우리를 정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슬란, 봄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니아에서 아슬란은 봄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아니, 아슬란 자체가 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슬란이 오는 것이 곧 봄이 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루시를 비롯해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옷장을 통해 들어가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땅에서 하얀 마녀에게 영혼을 팔아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버 씨 부부를 통해 예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아슬란이 오실 때 악이 바로 잡히리라. 

그의 우렁찬 포효에 슬픔이 사라지고,

그가 이를 드러낼 때에 겨울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갈기를 흔들 때에 봄은 다시 찾아오리라.“


뭔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나요? ‘꿈’ 속에서 뭔가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꾸게 되는 꿈속에서. 



이종태 <빛과 소금> 2020. 5월호



(이미지 출처: https://bit.ly/2Bjaxm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