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영성 이야기 5
루시, 반짝이는 눈
"루시가 [아슬란을] 가장 자주 보았어(Lucy sees him most often)."
나니아 이야기에서 루시는 "보는 사람"입니다. 페벤시 가(家) 아이들 중에서 가장 어린 아이였던 루시는 그 아이들 중에서도 아슬란을 가장 자주 보는 이였습니다. 'Lucy'라는 이름은 라틴어 'lux', 즉 '빛'에서 온 말입니다. 빛이 있어서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지요. 루시는 분명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였을 것입니다.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니아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아이 말입니다.
아이는 자라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아이가 된다지요? 여기, 나이 들어 다시 어린 아이가 된 한 노(老) 시인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나이 60에 겨우 /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 눈이 열렸다. / 신이 지으신 오묘한 / 그것을 그것으로 / 볼 수 있는 / 흐리지 않는 눈 /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 채색하지 않고 / 있는 그대로의 꽃 /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 눈이 열렸다. / 세상은 /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 신이 지으신 /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 지복한 눈 /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 신의 옆자리로 살며시 / 다가가 / 아름답습니다. / 감탄할 뿐 / 신이 빚은 술잔에 / 축배의 술을 따를 뿐 (‘개안(開眼)’ 박목월)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사람이라야 정말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렘 5:21) 사람에 불과하지요. 노(老) 시인은 자신은 나이 60이 되어서야 "겨우" 그런 눈이 열리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 떠 보게 되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슬란이 창조한 나니아는 그렇게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한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나니아는 아슬란이 '노래'로 창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연대기적으로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마법사의 조카』에는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나니아의 창조자는 세상을 기계 제작자가 기계를 제작해내듯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슬란은 나니아를 시인이 시를 짓듯 창조해냈습니다. 시인이 시를 짓듯 노래해냈습니다. 나니아의 창세기에서는 아슬란이 노래를 부르자 나니아의 모든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견딜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그 소리와 더불어 갑자기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은 소리들이 들려왔다....별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그 첫 번째 소리가, 그 깊은 목소리가 그 별들을 나타나게 하고 노래 부르게 만든 것이었다.” (《마법사의 조카》 8장)
아슬란의 노래가 별들을 (무로부터) 불러낸 것이었습니다. 아슬란의 "견딜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목소리"는 나니아의 나무들을 불러내고, 동물들을 불러내고, 물들을 불러냅니다. 아름다움(to kalon)은 부름(kaleo)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창조자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불려나온 것들입니다. 해야, 달아, 소나무야, 밤나무야, 토끼야, 거북아, 강물아, 샘물아, 하고 부르시며 "너, 있어라" 하시는 그 말씀으로 있게 된 것들입니다.
나니아의 태초의 말씀은 노래였습니다. 태초에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로 말미암아, 그 노래를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나니아가 노래의 나라, 춤의 나라일 수밖에요. 나니아에서 무시로 벌어지는 춤판, 정례로 열리는 축제는 창조자의 사랑의 선물이자 기쁨의 산물인 이 “너무도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한” 세계를 경이와 “감탄”, 감사와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나이 60에 비로소 눈이 열렸다는 시인은 노래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꽃”은 불꽃이라고. 눈 떠 보게 되면 이 세상 모든 꽃은 다 불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았다는, 그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처럼 말입니다(출 3:4-5). “있는 그대로의” 꽃과 나무는 이미 다 불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꽃과 나무는 “스스로 있는” 분께서 그렇게 “있게 하시기”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그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 왜냐하면 눈 떠보면 이 세상에 “당연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창조자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의 모든 것을 창조한 다음 아슬란은 자신이 노래 불러 지어낸 그 나라에 복을 선포했습니다.
“나니아여, 나니아여, 나니아여, 깨어나라. 사랑하라. 생각하라. 말하라. 걸어다니는 나무들이 되어라. 말하는 동물들이 되어라. 성스러운 물이 되어라.”
나니아는 나무와 동물과 물이, 소나무와 밤나무, 토끼와 거북, 강물과 샘물이 아담의 아들들, 이브의 딸들과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는 나라입니다. 사람처럼 그것들도 “있으라” 하시는 창조자의 말씀을 듣는 존재, “있어서 참 좋다” 하시는 창조자의 노래가 스며들어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만물은 실은 영물(靈物)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영(Spiritus Creator)에 붙들려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그렇게 영물로서 알아보고, 돌보는 존재가 바로 만물의 영장(靈長), 사람입니다. 나니아의 첫 번째 왕과 왕비가 된 사람은 런던에 살 때 자신의 말에게 친절했던 마부 프랭크와 그의 아내 헬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하얀 마녀에 의해 나니아가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되어버렸던 시기, 비버 부부는 페벤시 가(家) 아이들에게 이런 예언의 시를 들려줍니다.
“아담의 육신과 아담의 뼈가 / 케어 패러벨 성의 왕좌에 앉을 때 / 악의 시대가 끝나리라.”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물로 세례를 받고, 말하는 동물에게서 예언의 말을 듣고, 만물에게서 목소리와 색깔을 빼앗아버리는 악과 싸우며, 걸어다니는 나무의 호위를 받는 사람입니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신이 지으신 /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 지복한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불붙어 있는 꽃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불붙어 있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임을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온 땅에 가득한 “주님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사 35:2)을 보는 사람입니다.
<빛과 소금> 2020년 7월호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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