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41)
"속히 내려오라!" 새해의 표어를 구하며 몇 주일을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라는 말씀을 주셨다. 아니 그 말씀밖에 마음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구절을 가지고 표어를 만들려니 영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새해에 진취적이고 발전적으로 "올라가라!" 라는 말은 모를까 내려오라니, 그것도 속히 내려오라니……. 아무리 말을 붙이려 해도 새해 표어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다. 며칠을 다른 말씀을 달라고도 기도해 보고 마음 속으로 새해 계획에 맞는 이런저런 말씀들을 떠올리려 해도 막상 아무런 말씀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속히"라는 말에 마음이 꽂힌다. 어릴 적 담장 옆 나무 위에서 놀던 때가 있었다. 어른들은 항상 ..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연말이라 바쁘다. 내년에도 다시 볼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다시 못 만날 사람들처럼 송년모임을 한다. 일 년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것은 좋은데 너무 많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지만, 너무 많다 싶어 마음이 쓰인다. 분주한 연말인데 멀리 계신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니 마음은 복잡하고 생각은 많아진다. 해야할 일은 많은데 일사천리가 아니라 꼬여만 간다. 함께 동역하는 분들이 정말 귀하게 섬겨주고 있는 데도 간혹 일어나는 사소한 부딪힘에 얼굴빛이 달라진다. ‘자기 일만 문제없이 해 주어도 신경이 덜 쓰일 텐데. 나 좀 도와주지. 진짜…….’ 마음에 요철이 생긴 듯 덜그덕 소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난다. 말 끝에 까칠함도 스물스물 올라오려고 하니 내가 일년 동안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것이 맞을까? 자괴감이..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다른 날보다 오늘, 벗들이 많이 모인 것은. 새벽 기차를 타고, 또 아이들을 맡기고, 식구들을 먼저 보내고, 늦은 오후 이 자리에 와 앉아 있기까지 얼마나 수선을 피웠을 지 생각하니 맘이 짠하다. 벗들은 십자가를 향해 앉아 기도 삼매에 잠겨있다. 벗들 사이로 흐르는 적막하고 고즈넉한 기운이 참 좋다. 대나무 숲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침묵 사이로 벗들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들을 뭐라고 부를까? 그래, 위로가 되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들고 한걸음에 달려온 천사들이다.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는 이와 비슷한 체험을 ‘영적 위로’라고 불렀다. “위로란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나며 영혼이 창조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아빌라의 테레사가 아픔과 더불어 사는 법 예배당 십자가 밑에 앉아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를 아룁니다. 얼굴 하나에 고통 한 아름, 이름 하나에 눈물이 고이는 까닭은 지금이 사순절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흐려진 눈동자, 거절과 배신, 상실의 잔을 마셔야하는 그 씁쓸한 입맛 다심, 세속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자꾸 격려하며 수줍은 미소로 괜찮은 듯 돌아서는 그 뒷모습은 마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각기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사람인 이상 따라붙은 그림자가 다 비슷비슷한 것처럼, 우리는 여러모로 닮아 있습니다. 수녀원 입회 2년 만에 얻은 중병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는 1515년 스페인 출신..
Pick Me Up? 요즘 〈Pick Me〉라는 노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정당에서는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하니 곧 전국 방방곡곡 거리를 이 노래가 채우게 될 것이다. 원래 〈프로듀스 101〉이라는 걸그룹 오디션 프로그램의 주제가인 이 노래에는 "pick me up", 곧 "나를 골라줘", "나를 (차에) 태워줘", "나를 구매해줘"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사가 반복된다. 이 오디션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신나는 멜로디를 갖고 있는 이 노래가 전혀 즐겁게 들리지 않는 것은 젊은 여성들을 "소녀"라는 풋풋하고 순수한 단어로 포장해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송에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부여된 시청자 집단은 만들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는 상..
황혼 속의 〈재의 수요일〉 그리고 〈흰 그림자〉 하늘이 유난히도 맑은 오늘은 우리 민족의 명절인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이자, 기독교 전통 절기인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이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참회하는 40일 간의 기간이며, 그 첫 날인 수요일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되새기는 의식을 행한다. 그래서 이 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그리고 재의 수요일과 관하여 아마도 가장 유명한 시는 T. S. 엘리어트(Eliot: 1888-1965)의 장편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가 애독하던 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었다고 한다. 윤동주가 어떤 점에서 이 시를 사랑했는지는 알..
인간다움의 회복 : 한 해의 마무리와 시작을 위한 기도 안내 대림절을 시작으로 신앙력은 이미 한 해가 시작되었어요. 새해인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시간은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갑니다. 신앙력과 세상력의 사이에서, 우리는 전자에 의한 고요한 기다림과 출발보다는 후자가 주는 힘에 더 압도되는 것 같아요. 모임도 많고 마음도 분주합니다. 커다란 박스를 꺼내놓고 12월 31일까지 한 해의 모든 것을 다 쓸어 담고 테잎으로 서둘러 봉인해 버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1월 1일을 장모가 사위 맞듯 그렇게 가슴만 두근거리는 채 일거리에 쌓여서 정신없이 맞아들입니다. 지난 한 해를 음미할 시간도, 새해를 조용히 가늠해볼 시간도 빼앗긴 채, 우리는 고속도로를 그저 질주합니다. 지나온 길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며 방향과 속도를 조정하는, 즉 성찰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위협..
희망과 사랑처럼 : 대림절 그리고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 대림절(Advent). 기다림의 계절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기다린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전화나 편지를 기다리고, 용돈날이나 월급날을 기다리고, 학교나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합격 통보를 기다린다. 그 외에 모든 이들은 어떤 좋은 소식을, 또는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런데 특히 한 해의 마지막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탄절이 있다. 저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성탄절을 과거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때로 삼아 왔다. 그러다보니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늘 소외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성탄 절기 속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