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욕으로 가득 찬 사람은 관상(contemplation)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훈련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진흙과 같은 육체의 정욕 속에 깊이 파묻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진리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빛을 쳐다볼 수 있는 힘이 없다. 세상도 마찬가지로 ……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가르침으로 생명의 순수함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바라볼 수 있는 힘과 관상할 수 있는 힘을 모두 주신다."
가이사랴의 바질(Basil of Caesarea, ca. 329-379), De Spiritu Sancto, Ch. XXII, 53.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는 것' 또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고대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는 성령에 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4세기 카파도시아(Cappadocia)의 교부 바질은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떠나야 성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Ch. IX, 23) 그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요한복음 14:16-20)을 언급하며,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과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받지도 못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바라 볼' 수 있는 힘과 '관상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말한다.
바질이 성령을 '본다'는 복음서의 말씀을 '관상'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관상하다(contemplatio)'라는 말에 기본적으로 '보다'라는 의미가 깔려 있는 점에 착안한 듯 싶다. 그러나 고대 기독교 전통에서의 관상은 단순히 대상을 보고 지적으로 아는 것 이상이다. 관상은 대상을 내적인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경험하고 나아가서 그 대상과의 깊은 일치 또는 연결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바질은 성령을 '바라보는 것'(인식하고 지적으로 아는 것)과 '관상하는 것'(경험하여 하나되는 것)을 구분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받는다'는 개념을 '성령을 관상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질에 따르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열정으로 뜨거워지며 어떤 카리스마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깨끗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깊은 친밀함과 일치 속에 거하는 것이다. / 바람연필
* 바질의 De Spiritu Sancto(성령에 관하여)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신성을 가진 삼위의 한 분이라는 신학의 토대를 놓은 중요한 논문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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