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승리의 전략 (마틴 루터 킹)

한 줄 묵상 2016.11.11 23:59

비폭력은 강력하며 공정한 무기이다. 그것은 상처 입지 않게 베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역사상 유일한 무기이다. 치유의 칼이다. 정의를 요구하는 흑인들의 함성에 대한 실질적이고 도덕적인 답변인 비폭력 직접 행동은 전쟁에서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냈으며, 그럼으로써 1963년에 일어난 흑인혁명의 승리 전략이 되었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서울: 간디서원, 2002), 34.


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 (Photo from Wikipedia)


1963년은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노예해방선언"이라는 문서에 서명을 한 지 100년 째가 되는 해였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 차별 가운데서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노예 해방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번드르르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흑인들은 "우리는 정말로 해방되기는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과 함께 그들은 약 1천여 개의 도시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정의와 평등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특히 킹 목사는 1963년 봄, 당시 인종 차별이 가장 심한 도시이자,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인해 가장 위험한 곳이었던 앨러배마 주의 버밍엄에서 인권운동 행진을 이끌었다. 나아가 그해 8월 28일에는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조직하고, 그곳에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고 알려진 명연설을 남겼다. 이러한 일련의 비폭력 운동은 이듬해 민권법 개정안(Civil Rights Act of 1964)의 통과를 이끌어 냈다. 


    마틴 루터 킹의 《왜 우리는 기다릴 수 없는가》(Why We Can't Wait)는 1963년에 일어난 흑인 인권 운동을 돌아보며 혁명의 정당성과 경과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킹은 1963년 흑인 혁명의 승리 전략으로 비폭력을 꼽는다. 그에 의하면 비폭력은 "상처를 입지 않게 베는" "강력하며 공정한 무기이다." 그는 1963년은 흑인 혁명을 향한 정당한 이유와 많은 힘들이 결집된 때였지만, 비폭력이라는 철학과 방법이 없었다면 대규모 무혈 혁명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2016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이 나라가 국가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 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1963년의 워싱턴 행진 때와 같은 (어쩌면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민주 국가의 회복을 위해 행진하고 있다. 서민들의 고혈과 같은 세금으로 소수의 특권층들이 부를 누리는 사회를 바로잡자고 외치고 있다. 정의와 원칙이 비웃음을 당하고 불의와 반칙이 거만하게 웃는 세상을 치료하자고 손을 들고 있다. 이것은 혁명이다. 정치적 혁명보다 더 근원적인 가치의 혁명이다. 이 혁명의 철학과 방법은 마틴 루터 킹의 말처럼 비폭력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주의하고 거부해야 할 세력은 '국정을 농단하는 악한 영'이라기보다는 의로운 행진에 나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시민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폭력에 휘말리게 하려는 '폭력의 영'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8)/ 바람연필 권혁일

posted by 바람연필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백투더클래식 2014.03.04 03:52

사막의 꽃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생의 절정의 순간이 있다.” 테이블 위에 얹힌 진분홍 장미꽃의 도드라진 자태는 마치 이런 말을 건네 오는 듯하다. 도시의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숨 가쁜 발자국 소리들은 아마도 그런 절정을 꿈꾸며 모이고 또 모였으리라. 많은 도시인들의 가슴에는 더 많은 소유와 축적은 생을 빛나게 해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듯하다. 이 글귀의 끝자락에 도종환의 시 한 구절은 의문부호를 하나 붙여 놓는다.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도종환, ‘단풍 드는 날일부.

 



떠나온 사람들


        버림과 떠남으로 생의 절정을 향해간 사람들이 있었다. 주후 3-6세기경, 이집트와 시리아 등지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비옥한 생활 터전을 버리고 훌쩍 떠나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구현하고픈 열망으로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와 이야기들을 모아서 담아 놓은 책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The Sayings of the Desert Fathers)이다.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숭앙했던 스승들의 금언들과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의 모태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각 금언들이 보편적인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와 상황 가운데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주어진 교훈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교훈들이 약 천오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사막의 남녀 수도자들은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사막 수도자의 원조 격인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onius of Egypt, ca251-356)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듣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토니우스의 뒤를 이어 사막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다른 사람들의 귓가에도 울렸다.


        이들의 떠남은 지금의 자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의 자리는 정상적이지 않고 현재의 삶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라는 위기의식이 그들을 움직였다. 그들 당시 기독교회는 사막화 과정 가운데 있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고 황제까지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권력과 재물의 위력 앞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전에 만연했던 혹독한 핍박과 순교는 사람들에게 한 주인을 섬기도록 신앙의 절대성을 요구하였지만,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진 이후에는 오히려 신앙이 삶의 한 조각으로 전락하면서 영적 긴장감과 절박함이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이처럼 교회가 사막같이 메말라져만 갔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워 올린 사람들이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었다이들이 삶의 터전을 떠난 것은 그들 나름의 보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보화는 세상 가치관을 확실히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압바 히페레키오스가 말했다. “수도자의 보물은 자발적인 가난이다. 형제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자. 안식의 시간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120.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살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한 영적인 절박함이 이처럼 포기와 가난의 삶으로 떠나게 했다. 떠남은 말 그대로 문제점들의 나열이나 예리한 분석이 아니라,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결기 있는 행동이다. 간절한 염원이 스며있어야만 일어나는 삶의 양태인 것이다. 간절한 염원은 수도자적 삶을 낳았고, 수도자적 삶은 사막의 꽃, 즉 하나님의 향기 나는 사람들을 잉태했다.

 


사막에 핀 꽃


        사막은 메마르지만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강같이 흐르는 곳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불꽃 속에서 또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과 강렬한 대면을 가졌던 곳이 광야였다. 세례 요한이 외친 곳도 광야였고,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사탄의 시험을 받은 곳도 광야였으며, 바울 역시 회심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는데 그것도 광야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여정(고전 10:11)의 한 형태라고 가르친다. 이들 모두가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나 부대끼며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었고, 때로는 사탄과 처절한 싸움을 하면서 형성되고 꽃을 피웠다. 사막의 수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은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막에서의 하루하루는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한 열망으로 채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를 줄여나가는 고행과 침묵, 규칙적인 기도와 자신을 성찰하는 삶에 투신하였다. 이 모든 훈련에는 절제와 분별이 밑받침 되었다.

 

한 원로가 오이가 좀 먹고 싶었다. 그는 오이를 가져다가 그걸 눈앞에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욕망에 지진 않았으나, 스스로 벌주면서 그 욕망을 뉘우쳤던 것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79.

  

      수도자들은 세상을 떠나옴으로써 상대적으로 외부의 유혹에서 자유로웠지만,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절제하며, 깨어 분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제는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그 유혹에 흔들리는 내면의 욕망이었다. 그들은 항상 속사람을 보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서 생활한다는 경각심을 지닌 채, 삶의 모든 조각들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체험하기를 원했다사막은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가 어렵고, 생명이 있는 존재는 항상 존립 자체를 위협받으며 살아야 하는 곳이다. 생명보다는 죽음이 더 친근한 곳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안팎의 연약함 때문에 거룩한 삶을 단 하루라도 지탱해 가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했던 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수도자들은 물과 빵이 아닌 겸손으로 살아야 함을 체득해야만 했다.

 

복된 신클레티케가 말했다. “쐐기가 없으면 배의 나사를 조이는 것이 불가능하듯, 겸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302.

 

        유혹을 이기기 위해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겸손과 자비와 인내라는 꽃들을 피워나갔다. 사막은 아프지만 치료를 제공해 주었고, 고통스러웠지만 행복을 던져다 주었다.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그들이 평생 걸쳐왔던 옷가지들을 벗기기에 충분하였다. 감정과 지식에 치우친 껍데기와도 같은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만남은 이글거리는 햇볕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져 내렸다. 뜨거운 숨결을 지니신 하나님과의 대면은 영혼의 가식적인 껍데기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땅속에 깊이 박힌 단단한 바윗돌처럼 확고하게 안다고 믿어왔던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했다밤하늘이 쏟아놓은 뭇 별들보다 많은 분심들과 유혹들이 자신들의 호흡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또 이것들을 부추기는 사탄의 위협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자신이 얼마나 목이 뻣뻣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현존과 천상의 은혜를 향한 갈망과 회개의 삶은 더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원로가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를 어디든 달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눈물과 애통이 뒤따라야 한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61.

 

애통함과 눈물 속에 그들은 다듬어져 갔다. 사막은 이처럼 표면적인 나가 아닌 근원적인 나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궁극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겸손과 환대, 자비와 인내가 싹터 나오면서 사막 곳곳에 꽃이 만발하였다. 이 같은 생생한 체험들이 깊어져 사막에 영적인 스승(Abba, Amma)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의 말 한 마디는 타들어가는 제자들의 목을 시원하게 적셔 주었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사람들, 왕과 법관들도 그 지혜를 듣기 위해 사막으로 찾아 왔다. 결국 나일강의 넘쳐나는 물이 사람들의 타는 가슴을 해갈시켜 준 것이 아니라, 건조한 바람이 가득한 사막이 사람들과 도시에 생명수를 공급해주었다.



 

절정에 서는 떠남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개신교에 대한 진단과 비판이 어느 때보다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면면이 살펴보면 한결같이 교회 토양이 점점 불모지가 되어간다는 내용이다. 생명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증상이 만연하다는 암울한 진단이다. 사막화가 먼 나라 몽골에서만 진척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막화되어가는 한국 교회에 생명수가 절실하다. 생명수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신앙을 무너뜨리는 세력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 저항은 과거 교회의 사막화에 저항하여 사막으로 떠났던 수도자들처럼 우리의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결기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 권력과 성공과 명예와 부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지금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새 땅을 밟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남으로써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 한국 교회의 황폐화는 완연하다. 하지만 만약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그리고 공동체의 사막을 찾아 떠난다면, 그래서 그들이 과거 이집트 사막이 수도자들로 도시를 이루었던것처럼 많아진다면, 한국 교회는 떠남을 통해 피어나는 새로운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나의 지금 이 자리는 어떤 곳인가? 지금 이 자리를 저항하며 사막을 향한 떠남이 있었던가? 나의 사막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일상에서 나는 무슨 꽃들을 피워내고 있나? 우리야 말로 바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사막의 독방(cell)에 거하며 이런 질문들과 씨름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수도자들이 스승에게 찾아와서 절박한 심정으로 외쳤던 말,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그러면 우리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건져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한 원로가 말했다. “말만 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말이 많다. 행동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200.

 

임택동은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며,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과정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신앙과 영성이 발휘되고 또 표현되어지는 것(lived religion)에 성경이 실제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백투더클래식 2013.12.02 11:18
  • 좋은내용감사합니다.우리안에참자유가넘쳐흐르길원합니다.믿음.소망.사랑우리안에그래도중요한건끝까지있을사랑이아닌가싶습니다.독일이란나라에서참으로신성한개혁을주신성직자분들께감사함을느끼게합니다^♥^

    BlogIcon cu 2014.05.16 22:30
  •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4.05.17 10:00 신고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여러분은 한 백화점에서 손님이 가져온 쓰레기를 고급 의류나 최신 모델의 전자제품과 맞바꿔 준다고 하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악취가 코를 찌르고 더러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값진 물건들과 바꿔 준다니요!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나는 맞바꿈’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정말 유명해서 긴 말이 필요 없는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지요. 그런데 그가 1517년에 처음 교회 개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가톨릭교회와 갈라서서 새로운 종파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를 원했지요. 그는 개혁자였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바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1520)라는 편지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글이 바로 이번 호의 ‘백투더클래식’에서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하는 영성 고전입니다.


       이 글은 루터의 개혁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3대 논문 중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매우 중요하고 뛰어난 글입니다. 그는 이 글을 라틴어와 독일어 두 가지 언어로 썼는데, 먼저 라틴어본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글에서 가능한 논쟁은 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서 영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리고 독일어본은 라틴어본을 번역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독일의 교육 수준이 낮은 평신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라틴어본이 좀 더 정교하고 분량도 많지만, 독일어본은 중세 후기의 영적 활기를 간직한 토착어로 쓰여진 문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 고전 작품의 영적 활기가 잘 나타나는 구절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믿음,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


믿음은 영혼에게 참 많은 것을 부여해서, 영혼이 신성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도록 합니다. ……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영혼을 신부로서 그녀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이 결혼 후에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혼이 한 몸이 됩니다”(엡5:30).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I. 12.[각주:1]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교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영혼이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결혼반지”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랑과 신부의 하나됨으로 이해한 경우는 루터 이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바울의 글에 그러한 이해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 교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남녀 사이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를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와 영혼의 연합을 ‘영적 결혼’의 모델을 사용해서 설명하였습니다. 


1520년에 출간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속표지

     그런데 이 ‘결혼’에 있어서 믿음이 결혼반지, 또는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작용한다는 루터의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 결혼은 모든 결혼 중에 가장 완전한 결혼이며, 이 연합이야 말로 믿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의 주장, 곧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전의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절연하고 이성 위주의 ‘합리적’ ― 그러나 사실은 ‘메마른’ ― 개신교 전통을 세운 것이라는 견해는 오해입니다. 그보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자였던 루터가 기독교 전통 가운데 전해져 오는 신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신앙고백적 명제들을 ―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시다”와 같은 문장들을 ― 이성을 통해서 진실로 인정하고, 감정으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 이상입니다. 루터가 말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실존적으로 진흙탕과 같은 죄의 감옥을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은혜 가운데에서 합당하게 되어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신비와 만나서 하나가 되게 하는 접촉점입니다. 


여기에서 루터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가톨릭 수도승이자 영성 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이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머튼은 그의 책 《새로운 관상의 씨앗들(New Seeds of Contemplation)》에서 ‘관상(contemplation)’의 시작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관상이란 하나님과 영혼이 기도와 활동 가운데 일치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곧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하나님과의 연합도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관상가가 될 수 없으며, 반대로 믿음이 깊어지면 하나님과의 일치도 깊어진다는 것이 머튼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은 “지성적인 동의(intellectual assent)” 그 이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접촉을 갖게 하는 단 하나의 길(the way)”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를 대표하는 16세기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가 토마스 머튼이 믿음에 대하여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신나는 맞바꿈


그러면 영혼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 곧 연합을 이루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제 이 글의 제목인 ‘신나는 맞바꿈’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읽을 때입니다.


이렇게 [영혼과 그리스도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좋든지 싫든지 간에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믿는 영혼 그 자신의 것이 되고, 그 영혼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는 모든 소유들과 복들이 속해 있는데, 이제 그것들은 그 영혼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에게 지워져 있던 모든 악들과 죄가 이제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der fröhliche Wechsel und Streit)가 시작됩니다. (I. 12.)


결혼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는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우리의 모든 약함, 죄, 슬픔, 좌절, 고통, 정죄, 죽음을 가져가셔서 당신께서 그것을 모두 담당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생명, 기쁨, 위로, 은혜, 승리와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엿장수에게 빈 병을 가져다주고 달콤한 엿을 바꾸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교환입니다. 악취로 가득한 쓰레기를 최고급 의류나 전자제품과 맞바꾸는 것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 루터의 확신입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의 밑바탕에는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씨름하다가 믿음을 통해서 자유를 경험한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깔려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설적인 자유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와 같이 믿음을 통해서 시작되는 ‘신나는 맞바꿈’이 가져다주는 혜택입니다. 우리를 끈질기게 옭아매는 죄의 감옥으로부터의 놓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서 연합한 신자들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무엇에도, 누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자유를 우리의 게으름이나 악행에 대한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금식과 같은 육체적 훈련을 하지 않거나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오히려 참된 자유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종으로서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섬김의 수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은 매우 높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 아버지는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자신의 소유들을 나에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아주 기뻐하실 일들을 자유롭게, 기쁘게, 그리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웃들과 관련하여서는 내가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되셨던 바로 그 방식으로, 곧 내가 볼 때 내 이웃들에게 필요하고, 유용하며, 복된 것이라 여겨지는 것만을 행하겠다. 왜냐하면 난 믿음을 통해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Ⅲ. 27.)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은 이제 이웃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던 그 방식으로, 나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행은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삶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르틴 루터가 믿음을 강조하여 선행의 중요성을 축소시켰고, 그래서 현재 개신교회가 말만 많이 하고 행함이 부족하다는 변명은 그 정당성을 상실합니다. 오히려 루터는 당시 중세 교회에서 개인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선행을 건져 올려,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살아가는 높은 수준의 삶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부패와 악행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가 추앙하는 종교개혁자가 말한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구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투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죄와 탐욕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바른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기도 가운데,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와 접촉하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신나는 맞바꿈’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글을 다시 떠올려 보면 루터는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가 시작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아무리 바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삶에서 죄의식, 우울, 슬픔, 두려움, 분노, 좌절 등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나는 맞바꿈’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나는 맞바꿈’은 “분투”이며(I. 12), 믿음은 “항상 증가되어야” 합니다(Ⅲ. 27).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저희에게 굳건하고, 즐겁고, 감사로 가득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 마르틴 루터, Luther’s Prayers (Minneapolis, MN: Augsburg, 1994), 85.


권혁일 / 미국 버클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 (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다. 영성과 문학, 영성과 사회정의, 수도원 영성과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다. Flowers of Contemplation: Peace and Social Justice를 지었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서》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3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곳과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독일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본은 참조하여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풀어내었습니다만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운명의 수레바퀴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3.09.07 05:06

저는 주님 손 안에 있습니다. 

뜻하시는 대로 제 운명의 수레바퀴를 이리 돌리시고 저리 돌리소서. 

저는 무엇이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를 위해 살지 않고 다만 주를 위해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 4, ch. 15.



http://en.wikipedia.org/wiki/File:CarminaBurana_wheel.jpgThe wheel of fortune from the 'Burana Codex'.'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내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은 '자유'롭다. 하지만 피로하다. 소위 '피로사회'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고, 그러다 지치면 '힐링'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고대인들과 중세인들은 성공과 실패가 '운명'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수레바퀴"(Wheel of Fortune)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제 운명의 수레바퀴를 이리 돌리시든 저리 돌리시든!"이라고 말하는 토마스 수사의 고백에서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담대함, 호연지기는 '믿음'에서 왔다. 


'운명의 수레바퀴' 따위는 없다는 현대적 '이성'이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 이 세상 주관자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 곧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에서 말이다. 


이 믿음으로 나도 자유롭고 싶다. 


이 세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갇혀 지내던 좁아터진 곳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 드넓은 광장에서 뛰고, 노래하고, 어깨동무하고, 땀흘리고 싶다. 


"하나님의 종"이 될 때 그리 될 수 있다. 


내 인생을 "주님의 손"에 얹어드릴 때 그리 될 수 있다.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