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의 추천고전
찬 바람이 불면, 그대 무슨 생각하시나요?
: 디트리히 본회퍼의《옥중서간》
이 달에 함께 나누고 싶은 고전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옥중서간》이다.
본회퍼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지가 벌써 68년이 되었지만, 그의 사상과 신학이 녹아 있는 《옥중서간》은 작금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더욱 회람되어야 하는 책이 아닌가 한다. 특히 한 대학생의 ‘대자보’로 시작된 ‘안녕하십니까’의 물음은 예외 없이 우리 기독인들이 답해야만 하는 ‘경건과 저항’에 관한 물음이라고 하겠다.
찬 바람을 견디다 못해 이미 얼어붙은 농토처럼 굳어 있는 우리네 영혼에 ‘경건의 의미’와 ‘세상에 대한 저항 정신’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책, 《옥중서간》! 이 글에서는 먼저 본회퍼의 생애과 배경을 다루고, 그의 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한 후에, 《옥중서간》에 나타난 그만의 ‘경건과 저항’의 영성을 다루고자 한다.
디트리히트 본회퍼는 1906년 독일 브레스라우(Breslau)에서 아버지 카를(Karl)과 어머니 파울라(Paula)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학적 전통이 유명한 튀빙겐(Tubingen)에서 공부했으며 <성도의 공동생활(Sanctorum Communio)>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3년 히틀러 폭정하에 독일 교회들이 히틀러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에, 본회퍼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를 세워 나치에 대항했다. 그 후, 본회퍼는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의 권유로 뉴욕으로 건너갔지만 ‘내가 이 어려운 시기에 나의 조국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다시 재건될 때에 나는 내 조국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조국 독일로 돌아 간다. 계속되는 반 나치 운동을 펼치던 본회퍼는 1943년에 체포되어 테겔 형무소(Tegel Prison)에 수감되어 2년을 지내고 광복을 몇 달 앞둔 1945년 4월 9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운명을 다하고 만다. 이 시기에 그는 부모 그리고 절친인 베트게(Bethge)와 그의 원숙한 신앙을 교류하게 되었고, 또한 기도문과 시 그리고 다른 에세이 등을 써 보내게 된다. 그의 서거 후, 베트게가 그의 글들을 모아 정리하였으니 그것이 지금 우리의 손에 안긴 《옥중서간》이다.
《옥중서간》에 녹아 있는 본회퍼의 사상, 즉 ‘(머리가 커져버린) 세상에 대한 이해 (The secular interpretation)’, ‘비종교로서의 기독교 (Religionless Christianity)’ 그리고 ‘타자를 위한 기독교 (Being there for others)’는 그의 철학적, 신학적 이해를 보여주는 주요한 개념들이다.
먼저, 본회퍼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영향하에 있다. 딜타이에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인간 자신의 주체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신의 존재를 긴급할 때 부르는 임시방편의 존재나 자기 편의를 위해 임의로 쓰는 존재로 더 이상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딜타이는 신의 존재를 정치나 법 그리고 일반과학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본회퍼는 이런 딜타이의 영향으로 ‘성인이 된 세상(A World come of age)’을 언급하였다. ‘성인이 된 세상’의 의미는 이미 머리가 커져 버린 세상을 의미하는데, 이는 더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찾지도 않고 의지하려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본회퍼는 또한 칼 바르트(Karl Barth)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칼 바르트는 종교적 선험성(Religion a priori, 경험 이전의 직관 혹은 감정)에 빠진 자유주의자들의 모순을 비판했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들이 믿음과 신학의 영역을 감정에 국한시키고 형이상학적으로만 치부하며 세상의 일들과는 별개의 것으로 여겼다고 비판했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본회퍼는 <옥중서간>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약점은 그들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자리를 결정할 권리를 세상에 양보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과 교회의 싸움에서 비교적 쉬운 길을 선택했다” (180) 1
본회퍼는 바르트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또한 바르트의 실증주의적 입장을 비판했다. 즉, 바르트는 종교적 선험성으로 치닫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였지만 실제적으로 아무런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바르트]는 교의학적 측면이나 윤리학적 측면에서 어떤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한계이다. 이것 때문에 그의 계시신학은 실증주의적[경험과 실증적 기반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만이 참된 것이라는 주장]이 되었다”(181).
이런 딜타이의 철학에 근거한 ‘성인이 된 세상’ 이해와 바르트의 종교적 선험성을 극복하려했던 신학적 이해가 그의 ‘경건과 저항’의 영성인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와 ‘타인을 위한 기독교(Being there for others)’를 만들어 내었다. 이 본회퍼의 이 두 용어 안에 들어있는 ‘경건과 저항’의 영성은 (종교적 선험성을 비판했지만 아무런 방법을 말하지 못한) 바르트와 달리,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인 예수의 길을 보여주는 현장의 영성이다.
그의 ‘경건과 저항’의 영성을 나타내는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와 ‘타인을 위한 기독교(Being there for others)’는 무엇인가? 딜타이(Dilthey)의 철학적 개념에 영향을 받은 본회퍼는 기존의 종교의 개념 - 라인홀트 지베르크(Reinhold Seeberg)나 칸트(Kant)의 선험적 개념, 즉 임시방편의 신 또는 복을 주는 신 - 을 거부하고 삶의 매 현장(정치, 입법, 자연 과학등)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따르는 비종교적 행위를 ‘경건’이라고 불렀다. 즉 기존의 종교 개념은 끝이 났고 ‘삶으로 종교개념’ – 비종교적 개념 - 만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우리는 정말 비종교의 시대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은 정말 종교적이기를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교회의 주인이 아닌 이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153-4).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종교를 하자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세상 안의) 새 삶으로 초대하기 위해서이다(199).
그래서 그는 인간들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 혹은 자기가 자기 꾀를 가지고 고전하다가 안 되면 다급하게, 슈퍼맨을 부르듯, 부르는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에게 이것은 신앙도 경건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함이 아닌 하나님의 약함과 고통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라고 설명한다.
종교적인 인간은 인간의 인식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라든가 (대부분 본인들이 치밀하지 못하거나 자신들이 게을러서 생기는 경우지만)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할 때 신을 찾곤 한다. 사실 이런 신은 대부분 ‘기계장치의 신’ (deux ex machina)이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거나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일 때만 이런 신을 부른다(154).
교회는 인간들 자신들이 해보다가 안 되면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삶의 끝자리가 아닌, 삶의 중심에 세워져야 한다(155).
마태복음 8장 17절은 그리스도가 그의 전지전능함으로 우리를 돕지 않으시고 그의 약함과 고통으로 우리를 돕고 계심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196).
이런 기존의 선험적 종교개념을 거부한 본회퍼는 그의 매 삶 속에서 '비종교적' 행보를 걷게된다. 그리고 이런 삶은 고통받는 ‘타인’과 함께 있는 행동(프락시스 praxis)에서 구체화된다. 고통을 받는 자들과 함께하는 그의 비종교적 기독교의 ‘경건’은 가해자들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 본회퍼는 예수님의 경건 역시 세속적 삶에 기반한 타자를 위한 삶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타자를 위한 삶은 기득권들에게는 ‘저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세속적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세상의 무신성(ungodliness)을 어떤 방법을 써서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신성화해서도 안 된다 (198).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는 절대적 변화의 경험이다. 이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험이다(209).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고 가장 힘이 있고 가장 좋은 이미지로써의 종교적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가 거하는 현장에 참여하는 것을 통한 ‘이웃과 함께하는 실재의 행동’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이다. 그 하나님은 동방의 제의 종교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괴하거나, 혼돈적이거나, 무서운 야수의 모습도 아닌 그저 ‘타인을 위한 인간’으로 계신 분이다. 그분은 그저 이웃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다(210).
《옥중서간》에 나타난 본회퍼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그저 선험적으로, 추상적으로, 현실도피적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게하는 그런 ‘종교’를 거부하는 ‘비종교적 영성’을 지니고, 가장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고통주는 자들에게 ‘틀린 것은 틀렸다’라고 외칠 수 있는 ‘저항 정신’을 지닌 자였다. 박근혜 정부하에서 살아가는 기독인들이 참으로 답답해하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숨통을 터줄 수 있을까? 로마서 13장 1절을 들이대며 무조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의 사람, 본회퍼를 통해 감히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본회퍼의 《옥중서간》에 깃든 ‘경건과 저항’의 영성이 팍팍한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을까?/ 이경희
- 이글에서 인용하는 《옥중서간》본문은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ed. Eberhard Bethge (SCM Press, 1967)의 본문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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