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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사교클럽에서 벗어나라! : 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

교회여, 사교클럽에서 벗어나라! 

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

 



세월호 그리고 버밍엄 감옥에서의 호소


지난 2014년 4월 16일 고난 주간의 수요일, 곧 사순절의 정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충격적인 죽음을 목도하였다. 침몰한 세월호, 그 안에 갇힌 소중한 생명들이 물속에서 스러져가는 것을 우리는 그저 속절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더디기만 한 수습 과정, 그 와중에 터져 나오는 수많은 의혹과 부당한 처사들에 대한 뉴스들…. 이런 것들에 우리는 슬픔을 넘어 분노와 참담함을 느꼈다. 이런 일들을 겪는 중, 마틴 루터 킹 Jr. 목사의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 (Martin Luther King, Jr., “Letter from Birmingham Jail,” 1963)의 한 구절이 필자의 마음에 와서 부딪쳤다. 이 편지는 마틴 루터 킹이 1963년 미국 남부의 알라바마 주의 버밍엄 시의 한 감옥에서 쓴 것인데, 당시 그는 흑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투표권 보장을 주장하며 가두 행진을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비폭력 운동에 대하여 여덟 명의 백인 목사들이 “시의 적절치 못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하였고, 그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킹 목사는 A4용지 약 20 쪽 분량의 공개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어느 한 곳의 불의(不義)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우리 모두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 속에 있기 놓여 있기 때문이다. 색색의 실들이 함께 짜여서 옷감이 되듯이, 우리는 모두 서로 얽혀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 중 누군가에게 직접 가해진 충격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에서 행해지는 불의도 전체 사회의 정의와 안정을 위협한다는 말이다. 사고를 일으킨 해운사의 사주 일가가 우리 현대사 속에 살아온 과정에도, 노후한 선박의 증축과 운항 과정에도, 이를 관리 감독하는 관계 당국에도 부조리와 편법, 불공정한 관행들이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 이런 면이 있음을 우리가 이제까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이런 불합리한 관행들을 바로잡지 않고 방치하던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와 같은 불공정한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이 사회의 상대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생존은 위태로워졌다. 우리가 사회의 각 분야에서 합당한 정의를 세우려는 노력을 좀 더 기울였다면,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고 더 안전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이 소중한 생명들을 지켜내고, 온 국민이 큰 충격과 슬픔 속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 일에 가장 책임이 적은 이들이 이번 사건에서 수없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후회는 더 뼈아프고, 우리들의 슬픔은 더 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위의 마틴 루터 킹의 글을 ‘우리가 어느 한 곳이라도 더 정의롭게 만들어 간다면, 우리 사회 모든 곳을 좀 더 정의롭게 될 것이다’라고 고쳐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일러준다. 킹 목사는 <편지>의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 “초대 교회의 희생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희생정신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정받던” 그리스도교인의 성격이다. 이런 희생적 신앙인들은 비난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사회의 잘못된 구조를 뒤흔들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권력 구조를 흔들어 놓았으므로, 초대 신앙인들은 “사회의 안정을 깨뜨리는 사람들”이라고, “외부로부터 온 낯선 선동자들”이라고 고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람의 말에 복종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희생적 신앙 실천은 결국 유아 살해의 문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굶주린 맹수들 앞에 자신들을 던졌던 잔혹한 문화에도 종언을 고했다. 

 

이 말은 희생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사회의 관행과 관습을 바꾸어 내는 변화의 능력”이 있으며, 그러한 변화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그들의 본분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교회가 그 초대 교회의 희생정신을 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킹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그가 지녀왔던 권위를 잃어버릴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신뢰 또한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하찮은 사교클럽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의 이런 경고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비판을 그대로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 즉 초대 교회의 희생정신을 계승하여 실천하는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가? 하지만 킹 목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통렬한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이 신앙의 필수 덕목임을 잊게 하는 ‘걸림돌들’에 대한 지적이다. 

 


교회의 사회정의 실천을 가로막는 걸림돌들

1. 복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 : 첫째 요인으로 킹 목사는 “복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지목한다. 인권과 정의를 위한 비폭력 운동을 비난하는 당시 미국 남부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 킹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비폭력 운동을 그렇게 보는 이유는 “영과 육, 지상과 하늘에 대한 기괴한 이원론”에 붙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한 온당한 정의의 외침”에 대하여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도 않고, “복음과 관계없는 사회적 이슈”라고 쉽게 속단하기 때문이다. 킹 목사의 이런 지적은 한국 교회에 던지는 예언적 선포처럼 들린다. 오늘의 우리들 가운데에도 복음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 붙들려, 정의를 세우는 일을 외면하거나,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는가?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킹 목사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 법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 사회정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흐리는 또 하나의 걸림돌로, 킹 목사는 ‘법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법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킹 목사는,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글을 인용하면서, 법에는 “정의로운 법”과 “불의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불의한 법은 “영원한 진리와 자연법”을 거스르는 인간적 조치들이다. 즉, 정의로운 법은 인간성과 그 존엄을 세우는 법이며, 불의한 법은 이것들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려는 조치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제도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불의한 법에는 비폭력으로, 저항하고 정의로운 법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지켜나가야 한다. 예를 들면, 히틀러 통치 아래 독일에서는 유대인을 돕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법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유대인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법에 대한 태도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of Hippo: 354-430)은 말한다. “부당한 법은 절대로 법일 수 없다.” 


 3. 평화와 갈등에 대한 피상적 이해 : 갈등에도 두 가지가 있다. 창조적 갈등과 파괴적 갈등이다. 그리스도인은 파괴적 갈등에 대해서는 결단코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창조적 갈등은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가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킹 목사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창조적 갈등은 우리가 그릇된 맹신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며, 진실과 허위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미망(迷妄)의 상황에서 진실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따라서 이러한 갈등은 인류 진보에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긴장과 갈등이 없는 “부정적 평화”에 안주하려 하기 보다는 “정의가 존재하는 긍정적 의미의 평화”를 향해 나가기 위해 창조적 갈등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4. 시간에 관한 신화적인 믿음(the myth of time) : 킹 목사는 ‘모든 정의는 더디지만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정의롭게 이루어져 갈 것이다’와 같은 말들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이들은 근거 없는 논리에 바탕을 둔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사실 시간은 언제나 중립적이다. 창조적으로 쓰일 수 있지만, 파괴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보다 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많다.” 모든 인류의 진보와 정의는 절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지치지 않는 노력과 끊임없는 분투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부단한 노력이 없다면 시간은 모순된 사회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세력의 동맹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킹 목사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신중한 고려 없이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만큼이나 위험하다고도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다려 달라’는 말은 대개의 경우 ‘절대로 안 돼’를 의미한다. 이런 말은 탈리도마이드[각주:1]가 주는 안정감과 같다. 감정적 압박을 잠시 이완시켜 줄 수 있겠으나, 결국 좌절이라는 기형아를 낳고 만다.” 우리는 그간 온갖 불의를 그냥 둔 채 ‘언젠가는 잘 되겠지’, ‘서서히 바로 잡아야지’ 라는 식의 유보적 태도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에는 기형적 관행들이 자라나서 우리 사회를, 이번과 같은 참사를 불러들이는 위험한 곳으로 만들어 간 것은 아닐까?

 



초대교회의 희생적 신앙을 계승하자

세월호 사건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참사를 야기했던 원인들, 구조 과정을 어렵게 했던 요인들, 이에 얽힌 부조리들을 바로잡는 과정이 반드시 거쳐야 한다. 즉, 우리 사회에 정의를 바로 세우는 노력 없이는 아무리 사람들의 마음과 감정을 위로한다 해도 진정한 치유, 온전한 회복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망각으로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변화가 없다면 사고는 반복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의 그릇된 관행을 바꾸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에 더욱 분발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행동을 ‘선동’으로 매도하고 ‘침묵’과 ‘기도’를 명령하지만, 행동으로 열매 맺지 않는 침묵과 기도는 헐벗은 이에게 따뜻하게 지내라고 말로만 하고 실제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마가복음 2:14-17). 나아가 정의를 세우는 일은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의 죽음을 의미 있고 고귀한 것을 승화시켜 나가는 길이다. 또한 그들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의 상처를 진정으로 치유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한 곳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일은 ‘사교 클럽’으로 머물지 않고 초대 교회로 돌아가 그들의 희생적 신앙을 계승하는 길이다.


남기정은 감리교 목사이며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 (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다. 미국 버클리 소재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기독교 영성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는 ‘존 웨슬리와 초대 교부 마카리우스의 영적 감각론 비교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4년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Thalidomide: 진정 수면제의 일종으로 임산부가 복용하면 기형아 출산을 야기했던 약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