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와 헤어 졌다고 금방 다른 여자로 그 자리를 채우지 말 것. 특히, 그 허전함 때문이라면 더욱 더. 연애는 쉬어서는 안 된다 거나, 그냥 한번 만나보자며 은근슬쩍 소개팅 자리로 끌려가지 말 것.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인연을 만들어 가지 말 것. 사람 사이의 관계는 까닭 없이 맺고 풀리는 것이 아니기에, 연을 맺을 때는 맺을 만한 이유를 충분히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풀렸을 때도 그 까닭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서, 앞선 관계, 즉 앞선 인연이 네게 전달해 주는 삶의 메시지를 다 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어디 남녀관계의 인연만 까닭이 있겠는가?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까닭”이 있다. 특히, 네 존재 자체가 하나의 “까닭”이야. 네가 좀 머리 아파하고 늘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로 해 보면, “네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냐?”, “너는 이 세상에 무엇하러 왔냐?” 하는 질문이야.
이 질문에 대해 네 스스로 어떤 수준의 답을 결정하게 되느냐에 따라, 너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냥, 행복하게, 다른 사람들 살듯이 사는, 아니 엄밀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살라고 암묵적으로 주입해온 그 방식대로 계속 살아가고자 한다면, 너는 그저 마음이 힘들면 적절히 심리적 처방을 하고, 몸이 힘들면 휘트니스 센터로 달려가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학기 시작하면 공부 때문에 바빠지고, 어느 샌가 아픔이 적당히 잊혀지고, 그러다가 어느 날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이랑 사랑에 빠질 것이다. 잘되면 결혼 할 것이고. 네가 소원하는 한 가정의 가장-요즘 그렇게 하기 힘들다는-이 되겠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 생활비에 교육비 씨름에, 은퇴 연금 씨름에, 행여 암이라도 걸릴까, 행여 퇴직이라도 당할까하는 불안감과 그 사이사이에 마치 메마른 가뭄 끝에 혀끝 축이는 느낌이 드는 출산, 아이들의 미소, 승진과 재테크의 보상 사이에서 시소를 탄다. 노동의 강도와 거기에 따라붙는 희생하는 느낌이 높으면 높을수록 여가 시간이 되면 미친 듯이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여흥에 탐닉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 것이다.
하지만, 얘야! 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말려들어가는 것이야. 삶을 잘 못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이 느낌을 이제 막 눈치 채기 시작한 네게 묻는다. 특히, “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네 삶의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에 주목해 다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물어봤자, 앞으로 40-50년 후에 끝날 인생에서 무슨 그렇게 큰 목적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다들 ‘죽음’이 앞에 있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느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반인들이나 신자들이나 너나 할 것 없이, 지금 먹지 않으면, 지금 가지지 않으면,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전전긍긍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욕심내고, 온갖 치졸한 짓으로 인간다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악다구니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게 아니면, 소박함을 가장한 소시민적 안일함 속에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평범함으로 안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냐?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그러니 묻는다. “얘야!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될 네 삶의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
내가 자주 보는 아주 오래된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창조된 것은 ……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영신수련, 23번. 원리와 기초). 기독교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 따르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아쉬움이 묻어나는 유년시절을 보냈고, 또 지금 20대 중반에 끙끙대는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목적이 바로 “영혼 구원”이라는 의미다. 영혼 구원, 그게 바로 너와 나,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근원적인 “까닭”이다. 이 목적 하나에 온 우주와 천지 만물이 수고로이 운행을 한다. 이 목적 하나를 위해, 우리의 삶은 아주 치밀하게 계획되어 움직여 간다. 허투루 일어나는 일도 없고, 까닭 없이 만나게 되는 사람도 없다. 우연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러니 삶이란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소중하며 감탄에 마지않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대에 참 둔감하다. 삶에 말려들어가 둔감해 지는 것이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둔감한 우리들이 그나마 반응하게 되는 때가 언제일 것 같으냐? 그래. 아플 때다. 괴롭고 힘들어서 며칠씩 불면의 날을 지새울 때. 자기 스스로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을 때. 자기가 봐도 자기가 한심스러울 때야.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1599년의 문헌에도 이럴 때가 바로 하나님의 초대를 받고 있는 적절한 때라는 기록이 있다. 신앙심에 항상 자신이 없는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16세기에도 그랬다는 말을 들으면 좀 위로가 되지? 한번 직접 봐보자.
사람이 지금 그의 신원(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속내에 있는 고뇌나 밖으로부터 오는 괴로움 때문에, 말하자면 하는 일이 잘 안된다거나 친구들로부터의 업신여김, 또는 다른 비슷한 어려움 때문에 권할 수 있다. 때로는 사람이 나쁜 버릇이나 타락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알맞기도 하다. 특별히 하느님의 빛으로 비추어져서 그런 것을 알고 아파하고 고치기를 원할 때이다. 그 자신의 허약함을 바로 잡으려 할 때가 …… [영신수련을 하기에] 적절한 때이다.” - 영신수련 지침서, 정한채 역, 도서출판 이냐시오영성연구소, 15번.
바로 이때가, “내 삶의 까닭은 무엇인가?”를 물을 때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이다. 네가 이 “때”를 잘 살려가면, 너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될 것이야. 삶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영혼 구원”을 돕기 위해서고, 삶은 그렇게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단다.
삶이 “네 까닭은 무엇인가?”고 말을 걸어온 지금, 하늘이 가깝고 자기가 잘 보이는 좋은 곳에 머물고 있는 지금, 조용히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주렴. 언제든 들어줄게. 기다리마.
해'맑은우리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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