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식사는 잘 하셨는지요?
체중 감량해야 하는데 왕성한 식욕에 이끌려 오늘도 후회가 남는 식사를 하셨다구요? 요즘 밥맛이 통 없어서 모래알 씹듯 하시다구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서 오랜만에 유쾌하셨다구요? 비즈니스 때문에 먹는 밥이라 가시방석이었다구요? 애들 밥 챙기느라 먹은 건지 전쟁 치른 건지 모르겠다구요? 오늘 저녁은 뭘 해 먹나 벌써 고민이라구요?
하루 두세 번의 식사, 그리고 사이사이에 먹는 음료와 간식. 우리는 참 많이 먹고 마시고, 거기에 기울이는 시간과 에너지도 상당합니다. 이 ‘먹는 것’과 영성 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즘, 저는 ‘먹는 것’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느낌들, 특히 죄책감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과식했을 때, 주부로서 식사를 잘 챙기지 못했을 때, 재료 준비에서 나오는 쓰레기와 그냥 버려지는 음식물, 식사 때 오고가는 소리가 좋지 못했을 때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 버린 사람”처럼, “해야할 것”을 “다하지 못한 사람”처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고 무척 무겁고 불쾌해 집니다.
‘먹는 것’과 관련하여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도움을 받아 볼까 합니다. 《영신수련》에는 먹는 것이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그만큼 잘 준비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로 봅니다. 즉, 자기 욕구가 훈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핵심은 절제입니다. 절제를 통해 자기 몸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을 찾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즉 내면의 소리, 위로, 영감들을 잘 느낄 수 있게 깨어납니다. 무조건 정량적으로 줄이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정상 체중이나 감량 목표를 정해 놓고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자기 욕구에 충실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몸에 대한 두려움, 먹고 난 후에 따라오는 죄책감과 자기 만족이 교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절제는 하나님께 민감하고 민첩하기 위해서 자기 삶의 독특성에 근거한 자기에게 맞는 선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냐시오는 이것을 “먹는 방식에서나 양에서 스스로의 주인”(《영신수련》, 216)이 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즉, 먹는 일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어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일체의 자유로움을 의미합니다.
매일의 식사 때마다 《영신수련》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식사를 통해 하나님께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고, 그 가까워진 거리만큼 먹는 것에 대해서는 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먹는 일이 수행이라니! 얼마나 멋진 발상입니까!
이렇게 해 보세요.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생각하며, 그분이 어떻게 마시고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그분을 본받도록 힘쓴다.”(《영신수련》, 214) 이렇게도 해 보세요. “또한 식사를 하는 동안 다른 생각, 즉 성인들의 생애나 어떤 경건한 관상, 혹은 해야 할 어떤 영적인 일 등을 생각할 수도 있다.”(《영신수련》, 215) 많은 수도원에서 공동 식사 중에 영성 고전, 특히 《그리스도를 본받아》나 성경을 읽지요. 저는 글을 쓰는 지금도, 앞선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받은 충격이 생각납니다. 신앙생활을 해 왔던 그때까지, 예수님께서 저희처럼 식사를 하셨다는 것 자체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일상적인 예수님의 모습엔 관심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마 대다수의 신자들이 그럴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네 신앙생활이란 것이 일상의 삶과 괴리된 특수 교회 생활로 고립되어 늘 절름발이 같이 절룩거리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예수님의 일상이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하는 마음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우리 서로 ‘먹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아가기로 해요. 밥 짓고 상차리는 게 일인 사람으로서 밥 한 공기에 온 우주만물과 거기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내길 기도해 봅니다. 제가 차린 밥을 먹는 식구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더욱 깨쳐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제 식탁에 구원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는 주님을 초대하고 싶네요. 주님과 함께 밥을 먹으며 하고 픈 말이 참 많네요. 기도하러 가야 겠습니다.
이번 글은 식사의 신비로움을 예찬한 신학자 칼 라너의 말로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산 것으로 화함이요, 어떤 존재물을 그 본성은 지킨 채, 더 고차원적이고 더 포괄적인 다른 현실 안으로 포섭함이다. … 먹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인식을 통해 주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삼고 사랑을 통해 세계라는 전체에 자기를 내맡기는 과정의 가장 낮은,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해야 한다.” - 칼 라너(Karl Rahner), 《일상》 (분도출판사, 2003), 31-32.
/ 해'맑은우리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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