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기쁨과 위로를 발견하고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모든 창조된 것들, 창조된 것들로부터 오는 모든 위로들을 벗어버리십시오. 왜냐하면 진실로, 창조된 것들이 당신을 위로하는 한, 그리고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한, 그대는 결코 참된 위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을 위로할 수 없을 때에는, 진실로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로하시고, 기쁨이 되는 모든 것들이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 안에서 그대를 참으로 위로하게 됩니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c.1260-1327), Meister Eckhart: The Essential Sermons, Commentaries, Treatises, and Defense (Mahwah, NJ: Paulist, 1981), 220-21.
중세 도미니크회 수도자이자 철학자였던 에크하르트는 사람들이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매우 안타깝께 여겼다(209). 그런데 그는 이 세상에는 슬픔도 많지만,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들도 많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이들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소비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사람을 만나 노는 것으로, 다른 일이나 취미에 몰두하는 것으로, 지칠 때까지 운동하는 것으로 고통과 슬픔, 또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것들은 일시적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근심을 잠깐 잊게 할 수는 있어도 근원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한다. 그래서 에크하르는 고린도후서 1장 3절 1을 토대로, 우리 인간이 모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참된 위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참된 위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창조된 것들"로부터 오는 위로를 모두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만들어진 위로"에 조금이라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착용감이 좋은 신발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있거나 바닥에 못이 박혀 있다면, 그 착용감은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슷하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기쁨과 위로를 삼는다면, 그러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우리 맘에 넣어 두었다면, 또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일말의 여지와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위로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창조된 것들을 모두 미워하고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오래된 유머처럼 "지구를 떠나야"만 한다. 에크하르트는 신비가였지만, 비현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추구한다면, 오직 그분께서 주시는 위로만을 구한다면, 그 창조된 것들을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요즘 나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인가? 나는 그것들을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누리고 있는가?
지금은 칠 월이다. 학생들은 여름 방학을 맞이하고, 직장인들과 주부들은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한 해의 피로를 풀고 즐길 수 있는 여름 휴가를 계획하는 때이다. 만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그 휴가를 통해 누리게 될 '즐거움' 자체라면, 짧고 강렬한 기쁨은 얻을 수 있을지라도 참된 위로와 쉼을 누리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위로를 얻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통해서 주시는 깊은 위로와 벅찬 기쁨을 누리는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바람연필 권혁일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본문으로]
'한 줄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의 산을 부활의 터널로 (김금남) (0) | 2015.08.13 |
---|---|
바람 형제로 찬양 받으소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0) | 2015.07.29 |
믿음의 선조를 통한 분별 (요한 카시아누스) (0) | 2015.06.30 |
바라보며 살아가기 (0) | 2015.06.26 |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이 복음이다 (Lectio _ with Taize) (0) | 2015.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