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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학 논문

영적 분별이란 무엇인가 : 개념과 유형들

우리의 삶은 분별과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성경은 분별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서 자신들의 잘못된 욕망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여, 금지된 열매를 따먹는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수천 년 후 예수는 사탄의 유혹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했지만, 정확한 분별과 자기희생적 선택을 통해, 첫 남자와 여자의 실패로 죽음의 어둠 속에 빠진 인류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다. 그래서 분별과 선택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때로는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영적 분별 또는 식별(spiritual discernment)은 폭넓게 정의하면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들)이 체험한 어떤 영적 경험이나 현상, 또는 내면의 생각과 정서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선택을 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에 대한 실천과 가르침들을 하나의 정의로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 매우 다양한 상황 속에서 분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실천되는 만큼,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되는 영적 분별은 다양한 모습과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영적 분별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과 실천들을 각각 짝을 이루는 몇 가지 유형들로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미리 언급해야 할 것은 각각의 대극들은 상반된 특징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곧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한 형태의 영적 분별들에는 각각의 특징들이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1. 분별의 대상에 따라 : 영들을 분별함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시간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또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영적 경험이나 현상에 초점을 두는 유형과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이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자가 후자를 위한 과정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먼저, 첫 번째 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의 어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분별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동사 ‘discern’은 ‘다른 것으로부터 어떤 하나를 구별하다, 가려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 ‘discernere’[디스케르네레]에서 왔다. 그래서 어원적으로 분별이란 섞여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행위 또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면 섞여 있는 것들, 곧 분별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으로 영적 분별을 지칭하기 위해 ‘영분별’(discernment of spirits)[각주:1]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왔다는 점을 알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때의 분별의 대상은 영들(spirits)이다. 곧, 어떤 영적 경험, 현상, 생각 등을 일으키도록 영향을 주는 영적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언적 전통이 발전하면서 어떤 특정한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진리의 영으로부터 받은 것인지 거짓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분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구약성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으키실 선지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반드시 들어야 하지만,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고 가르친다(신 18:18-22). 이렇게 단순하게 말의 성취 여부로 그 메시지의 영적 출처를 분별하는 원칙은 신약 시대에 이르게 되면 보다 세밀하게 발전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할 것을 말하면서,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원리를 분별 기준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열매”라는 결과를 보고, 그 열매를 맺은 이가 “좋은 나무”(참 선지자)인지 “못된 나무”(거짓 선지자)인지를 분별한다는 원리는 모세가 제시한 원칙과 비슷하다. 그러나 열매의 유무가 아니라 질을 보고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분별한다는 점에서 분별의 기준이 보다 세밀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심화된 분별의 원리가 필요한 이유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는 설명한다(마 7:15-23). 비슷하게 사도 바울도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사탄의 일꾼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고 경고하는데 이 구절은 이후에 분별에 관한 문헌들에서 자주 인용된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요일 4:1-6). 그는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이미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와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하라”(δοκιμάζετε)[도키마제테]고 권고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제시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의 여부라는 점이다. 곧,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와의 논쟁 속에 있던 요한 공동체를 위해, 진리로 간주되는 교리를 예언자의 참됨과 거짓됨을 분별하는 시금석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영적 분별의 기준이 공인된 텍스트(성경)와 교회의 가르침(교리)에 부합해야 한다는, 최소한 그것들에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전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영분별에 대한 논의들의 바탕에는 인간 외부의 영적 존재들이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3세기 초의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c.184-c.254)는 『제일 원리에 대하여』(De Principiis)에서 이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사들) 또는 사탄(의 천사들)이 인간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게 하거나 유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 생각들을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서 외부에서 주입되는 생각들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일 원리』, 3.2.4). 

     또한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 360-435)는 『담화집』(Conferences)에서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을 그 기원과 원인과 저자를 추적함으로써” 현명하게 분별하고, 누가 그 생각을 제안했는지에 따라서 그 생각을 적절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구체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성령의 불로 정화된 것인지, 미신의 일부인지, 세속 철학의 교만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세히 조사하고 시험해야 한다고 말한다(『담화집』, 1.20.1-2).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영적 분별의 대상이 한 사람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실체들(선한 영 또는 악한 영)로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포함한 모든 요소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에 대해 체계적인 분별 원칙을 제공한 이는 16세기의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 1491-1556)다. 그는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말미에 두 가지 묶음의 식별 원칙들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첫 번째 묶음(313-327)은 수련의 첫째 주(단계)에 있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묶음(328-336)은 둘째 주(단계)에 있는 보다 진보한 수련자에게 적합한 규칙이다. 이냐시오는 내면의 움직임들을 크게 영적 위로(consolación)와 영적 실망(desolación)으로 분류하는데, 위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정서적 움직임을 말하고, 실망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정서적 움직임 지칭한다. 그는 첫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영적 실망 중에 있을 때에는 이미 내린 선택을 변경하지 말고, 인내 중에 위로를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반대로 영적 위로 중에 있을 때에는 교만하지 말고 실망이 올 때를 대비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둘째 주간을 위한 규칙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 위로 같으나 그 안에는 마귀의 속임수가 숨겨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 바탕은 물론 생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두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안내한다. 

     “참된 믿음은 대체로 거룩한 정서(affection) 안에 있다.”고 믿은 개신교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또한 인간 내면의 정서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을 경험한 그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각주:2] 그래서 그는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에서 인간 내면의 정서들이 성령의 체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믿을 만한 표지(reliable signs) 열두 가지와 믿을 수 없는 표지 열두 가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 철학자였던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 존재들보다는 정서 자체에 초점을 두고 상당히 이성적인 분별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적 분별에서 이성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이냐시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영적 분별의 두 번째 유형, 곧 미래의 선택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경우들을 살펴보자.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확인하기 위해 양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 그를 “큰 용사”라 부르시며, 그에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기드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여부를 확실히 분별하기 위해서 양털을 가지고 두 번이나 “시험”(האנ)[안세]했다(사 6:38). 이때 기드온이 사용한 히브리 단어 “נס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실 때(창 22:1), 그리고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할 때(왕상 10:1)와 같은 다양한 상황들에서 사용되는데,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드온의 이와 같은 실험은 자신의 내면의 생각이나 움직임보다는 외적인 표징이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시도하는 사례의 모델이 되었다.

     신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보다 분명한 표현이 등장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하라.”(롬 12:2).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δοκιμάζω”[도키마조]도 히브리어 “נסה”와 기본적으로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데, 위에서 사도 요한이 영들을 시험하라(요일4:1)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말한 분별의 대상은 영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당시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 세대”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의 몸, 곧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롬 12:1) 드릴 것이 요구되었다. 비슷하게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이 없기를 기도한다(빌 1:10).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려는 바람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지만, 특히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급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구체적인 길을 찾는 이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13세기 초 아씨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 c.1181-1226)가 회심 후 성 다미아노(San Damiano) 교회에서 드린 “십자가상 앞에서의 기도”(The Prayer before the Crucifix)는 그가 십자가 위의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 곧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집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분별력(discerning heart)을 구하는 청원이다. 

     앞서 언급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제시한 식별 규칙 또한 그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바른 선택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영신 수련』의 첫째 주를 시작하는 「원리와 기초」(23)에서 ‘질병과 건강’, ‘가난과 부’, ‘불명예와 명예’, ‘단명과 장수’ 중 어느 한 쪽을 더 원하지 않는 초연한 마음(indifference)을 가지는 것을 선택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셋째 주간의 말미에 「선택을 위한 길라잡이」(169-188)를 구체적으로 제공하는데, 우리가 창조된 목적,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수단을 선택해야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2. 분별의 주체에 따라 :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

다음으로 영적 분별을 행하는 주체에 따라 개인 분별과 공동체 분별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개인 분별은 말 그대로 한 개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영적인 경험이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특별히 4세기 이후 사막의 수도자들을 시작으로 흘러온 수도 전통은 개인적 차원의 분별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개인이 고립된 상태에서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교만이나 독선, 또는 뒤틀린 욕망이나 무지로 인해 분별에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담화집』, 2.5.1). 이런 점에서 영적 분별은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둠이 빛 아래에서 즉시 사라지는 것처럼, 악한 생각이 원로 앞에 드러나게 되면 그 즉시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자는 경험이 많고 덕이 높은 원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겸손히 고백하고 그의 조언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압바 모세(Moses)는 “참된 분별은 참된 겸손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담화집』, 2.10.1). 분별의 전제로 겸손과 순종을 강조한 것은 7세기의 수도자 요한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c.579-649)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수도승의 사다리』(Ladders of Divine Ascent)에서 ‘겸손’에서 ‘분별’이 나오고, ‘분별’에서 ‘통찰’이 나오며, ‘통찰’에서 ‘예지’가 나오는데, “이렇게 자신 앞에 예비된 복들을 보고서도 이 온당한 순종의 길을 따르지 않을 이가 누가 있느냐?”라고 묻는다(『사다리』, 4.105). 

     영적 분별이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영적 분별은 고립된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대일의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대다의 관계로 확장되면 개인적 분별이 확실히 공동체의 영역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오늘날 친우회(Quakers) 전통의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가 그렇다. 이 위원회는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분별하기 위해 공동체 내의 신뢰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꾸려진다. (또는 피정 중에는 제3자에 의해서 모임이 꾸려지기도 한다.)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는 이는 초점 인물(focus person)이 되고 그를 돕는 이들은 위원들이 된다. 이때 주의할 것은 위원들은 초점 인물이 분별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지,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리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명료화위원회는 분별 과정에서 공동체가 관여하기는 하지만, 분별의 주체가 개인이며, 분별의 대상도 개인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 분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공동체 분별은 공동체가 공동의 사안을 놓고 함께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성서의 여러 사례들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행해진 또는 행해져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로마의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할 때, 그는 확실히 공동체를 분별의 환경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신약학자 로버트 쥬엣(Robert Jewett)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분별의 주체가 “너희”라는 복수인 점과, “δοκιμάζειν”[도키마제인]이라는 동사가 보통 공적 영역에서 시험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초점은 공동으로 결정 내리는 것에 놓여 있다고 주석한다. 그에 의하면, “로마서의 경우, 분별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공동체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실천하기 원하시는 특정한 행동을 말한다.”[각주:3] 

     기독교 역사에서의 공동체 분별의 예를 들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냐시오와 여섯 명의 그의 동료들은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정말 하나의 수도회로 결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기도하고, 대화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낮에는 일상적인 사역을 행하고, 밤에는 모여 함께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것은 공동체 분별의 좋은 모델을 제공해 준다. 더불어 친우회에서 공동체의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월회(monthly meeting) 중에 대화와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 또한 공동체 분별의 좋은 사례다. 이들은 의견의 불일치가 있으면 침묵 가운데 내면의 신성한 빛을 관조하고, 만장일치를 이룰 때까지 수년이 걸리더라도 결정을 보류한다.


3. 기타 :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그리고 오늘날의 경향

마이클 벅클리(Michael J. Buckley)는 분별력의 출처에 따라 다음의 네 가지 유형을 구별한다. (1) 성령에 의해 부여된 은사, (2)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타고난 감각, (3)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 (4) 이 세 가지의 혼합.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첫 번째 출처, 곧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현대로 올수록 세 번째 출처, 곧 학습과 훈련을 강조한다.[각주:4] 

     (1)과 (2)의 경우에는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이들, 또는 분별 감각을 타고난 이들에게로 제한되지만, (3)에서는 예언자와 같은 신적 매개자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영적 지도자 또는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영적 분별을 행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소명의 발견과 같은 인생의 굵직굵직한 순간들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도록(갈 5:16-24) 장려한다. 『영적 분별의 길』(The Way of Discernment)의 저자 엘리자베스 리버트(Elizabeth Liebert)는 “분별은 하나님이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고, 또 우리를 개인과 공동체로 부르시는 지를 의도적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게 된다.”라고 정의하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지속적인 과정을 강조한다.[각주:5] 이 책에서 그녀는 이성뿐만이 아니라, 기억, 통찰, 몸, 상상력, 감성, 자연 등을 활용한 다양한 분별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오늘날 증대되는 사회적 의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시대적 차원에서 분별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이천여 년 전,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이(눅 12:5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것”으로 다시 강조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사회적 차원의 분별(social discernment)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취해야할 행동과 실천을 분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나 문화 속에 내재된 불의나 부정 등을 분별함으로써 변혁을 추구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는다.  


     지금까지 기독교 전통에서의 다양한 영적 분별의 개념과 유형들의 윤곽을 개략적으로 그려보았다. 분명한 것은 이 오래된 영적 훈련 또는 실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에 도움이 될 뿐만이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들, 곧 그들이 분별에서 실패하거나 성공한 이야기들과 값진 조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소중한 과정으로 매순간 우리를 초대하고 있으실 뿐만 아니라, 안개로 뒤덮인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안내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우리가 그 온당한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 바람연필 권혁일


참고문헌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2-185.

리버트, 엘리자베스.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 서울: 좋은씨앗, 2011.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이 글은 '디바인영성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영성을 살다」 (통권7호, 2017년 상반기), 26-35쪽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 용어는 헬라어 ‘διακρίσεις πνευμάτων’[디아크리세이스 프뉴마톤], 라틴어 ‘discretio spirituum’[디스크레시오 스피리툼]을 번역한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2. 권철우,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목회와신학」 318 (2015년 12월), 183. [본문으로]
  3.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Hermeneia-A Critical and Historical Commentary on the Bible (Minneapolis, MN: Fortress, 2007), 733-734. [본문으로]
  4.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s.v. “Discernment of Spirits.” [본문으로]
  5. 엘리자베스 리버트, 『영적 분별의 길: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결정 내리기』, 이강학 역(서울: 좋은씨앗, 2011), 4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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