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보편적인 원칙, 즉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28), 《조지 폭스의 일기》의 서문에서 발췌.
퀘이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보기(See) 위해 참여(Participate)한 것이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교회와 사회가 어지럽고, 구도자들이 성직자들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떤 영적인 위안과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지폭스의 신앙의 여정은 당시의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극단적인 모습의 퀘이커, 혹은 친우회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라고 불리는 신앙운동, 신앙공동체를 일어나게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침묵을 강조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영감이 일어날 때 전신이 떨렸다고 해서 퀘이커, 즉 진동하는 자로 불리웠다.
목회를 하며, 또한 영성을 공부하는 한국 개신교 목사로서 그들의 모습은 내가 익숙하고 자라왔던 신앙의 환경의 가장 맞은 편에 서 있는 듯하다. 목사로서 성도들을 양육하며 훈련시킬 때에 그들을 독립적인 신앙인으로 서게 했는가? 아니면 점점 더 무엇엔가 의존하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 자유를 느끼게 했는가? 아니면 두려움을 심어주어 자유로부터의 도피하게 만들었는가? 스스로 반성해 본다.
가톨릭의 타락이 심했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과 우리를 중보하는 통로는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성경 뿐임을 외치며 믿는 모든 자가 제사장이라하며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일어나게 했지만, 다시 목사는 교황의 자리에,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통로가 아닌 장벽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퀘이커는 어쩌면 잘못되어져 버린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 만들어낸 급진적인 '이단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 그들의 예배, 그들의 기도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2012년을 지나가며 여러 가지 사회적인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교회에 주는 메시지가 참 많다. /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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