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6. 29. 14:59

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옷장을 통해 나니아에 오게된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마치 꿈속에서 뭔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뜻은 잘 모르면서도, 그러나 너무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말, 그 말 때문에 그 꿈 전체가 좋은 꿈이 되기도 하고 악몽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말,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꿈속에서.  


사람은 왜 꿈을 꿀까요? 그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워하는 이는 꿈을 꾸지요. 사실, 종교나 예술은 인류가 꿔온 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운 것이 있기에 꾸게 된 꿈들, 보고 싶은 것이 있기에 그려본 것들 말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인류가 꾸어온 '좋은 꿈'이라고 했습니다. 꿈이지만 뭔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꿈 말입니다. 가령,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弘益人間)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왔다는 그런 신화들 말입니다. 신화는 물론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보다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신화는 힘이 셉니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쁨”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신화 읽기를 즐겼습니다. 신화에 담긴, 신화가 일으키는 어떤 그리움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읽을 때 종종 자신을 찾아와 압도하곤 하던 그리움을 일컬어 "기쁨"(Jo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가 말하는 "기쁨"은 사실,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누리는(enjoy) 무엇이라기보다는 겪는(suffer) 무엇이었습니다. 영혼을 압도해 오는 어떤 허기, 어떤 갈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은 이 세상 그 어떤 배부름이나 만족보다도 우리 영혼을 매료시킵니다. 사정없이 영혼을 후벼 파는 허기요 갈증이지만, 우리 영혼은 이 허기, 이 갈증을 몰랐던 때로 결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을 모르고 사느니, 이 허기, 이 갈증을 껴안고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봄을 좋아하시나요?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봄을 '누린다'기 보다는 봄을 '겪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루이스의 말을 풀이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그저 봄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샤워'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온통 '물들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을 '입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니까 울긋불긋한 옷이라도 차려 입고서 봄나들이를 가는 것인가 봅니다.) 보면, 어른들은 그렇게 봄 구경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지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애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 마냥 봄인데 / 보일 리가 있나요. " ("봄, 교실에서" 고준식) 


네, 어른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들의 내면은 을씨년스럽기 때문입니다.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봄의 수혈이 필요한 것이지요. 봄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 안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 잠기고, 그것을 흡입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봄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봄을 앓습니다. 봄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우리말 ‘아름답다’는 말은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리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그리움, ‘아름다움의 바다’인 하늘을 그리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이라는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이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우리를 정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슬란, 봄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니아에서 아슬란은 봄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아니, 아슬란 자체가 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슬란이 오는 것이 곧 봄이 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루시를 비롯해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옷장을 통해 들어가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땅에서 하얀 마녀에게 영혼을 팔아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버 씨 부부를 통해 예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아슬란이 오실 때 악이 바로 잡히리라. 

그의 우렁찬 포효에 슬픔이 사라지고,

그가 이를 드러낼 때에 겨울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갈기를 흔들 때에 봄은 다시 찾아오리라.“


뭔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나요? ‘꿈’ 속에서 뭔가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꾸게 되는 꿈속에서. 



이종태 <빛과 소금> 2020. 5월호



(이미지 출처: https://bit.ly/2BjaxmF )


posted by 산처럼

사악한 생각을 태우소서

한 줄 묵상 2014. 11. 16. 15:57

어떤 형제가 한 운둔자를 찾아와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생각이 저를 너무도 괴롭힙니다.”

은둔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가공할 무기,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던져버리고, 대신에 갈대로 만든 막대기, 곧 사악한 생각을 손에 쥐고 있구려. 다시 불을 움켜쥐시오. 불을, 가공할 무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움켜쥐시오. 그러면 사악한 생각들이 접근할 때에 마치 불이 갈대를 사르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것들을 온통 파괴할 것이오. 악한 생각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압도할 수 없소이다.”  

- 사막 교부들 지음, 배응준 옮김, 《깨달음》, (서울: 규장, 2006), 88-89.


꿈에서 이 분이 등장한 게 벌써 세 번째이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내 꿈에 등장하시는 분도 드물다. 현실에서는 교제할 수 없고, 소통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는 분이지만, 다행스러운 건 꿈에서 이 분과 유익하고 좋은 교제의 시간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나 융의 이론에 따르면, 꿈은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 그대로 적용해서 해석하자면, 그 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소통하고 대화하고 싶은 내 기대감과 갈망이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고 단절을 느끼기에 꿈에서라도 내 무너진 욕망이 위로와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 꿈을 통해 내 안의 관계와 소통에 대한 갈망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갈망의 기저에 더 깊은 열망(desire)이 있는지 성찰해 본다. 인간에게 관계는 본능적인 갈망이기도 하지만 이 갈망이 얼만큼 순수한 것인지는 오직 내 자신 스스로만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분과의 관계를 복원한 뒤에 내가 얻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은가? 그 분의 명성과 사회적 위치를 통해 내가 덕보려고 하는 의도는 없을까? 우리 사회에서 관계는 재산이라고 하는데, 내 기대치는 혹시 내 재산을 더 늘리고 싶은 욕심인가?

사막의 은둔자는 내 영혼을 해부해 보길 원한다. 내 욕망과 갈망, 기대감의 기저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는지! 삶과 인생의 주권자를 하나님으로 말로는 선포하면서, 일상 속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지는 않는가! 

“주여, 성령의 불을 드소서. 거짓되고 허망한 욕망의 갈대는 불사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주소서!" / 이주형


posted by 구름위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