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투더클래식 서문 :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백투더클래식 2015.07.06 19:48

《백 투 더 클래식: 영성 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이 책은 말 그대로 '공동의 열매'이다. 글의 착상 단계부터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아홉 명의 필자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주로 '구글 문서(google docs)'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협업이 이루어졌지만, 필요하면 전화 통화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모두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2년 동안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영적 여정을 함께 걸었다. 저자 중 한 분의 표현대로,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책에 실린 편집자 서문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이 서문은 온라인 서점의 '미리보기' 메뉴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인쇄된 책에서는 의도치 않게 원고에 있던 각주 두 개가 빠졌는데 아래에는 다시 달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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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날씨로 비유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의 모래바람에 상상력과 경이가 메말라가는 건조한 날씨가 아닐까? 마치 현대 도시에서 동물들은 주위에서 사라져가고 동물원 우리 속에 격리되는 것처럼, 오늘날 상상력은 《해리 포터(Harry Potter)》와 같은 판타지 소설이나 〈겨울왕국(Frozen)〉과 같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 속에 가두어져 버린 듯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아이들도 ‘공주 드레스’나 ‘파워레인저 가면’을 벗을 나이가 되면, ‘유치한’ 상상력도 함께 벗어 버리고 과학적 사고라는 안경을 낀 건조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은 그 현존이 점점 엷게 인식되어지고, 대신 이해하기 힘든 교리를 통해 이론적으로나 접할 수 있는 분으로 제한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 영성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이성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불경한’ 그러나 용기 있는 행동이다. 

     저명한 영성학자 아서 홀더(Arthur G. Holder)에 의하면 ‘영성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세대의 독자들의 삶에 깊은 변화를 일으킨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글”이다.[각주:1] 가장 1차적인 기독교 영성 고전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이다. 그런데 성서는 굳이 영성 고전으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성 고전이라고 할 때에는 성서 시대 이후 기록되어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으며 꾸준히 읽히는 작품들을 말한다. 물론 어떤 특정한 텍스트가 영성 고전의 범주에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보통 이 범주에 포함되는 글들은 저자들이 삶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영적 진리와 경험을 담고 있다. 그래서 독자가 글을 통해 저자들이 전하는 지혜와 경험에 접촉하게 되면, 그것들은 더 이상 종이 위의 문자로 존재하지 않고 독자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살아난다. 마치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새벽 출정호의 항해》 에서 에드먼드와 루시가 벽에 걸린 바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액자에서 바닷물이 쏟아져 나와 조그만 방이 나니아의 세계로 변하는 것처럼, 영성 고전에 담긴 지혜와 경험은 독자의 현실로 쏟아져 나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신비로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이처럼 영성 고전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현재적인 영적 경험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기도 하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영적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항상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주목받는 일본의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佐々木中)는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내면에서는 변화에 저항하는 “방어기제”가 자연스럽게 작동하여 독자로 하여금 책이 어렵고 무료하다고 느끼게 하거나 감동받은 내용도 쉽게 잊게 만든다고 지적한다.[각주:2] 특히 대부분의 영성 고전 작품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시대와 장소와 문화 속에서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기에 “방어기제”가 작동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 책의 필자들은 기독교 영성학(Christian Spirituality)을 전공하며 읽고 배운 고전 작품들을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2012년부터 팀블로그(spirituality.co.kr)를 중심으로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을 시작하였다. ‘산 책(living books)’을 ‘길’로 삼아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자는 의미이다. 아직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학위 과정 중에 있는 학생의 신분이라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블루아의 피터(Peter of Blois, c.1130–c.1203)의 말처럼 독자들과 함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이 되어 비록 “우리의 소견은 일천(日淺)할지라도, 영적 거장들의 어깨 위에 선 덕분에 우리는 그분들보다 더 높은 식견을 가지고, 바른 신앙의 길을 전망할 수 있게”[각주:3] 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들을 독자들 앞에 내어 놓는다. 

     이 책의 아홉 명의 필자들은 고전 작품과 저자를 선정할 때에 가능한 한 다양한 시대와 전통을 아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많지는 않지만 여성 신비가들과 한국 저자들, 평신도들의 작품들도 포함함으로써 ‘서구’, ‘남성’, ‘성직자’들의 작품에 경도되지 않고 영성 고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여기에 실린 스물세 편의 에세이들은 2013년과 2014년에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상황》의 ‘백투더클래식’이라는 꼭지에 연재된 글들이다. 원래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고전 작품과 현대의 이슈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이며, 또한 시사 주제를 다루는 월간지의 특성상 이 책에 실린 글들에는 잡지에 게재될 당시 유행한 영화, 게임, TV 프로그램, 또는 사회적 이슈 등에 대한 언급들이 의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이 에세이들을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고전의 본질적인 특징, 곧 시간을 초월하는 항구성과 장소를 넘어서는 보편성 때문이다. 영성 고전에서 얻은 지혜로 현대의 교회와 사회를 진단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글들은 독자들에게 이 책에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현대 이슈들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독자들의 형편이 되는대로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을 교회나 공동체의 소그룹 멤버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복음과상황》에 게재된 글에서 제목과 잘못된 정보들을 일부 수정한 것들이다. 그리고 글의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묶고 순서를 새롭게 배열하였다. 먼저 제1부 “신비와 경이”에서는 온 우주는 물론 우리의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비’ 또는 ‘경이(wonder)’와의 만남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신비’라고 하면 비현실적이고 미신적인 어떤 기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때로는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끊임없이 여행하는 신비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신랑으로, 어머니로, 또는 연인으로 경험되기도 하는데 이 경험의 중심에는 믿음과 사랑이 놓여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이며, 사랑만큼 놀라운 신비가 없다. 이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면학심, 곧 “별을 노래하는 마음”[각주:4]을 품어야 하며, 우리의 영적 감각이 훈련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제2부 “훈련과 형성”에서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성은 무엇이며, 그러한 영성으로 형성되기 위한 영적 훈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들을 모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소비주의 사회의 뿌리에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존재한다. 욕망은 거짓 자아의 가면을 만들기도 하고, “강철 우리”와 같은 사회구조, 의식, 습관을 만들기도 해서 그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생각과 삶을 구속한다. 변화는 “자기 사랑의 우리”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회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의존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사막’으로 떠나는 급진적인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성자 프란치스코는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고상한 욕망을 가졌던 그의 발자취는 우리를 청빈과 섬김의 삶으로 초청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영적 규칙을 공유하는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때로는 타락한 제도권 교회 밖에서 길을 찾은 이들도 있지만, 이들 옆에는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3부 “이웃과 정의”에서는 영성의 사회적 측면과 관련된 글들을 모았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영성이 한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초월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오해가 편만하다. 그러나 영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에 동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공공의 부를 공평하게 나눠가지지 않고, 다른 이들이 가난으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방치한다면 도적질과 살인을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교클럽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구원의 복된 소식은 소유와 배움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이들에게 흘러가야 한다. ‘순수 기독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불의에 분노해야 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도록 분투한 예언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만물에 깃든 생명력을 통해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 생태계가 회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돌아보면 이 책은 〈산책길〉 팀블로그에 게재된 이종태 목사님의 “큐리오시티”라는 글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을 《복음과상황》의 옥명호 편집장님이 읽고, 신생 단체인 〈산책길〉에게 소중한 잡지의 지면을 내어 주셨다. 지난 2년 동안 원고를 깔끔하게 편집해서 인쇄해 주신 《복음과상황》 편집부 식구들께 필자들의 마음을 모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어려운 기독교 출판 여건 속에서도 무명의 필자들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어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도서출판 예수전도단과 홍지욱 팀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학당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팀블로그 댓글과 SNS 등을 통해서 응원해주신 독자들은 이 책의 숨의 공로자들이며 〈산책길〉의 소중한 길벗들이다. 독자들께서 책을 읽다가 발견하는 부족한 부분들을 일깨워 주신다면, 다음 글을 위한 귀중한 밑거름으로 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들이 바쁜 학업과 목회 가운데서도 〈산책길〉 활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나아가 글을 챙겨 읽고 조언해 주신 필자들의 아내들께도 진심 어린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2015년 5월

저자들을 대신하여

권혁일


백투더 클래식 Back to the Classics

저자
권혁일 지음
출판사
예수전도단 | 2015-06-29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기독교 영성 고전(Christian spiritual class...
가격비교


  1. Arthur Holder, ed.,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New York: Routledge, 2010), xiv. [본문으로]
  2.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서울: 자음과 모음, 2012), 40. [본문으로]
  3. 남기정, 책 139-140쪽. [본문으로]
  4. 이종태, 책 27쪽.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백투더클래식 2013.12.02 11:18
  • 좋은내용감사합니다.우리안에참자유가넘쳐흐르길원합니다.믿음.소망.사랑우리안에그래도중요한건끝까지있을사랑이아닌가싶습니다.독일이란나라에서참으로신성한개혁을주신성직자분들께감사함을느끼게합니다^♥^

    BlogIcon cu 2014.05.16 22:30
  •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4.05.17 10:00 신고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여러분은 한 백화점에서 손님이 가져온 쓰레기를 고급 의류나 최신 모델의 전자제품과 맞바꿔 준다고 하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악취가 코를 찌르고 더러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값진 물건들과 바꿔 준다니요!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나는 맞바꿈’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정말 유명해서 긴 말이 필요 없는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지요. 그런데 그가 1517년에 처음 교회 개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가톨릭교회와 갈라서서 새로운 종파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를 원했지요. 그는 개혁자였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바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1520)라는 편지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글이 바로 이번 호의 ‘백투더클래식’에서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하는 영성 고전입니다.


       이 글은 루터의 개혁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3대 논문 중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매우 중요하고 뛰어난 글입니다. 그는 이 글을 라틴어와 독일어 두 가지 언어로 썼는데, 먼저 라틴어본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글에서 가능한 논쟁은 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서 영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리고 독일어본은 라틴어본을 번역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독일의 교육 수준이 낮은 평신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라틴어본이 좀 더 정교하고 분량도 많지만, 독일어본은 중세 후기의 영적 활기를 간직한 토착어로 쓰여진 문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 고전 작품의 영적 활기가 잘 나타나는 구절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믿음,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


믿음은 영혼에게 참 많은 것을 부여해서, 영혼이 신성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도록 합니다. ……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영혼을 신부로서 그녀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이 결혼 후에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혼이 한 몸이 됩니다”(엡5:30).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I. 12.[각주:1]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교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영혼이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결혼반지”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랑과 신부의 하나됨으로 이해한 경우는 루터 이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바울의 글에 그러한 이해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 교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남녀 사이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를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와 영혼의 연합을 ‘영적 결혼’의 모델을 사용해서 설명하였습니다. 


1520년에 출간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속표지

     그런데 이 ‘결혼’에 있어서 믿음이 결혼반지, 또는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작용한다는 루터의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 결혼은 모든 결혼 중에 가장 완전한 결혼이며, 이 연합이야 말로 믿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의 주장, 곧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전의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절연하고 이성 위주의 ‘합리적’ ― 그러나 사실은 ‘메마른’ ― 개신교 전통을 세운 것이라는 견해는 오해입니다. 그보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자였던 루터가 기독교 전통 가운데 전해져 오는 신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신앙고백적 명제들을 ―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시다”와 같은 문장들을 ― 이성을 통해서 진실로 인정하고, 감정으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 이상입니다. 루터가 말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실존적으로 진흙탕과 같은 죄의 감옥을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은혜 가운데에서 합당하게 되어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신비와 만나서 하나가 되게 하는 접촉점입니다. 


여기에서 루터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가톨릭 수도승이자 영성 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이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머튼은 그의 책 《새로운 관상의 씨앗들(New Seeds of Contemplation)》에서 ‘관상(contemplation)’의 시작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관상이란 하나님과 영혼이 기도와 활동 가운데 일치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곧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하나님과의 연합도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관상가가 될 수 없으며, 반대로 믿음이 깊어지면 하나님과의 일치도 깊어진다는 것이 머튼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은 “지성적인 동의(intellectual assent)” 그 이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접촉을 갖게 하는 단 하나의 길(the way)”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를 대표하는 16세기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가 토마스 머튼이 믿음에 대하여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신나는 맞바꿈


그러면 영혼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 곧 연합을 이루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제 이 글의 제목인 ‘신나는 맞바꿈’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읽을 때입니다.


이렇게 [영혼과 그리스도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좋든지 싫든지 간에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믿는 영혼 그 자신의 것이 되고, 그 영혼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는 모든 소유들과 복들이 속해 있는데, 이제 그것들은 그 영혼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에게 지워져 있던 모든 악들과 죄가 이제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der fröhliche Wechsel und Streit)가 시작됩니다. (I. 12.)


결혼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는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우리의 모든 약함, 죄, 슬픔, 좌절, 고통, 정죄, 죽음을 가져가셔서 당신께서 그것을 모두 담당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생명, 기쁨, 위로, 은혜, 승리와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엿장수에게 빈 병을 가져다주고 달콤한 엿을 바꾸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교환입니다. 악취로 가득한 쓰레기를 최고급 의류나 전자제품과 맞바꾸는 것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 루터의 확신입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의 밑바탕에는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씨름하다가 믿음을 통해서 자유를 경험한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깔려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설적인 자유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와 같이 믿음을 통해서 시작되는 ‘신나는 맞바꿈’이 가져다주는 혜택입니다. 우리를 끈질기게 옭아매는 죄의 감옥으로부터의 놓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서 연합한 신자들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무엇에도, 누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자유를 우리의 게으름이나 악행에 대한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금식과 같은 육체적 훈련을 하지 않거나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오히려 참된 자유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종으로서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섬김의 수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은 매우 높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 아버지는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자신의 소유들을 나에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아주 기뻐하실 일들을 자유롭게, 기쁘게, 그리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웃들과 관련하여서는 내가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되셨던 바로 그 방식으로, 곧 내가 볼 때 내 이웃들에게 필요하고, 유용하며, 복된 것이라 여겨지는 것만을 행하겠다. 왜냐하면 난 믿음을 통해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Ⅲ. 27.)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은 이제 이웃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던 그 방식으로, 나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행은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삶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르틴 루터가 믿음을 강조하여 선행의 중요성을 축소시켰고, 그래서 현재 개신교회가 말만 많이 하고 행함이 부족하다는 변명은 그 정당성을 상실합니다. 오히려 루터는 당시 중세 교회에서 개인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선행을 건져 올려,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살아가는 높은 수준의 삶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부패와 악행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가 추앙하는 종교개혁자가 말한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구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투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죄와 탐욕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바른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기도 가운데,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와 접촉하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신나는 맞바꿈’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글을 다시 떠올려 보면 루터는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가 시작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아무리 바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삶에서 죄의식, 우울, 슬픔, 두려움, 분노, 좌절 등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나는 맞바꿈’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나는 맞바꿈’은 “분투”이며(I. 12), 믿음은 “항상 증가되어야” 합니다(Ⅲ. 27).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저희에게 굳건하고, 즐겁고, 감사로 가득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 마르틴 루터, Luther’s Prayers (Minneapolis, MN: Augsburg, 1994), 85.


권혁일 / 미국 버클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 (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다. 영성과 문학, 영성과 사회정의, 수도원 영성과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다. Flowers of Contemplation: Peace and Social Justice를 지었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서》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3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곳과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독일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본은 참조하여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풀어내었습니다만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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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 (노리치의 줄리안)

한 줄 묵상 2013.07.15 11:45

그리고 나서 나는 (마음의 눈으로) 한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는데, 그 비전에서 나는 그분께서 만물 안에 계신 것을 보았다......만사는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죄는 없다......(따라서) 죄란 그저 없는 일이다(sin is no deed). 


노리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 1342 – c.1420),《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11.


'계시' 중에 줄리안은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I saw God in a point"). 

줄리안이 보니, 모든 것에 하나님이 계셨고("He is in all things"),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there is no doer but He"). 


'궁극적 실재'를 일견하게 된 줄리안은, 그 순간, 말이 안 되는 말을 한마디 한다: "죄/악은 없다." Sin is no deed. 


말이 되는가?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이 죄와 악이건만. 

말(logic)이 되지 않는 말이다. 

'말씀'을 만나 놀라 자빠진 말(theo-logic)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신비를 만난 영성가들의 말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꼬리를 잡는 식으로는 캐치할 수 없다. 

죄/악은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 것(no-thing)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every-thing)은 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좋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악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은 '선의 부재'일 뿐이라고 말했던 어거스틴처럼, 줄리안도, 죄라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헛' 일(no deed)일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는 '일'이 못된다. 죄는 '짓'일 뿐이다. 헛짓. 


죄악 천지인 세상을 살았으면서, 죄와 악을 마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던 그들 영성가들은 분명 우리와 다른 세상을 보고 살았던 것 같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다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속에 숨겨져 있으며, 믿음이란 바로 그 다른 세상--"하나님 나라"--을 보는 눈이라고 가르쳤다. 


우리에게도 그 눈이 있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눈이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이 죄악 세상에 찌든 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벌써부터 그 안에 들어가 뛰노는 어린아이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들--짓들!--에 기가 죽고 의가 꺾이고 풀이 죽기 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살리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하고 계신 일--"새창조"의 일!--을 찬양하고 그 일에 동참하는 영광과 기쁨에, 세상 사람들 눈에 마치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그 눈이 있는가? 그 믿음이 있는가?  / 이종태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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