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신랑)는 신부의 기도와 유혹, 즉 설교자의 유방을 밀쳐버리지 않는다. 그는 인자하게 신부를 집 안으로 인도한다. 마지막으로, 종종 멀리 떠나 신부가 찾아다니게 하거나 신부로부터 입맞춰달라는 부탁을 받곧 했던 신랑은, 신부의 감정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본다 (아 2:9). (이렇게 해서) 신랑은 완전히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신부를 불러 자기에게 오게 하여 서로 즐겁게 대화하며 뜨거운 사랑의 번제를 교환할 수 있게 된다 (시편 118편 주해).
밀란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of Milan, c. 340~397), Expositio Psalmi CXVIII, M. Petschenig 편집, CSEL 62. 5 (Vienna: Tempsky-Freytag, 1913), Bernard McGinn, The Foundations of Mysticism: Origins to the Fifth Century (New York: Crossroad, 2004), 325에서 재인용.
요즘 기독출판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책이 있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차정식 지음, 꽃자리 출판)은 교회에서 금기시 되어온 성의 이야기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온 신선한 면도 있지만, 성서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성의 관점으로 풀어낸 그만의 통찰을 볼 수 있는 다부진 책이다. 특히 그의 책은 말과 글에 익숙한 '계몽주의 키즈'들을 좀 더 감각적인 글 읽기, 좀 더 참여적인 사색의 공간으로 불러내어 - 성을 소재로 - 하나님과의 연합을 경험하게 한다. 사실 이런 성의 대한 이야기는 고대 교부들의 중요한 고민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이다. 그는 하나님을 동경하는 갈망에 대해서 어떤 신비주의자보다 더 자주 언급했지만, 하나님과 영혼의 만남을 묘사하기 위하여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성적 표현의 사용은 피했다. 심지어 성을 하나님과의 사이를 '교란시키는 영구한 대적'으로 금기시하기도 하였다(Peter Brown, Body and Society, 419).
그러나 그의 스승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n, 또는 Aurelius Ambrosius)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그는 성에 대한 과감한 표현을 서슴치 않고 사용한다. "신부를 불러 자기에게 오게 하여 서로 즐겁게 대화하며 뜨거운 사랑의 번제를 교환할 수 있게 된다." 그의 관심은 성적 표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하지 않는 순결한 몸의 회복이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임을 말하는 것이다. 버나드 맥긴은 암브로시우스의 표현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한 몸과 접촉함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으며, 마지막 날에 변화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The Foundations of Mysticism, 328). 이렇듯 고대 신비주의의 힘은 순결한 신부(인간)와 거룩한 신랑(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에로틱하게 표현한데서 오는 감각적이며 체험적인 하나님 경험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교회의 신앙은 고대 그리고 중세의 체험적이며 살아있는 경험의 신앙유산을 말과 글의 딱딱한 관념으로 가둬놓지는 않았는지 반추해보게 된다. 그것은 지존자와의 만남, 절대자와의 만남은 말과 글로 표현될 수 없는 각 개인의 참여와 체험을 통해 얻는 살아있는 경험의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임재를 관념과 통념 속에서만 만나고 있지는 않는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가족과 갈등하고 해결하면서, 현실 정치를 위한 촛불을 높이 들면서 만나는 '하나님 체험'을 잊은 채 말이다. 나무잎사귀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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