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이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교회는 나에게 스캔들이었습니다 …… 그러나 교회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 <<Long Loneliness>>, 149-150.
몇몇 교회 목사님들이 교회에 모여 고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예배를 드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사진을 보니 십자가가 있어야 할 강대상에는 십자가 대신 고인의 영정이 꽃장식이 되어서 걸려 있었다. 그가 기독교인이었던가? 그래서 고인의 신앙을 추모라도 하는 것일까? 기사를 읽어보니 그가 기독교에 공헌을 해서 추모를 하였댄다. 그 공헌이라는 것이 구국기도회를 만들어 참여했다는 것, 재정적으로 지원한 적이 있다는 것...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수치로 남아있는 정권을 옹호하고 축복을 남발하게 한 교회의 수치스러운 역사가 그에게 '공헌'이라는 말로 덧붙여졌다. 그렇게 추도하는 분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아도 교회에 헌금하고, 몇가지 공헌을 하면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 분이 천국시민임을 믿고 추모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자의 추모예배를 십자가를 치우고 예베를 드릴 만큼 간절하고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일까? 예배를 주관한 사람들은 나와는 너무도, 너무도 다른 생각들을 하는 듯하다. 그러한 사람들이 뚝 하고 버티고 서 있는 교회에 내가 같은 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들과 같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우연찮게 읽었던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에 대한 신문기사에서 미국에도 한때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과 유사한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에 돌입하면서 미국에서는 노동조합과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McCarthyism). 추기경까지 나서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비판하는 성명을 내어 신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을 대신하게 하였다. 도로시 데이는 용감하게도 노동자들과 함께 호화로운 추기경의 사저 앞에서 시위에 참여하며 그들의 편에 섰다. 교회로부터 수많은 경고와 질책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묵묵히 저항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교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있는 그녀의 말은 그렇기 때문에 더 진정성있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에게 있어서 교회는 제도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였다. 그녀는 교회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사랑했기에 저항하였다. /소리벼리(정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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