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실천적인 지식, 즉 행동하는 지식이 있는데, 그 지식은 도덕적 행위를 교정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두 번째로는 이론적인 지식이 있는데 이 지식은 신성한 것들을 관상하고 성경의 가장 거룩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 존 카시안(John Cassian, 360-435), 《담화집》Conferences, 14.1
존 카시안은 수도자들을 지도했던 스승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이집트로 다니며 수도생활을 체험하고 유럽에 수도원을 소개했던 인물이다. 수도원의 삶과 영성을 가장 잘 담고 있는 베네딕트의 규칙 (Rule of St. Benedict)은 카시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시안의 영성의 과제는 삶의 실천과 기도(관상)의 삶의 균형과 조화였다. 그에게 균형잡힌 영적 삶은 나아가는 것(실천)과 들어오는 것(기도)의 싸이클이다. 그에게 있어 행동의 삶과 기도의 삶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었다. 많은 기독인들이 방문하고 있는 예수원 입구에 써 있다고 하는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곧 노동이다"는 말의 기원은 어쩌면 카시안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삶이 실천되지 않는 기도는 결국 중언부언과도 같은 것이듯 기도 없는 실천은 방향을 잃은 열정일 따름일 것이다. 카시안의 시각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열매로서의 실천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서 카시안은 영성 생활의 시작을 행동의 세계, 실천의 영성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행동은 더 깊은 기도, 더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한 시작점이다.
사순절,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의 시작을 알릴 수 있는 내 삶의 행동은 무엇일까, 구체적인 사순절의 행동은 무엇일까? 카시안의 영성은 기도에 앞서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정승구
- 카시안은 어거스틴과 동시대 인물로 처음에는 친구로서 함께 신앙을 나누었지만 점차 신앙적 노선을 달리해서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 원수가 되었고 결국 화해하지 못한 채 삶을 마쳤다. 예정과 자유의지사이의 긴장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전적인 은혜와 예정을 강조한 반면 카시안은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도성을 강조했다면 카시안은 하나님의 주도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반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대립은 기독교 역사상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가톨릭과 개신교,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리적, 신학적 차이의 시발점일 수도 있다. 한 시대를 함께했던 두 명의 영적 거장이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것은 유감이다. 이런 교리적 차이, 시각의 차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넘어서는 일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일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한 줄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총의 징표 (귀고 2세) (1) | 2014.04.04 |
---|---|
행복하고 거룩하게 (존 웨슬리) (0) | 2014.03.28 |
내가 무너져야...(디트리히 본회퍼) (0) | 2014.03.24 |
사순절, 이 거룩한 기간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0) | 2014.03.17 |
믿음의 주인 (김교신) (0) | 2014.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