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그 귀중함을 망각하고 그 자존심을 투기(내던져 버림)할 때에 그 생명은 일단(계단의 한 층계)을 비약한 생명이요, 한 층 더 고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극도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봅니다. 말씀이 육으로 되사 세상에서 생활하셨으나 저는 보내신 이의 의사에 반하여서는 한 가지도 한 것이 없었고, 보내신 이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에까지 무능한 자처럼 달려 버렸습니다."
- 김교신 지음(1901-1945), KIATS 엮음, 《김교신》(서울: 홍성사), 46.
맨 날 죽으란다! 예수님처럼 또 죽으란다! 투기한(내 던져진) 생명이 고귀한 생명이란다! 휴! 힘들다. 그 길을 걷기가 참 벅차다.
김교신의 글을 읽다가 같은 맥락의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궁금해진다. 김교신이 그리고 바울이 날마다 죽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때문이란다. 난 역시 믿음이 없어…….
그럼 그 믿음이 뭘까? 난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내가 좋을 때만 예수의 ‘내’ 믿음이 나오지, 내가 죽고 깨지는 순간에는 ‘내’ 믿음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주체가 ‘나’일까? ‘내 믿음’일까? 그러면 내가 종교생활을 잘하면 내 안에 꽉 차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는 그런 ‘내 믿음’일까?
헬라어로 갈 2:20을 찾아본다. 이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고싶다. 헐! 이 믿음이 내 것이 아니란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란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여격’이기에 ‘여격’이 이 ‘믿음’의 주인인데, 20절의 ‘여격’은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그 믿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란다.
그렇다!! 이 믿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많게 보이거나 적게 보이는 내 믿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분이 전폭적으로 내게 넣어주신 선물이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다. 내가 삼층천에 오를 때에도 교만하지 않으며, 내가 스올에 머물 때에도 낙담하지 않는 것은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맨날 죽으란다. 그리고 또 죽으란다. 그래도 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죽을 때 내 믿음이 아닌 그 분의 믿음이 날 살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투기한(내 던져진) 생명이 되면 고귀한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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