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느낌은 잠시만 지속되었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난 슬픔 속에 홀로 남겨졌다. 삶의 권태가 몰려왔고, 나 자신이 싫어졌고, 살아갈 힘도 잃어버렸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유일한 위안과 위로였다. 난 그것들을 붙들었다. 느낌은 거의 없었음에도.
노리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2 – c.1420),《하나님 사랑의 계시 Showings》, LT, ch. 15.
"이런 느낌"이란 줄리안에게 찾아온 더없이 큰 영적 기쁨과 확신과 평화를 가리킨다. 하지만 줄리안에게도, 그런 느낌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삶과 신앙의 토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느낌의 세계보다 더 깊은/높은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성령의 움직임이며, 성령의 움직임을 따라 사는 사람은 느낌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부르심을 따라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을 행하며 길을 간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붙들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날 붙들어주리라. / 이종태
al shal be wel,
and al shal be wel,
and al manner of thyng shal be wele.
- The Shewings, LT,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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