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홀로 수도하는 것은 개인의 필요를 위한 봉사에만 관여할 뿐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성취한 사랑의 법에 분명히 반대된다. 자신이 아니라 구원받을 영혼들의 유익을 구한 사도들의 그 사랑에 반한다.
- 가이사랴의 바실 (Basil the Great: c. 330?-379), 《수도 규범(The Long Rules)》, 7.
카이사르의 감독이었던 바실은 삼위일체 교리의 정립 뿐 아니라 수도원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독거하며 과도한 금욕을 추구하는 것 대신에 공동의 수도 공동체를 그의 수도원 운동으로 제시하였다. 그 까닭은 극단적인 금욕 수도에 대한 회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보다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의 사랑을 행하는 데에는 독거보다는 공동 생활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완전히 세상의 손길과 분리될 수는 없다. 독거 중에도 여전히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손길에 서로 의지하게 된다. 그 연결됨 안에서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로서 창조주 앞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더 깊은 고독 가운데 나아갈 때에도 '구원받을 수도 있을' 영혼을 향한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의 공동체는 문을 닫은 골방들이 아니라 열린 마당이 되어야 한다. 이웃 사랑 안에서 하나님 사랑이 꽃 피우게 되고 '구원'은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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