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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말의 마법과 예언 (토마스 머튼)

'말의 마법'을 독실하게 믿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 상인과 선전원(propagandist)과 정치인입니다. … 우리 [시인들도 그들처럼] 이 마법을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갖가지 변종[표현]들로 조롱하고 패러디합시다. 만약 원한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조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현실을 붙잡는 것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새로움을 향한 최상의 기대와 긴장의 순간 속에서 말입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Message to Poets" 

in The Literary Essays of Thomas Merton (NY: New Directions, 1981), 473.


머튼이 말하는 "말의 마법(the magic of words)"이란 분별력이 약하고 연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난해한 표현들로 축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소비 심리와 환상을 충동하는 상업 광고의 문구들과 국민들을 속이려는 정치인들의 뜬구름 잡는 듯한 말들을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삶에 대해 말을 짜내고, 자신들의 말에 삶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실제로 세상에는 "말의 마법"이 가득하다. 정치인의 말에도, 상업 광고에도, 언론 기사에도, 판사의 판결문에도, 심지어 목사의 설교에도.


머튼에 의하면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먼저는 상인, 선전원, 정치인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로 그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머튼은 '조롱'이 아닌 '예언'을 하자고 촉구한다. 이때 예언(prophecy)이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현실의 가장 높은 가능성과 긴장을 파악하고 확고하게 붙드는 것이다. 매일의 현실에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동시에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세력으로 인한 긴장도 존재한다. 머튼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상대편을 조롱하기보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붙들자고 말한다. 곧, 예언이란 현실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순수한 예측과 희망이다. 이러한 예측과 희망을 담고 있는 것이 머튼이 생각하는 시(詩)이다. 이러한 희망을 볼 수 있는 이가 시인이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1964년 2월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새로운'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과 북아메리카 젊은 시인들의 모임에서 낭독된 "시인들을 향한 메시지"라는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1차적인 독자는 '시인들'이다. 그러나 폭넓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메시지도 된다.[각주:1]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언적이어야 하며, 시적(poetic)이어야 한다. 시적인 삶이란 것은 낭만적이거나 난해한 말을 사용하는 삶이 결코 아니다. 시적인 삶은 오늘의 삶 속에 숨겨진 새로운 내일을 향한 가능성과 긴장 속에서 내일을 희망하는 삶이다. 순수한 희망을 오염시키고 마비시키는 "말의 마법"을 간파하고 저항하는 삶이다. 성서의 예언자들의 존재와 그 삶 자체는 당대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말의 마법"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세상, 저열한 조롱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그 자체로 새로운 미래를 예견하는 희망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 권혁일



  1. 이 글은 이후에 잡지 Americas(1964년 4월)와 단행본 Raids on the Unspeakable(1966)을 통해서도 출판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