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증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증오입니다. 특히 의식적으로 대하기에는 너무 깊고 너무 강한 우리 자신에 대한 증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안에서 보게 하고 우리 자신 안에서는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최근에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불편한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의 말투와 방식이 너무 예의 없는 게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많이 참아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니 그 분은 오랫동안 내 눈에 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만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었습니다. 그저 "나랑 다르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이 의논할 일이 생기게 되면서 불편해졌습니다. 불편하고 미운 이유가 내가 피곤하고 힘들어서 수용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운 짓을 하지만 그 동안은 내가 수용해왔고 지금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내 수용성을 키우면 해결된다. 그런 결론을 내렸던 겁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불편해하는 점들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를 비난하는 내용--자기입장만 말하고 남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기를 드러내려고한다. 정리되지 않은 채 말한다. 말이 조금씩 달라진다--이 사실은 내 자신 안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나는 그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 자신을 미워하는 셈입니다.
이제서야 요8장에 간음한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간음이라는 외적이슈가 아니라 증오라는 내적이슈에 있어 보입니다. 간음하려는 문화 가운데 있으면서 그런 자신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 증오를 이 여인에게 투사하는 사람들의 내면의 증오를 주님은 안타까와하십니다. 그 여인이 사람들에게 끌려왔다는 사실은 그 여인도 그런 증오의 문화와 역동 가운데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은 예수님의 용서의 선언이면서 자신을 증오하고 다른 이를 증오하는 움직임을 멈추어도 된다는 사랑의 선언입니다. 주님이 저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의 그 이중성을 정죄하지 않으마. 그러니 다시 증오하는 삶으로 돌아가지 말거라."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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