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시대, 영적 우정 (Spiritual Friendship)을 말하다
《조지폭스의 일기》와 친우회의 '명료화위원회'
불신-자(不信-者)로 채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불신(不信)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배를 탄 승객이 선장의 말을 믿을 수 없고, 환자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은 나랏님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는 자(信者)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다른가? 최근 이름 있는 대형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존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의 모델이었던 목사님이 돈 문제, 사생활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처음에는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알고 신앙을 지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풍문들이 사실들로 밝혀지면서 자기 믿음의 근거마저 흔들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친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방송이나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추문들과 사건들을 통해 성도들은 그들의 목회자를 ‘성직자’라기 보다는 가운이나 강대상 뒤에 숨은 ‘위선자’로 보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감추지 않는다. 목회자는 또한 어떠한가? 새벽기도회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 등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도, 굳어진 그들의 마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신천지 같은 이단의 출현은 성도들 사이마저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어쩌면 2015년 한국 교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불신-자(不信-者)들이 모여 단지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지 모르겠다. .
'영적 우정'? 불신자의 교회가 되어버린 현대 교회에 있어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주제이다. 그렇지만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혹은 교우들 서로 간의 수평적인 영적 우정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의 친밀함과 더불어 영성 목회에서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소중한 가치이다. 12세기 영국의 시토회 수도자였던 리보의 에일레드(Aelred of Rievaulx, 1109-1167)는 그의 저서 《영적 우정에 관하여》(On Friendship)에서 영적 우정은 영적 완숙(Spiritual Perfection)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라고 말한다. 그는 요한복음 4장 21절 1과 15장 15절 2을 묵상하면서 영적 우정은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우정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정이다(God is Friendship).”라는 과감한 주장을 했다. 에일레드의 책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죽은지 500여 년 후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영국의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우리를 친구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또한 친구다.”라고 주장하며 영적 우정에 기초한 친우회(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3 의 시작을 알렸다. 4
1. 조지 폭스와 친우회
당시 폭스는 침묵에 관해 가르쳤으며 사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해 증거하고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며, 각자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도록 참고 기다리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 …… 그는 모든 사람을 각각의 신조와 예배에 억지로 순종을 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내면의 빛을 통해 영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데, 이 영적인 연합이란 동일한 원칙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2), 47. 윌리엄 펜의 증언.
퀘이커 영성의 기초자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의 일기는 실제 그의 자서전적 기록이며 영어로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자서전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폭스와 같은 세대로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미국 땅에 필라델피아(형제애)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던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 은 《조지 폭스의 일기》 서문에서 조지 폭스는 신앙인들을 기존의 신조나 교회의 교리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고 증언한다. 왜 폭스는 교리와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신앙인을 만들려했을까?
그것은 당시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직자들을 의존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오히려 신앙의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영국사회는 기존의 왕정이 쇠퇴하며 공화정이 등장하는 격변기였다. 왕정이 약화되자 왕실의 보호를 받던 영국 국교회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청교도, 재세례파, 급진파, 분리주의자등 수많은 교파와 그룹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들의 교리와 신앙을 주장하며 쏟아져 나왔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났고, 성직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며 이윤을 탐했다. 말로는 정의와 정통을 외쳐대며 속으로는 탐욕에 젖어가는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조지폭스는 “그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귀머거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랬다. 폭스는 당시의 교회를 “뾰족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보다는 성경을 수단으로 설교를 통해 성공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흉물스런 괴물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적인 방황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구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해답을 구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영적인 고통의 정점에서 그는 그의 일생뿐만 아니라 친우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경험을 한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 그리스도는 나를 깨우치셨으며 자신의 빛을 내게 주어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게 희망을 주셨으며 내 속에서 직접 희망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내게 그의 영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 조지 폭스, 《조지 폭스의 일기》, 71-73.
이렇게 해서 "내면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친우회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다. 마치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가 자기 감각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을 의심한 후, “ego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전통에만 의존하던 중세를 떠나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것과 같이 조지 폭스는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형상, 내면의 빛을 붙잡은 것이다. 또한 서로의 신앙인들 안에는 동일한 내면의 빛이 있어서 그 빛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안의 ‘내면의 빛’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이를 위한 ‘침묵의 예배’는 영국 방방곡곡과 영국을 넘어 유럽과 신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이들 친우회의 영성적인 특징들을 명료화위원회(Clearness Committee)라는 그들의 특별한 분별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명료화위원회는 초기 친우회 공동체에서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사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신부의 영적인 분별을 돕기 위해 시작된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나 나아가서는 전체 공동체의 중요 안건을 위해서도 적용되었다. 이 모임 이면에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내면에 이미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교사, 즉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문제에 처한 각 개인이나 그룹은 여러 종류의 내적, 외적 간섭으로 인해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방해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원회로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안의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스스로가 자기 내면의 빛에 집중하며 해결할 수 있도록 질문과 경청, 침묵을 통해 격려하고 분별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먼저 개인의 분별을 위한 명료화위원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분별이 필요한 문제를 가진 '중심 인물(focus person)'과 모임의 진행을 인도할 '인도자(clerk)' 그리고 중심 인물에게 질문을 통해 분별을 돕는 '4-6명의 분별을 돕는 사람들(discerners)'자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을 돕는 사람들의 질문이다. 이들은 충고나 설득을 통해서 중심 인물에게 영향을 주려 하기 보다는 중심 인물이 스스로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와주어야 한다. 6 사회자는 분별자들의 질문이 부적절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너무 길면 적절히 조절하거나 끊어주어야 한다. 침묵은 이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가장 역동적인 대화의 공간이다. 침묵을 통해서 중심인물이나 분별자들은 그들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다.
친우회는 이러한 개인적 명료화위원회를 공동체적 분별을 위한 의사결정위원회로 확장시켰다. 각 교회나 교단의 총회와 같은 이러한 모임은 여러 가지 첨예한 안건들이 상정될 수 있지만 사회자(clerk)는 개인적 명료화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이해관계나 이기적 욕구 때문에 ‘내면의 하나되게 하는 빛’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회의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각 개인들의 발언 사이에 침묵을 통해서 방해물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한다. 이들의 의사결정은 다수결이 아닌 완전 합의 (consensus)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반대하는 소수가 존재한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다수라는 힘의 논리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는 개인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다리며 침묵한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느리고 힘들고 더디지만 우리가 내면의, 혹은 외부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결국 하나님이 주신 ‘내면의 빛’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한다. 초기 미국 퀘이커교도였던 존 울먼(John Woolman, 1720-1772)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후 이와 관련된 안건을 퀘이커 공동체에 내어 놓아 자그마치 20년의 긴 시간을 통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하였다.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노예해방 선언보다 8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3. 나서는 말
책으로만 접했던 친우회의 모습을 글로 쓰기가 부끄러워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보았다. 아무런 찬송도, 어떤 의식도 없이 그냥 그들은 앉아 있었다. 앉아서 마냥, 차분히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들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빛의 소리. 그렇게 침묵 속에서 내면에 들려오는 빛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서 자기가 들은, 혹은 경험한 것들을 모인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나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진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헤어졌다. 그렇지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아쉬운 반응은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기다리는데 익숙해 보였고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그날의 설교에 따라 ‘오늘 은혜 받았어요’, ‘오늘은 설교가 별로였어요’하며 설교에 따라 예배를 평가하는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친우회의 예배와 그들의 영성은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낯설고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안팎의 장애물을 걷어내면 우리에게는 똑같이 내면의 빛이 있어서 독립되지만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 조지 폭스의 믿음, 그 장애물을 걷어내기 위해 함께 모여 가만히 앉아, 참고, 기다리며, 경청하는 친우회의 침묵의 영성은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영적 우정은 결국 나와 서로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를 위한 따뜻하고 조용한 기다림의 여정이 아닐까.
글쓴이 : 정승구. 미국 프리몬트의 로고스교회 담임.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spirituality.or.kr)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 과정 중 (기독교 영성학)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9월 호에 실린 아홉 번째 글입니다.
- 1) 이 작품은 에일레드가 20여 년간 집필하여 1167년 경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elred of Rievaulx, Spiritual Friendship: Classics with Commentary Series, (Notre Dame, Indiana: Ave Maria Press, 2008). [본문으로]
- 2)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문으로]
- 3)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본문으로]
- 4)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에 몸이 떨렸다고 해서 흔히들 퀘이커 (Quaker)라고 더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친우회 (Friends, 또는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이다. 우리 기독교계의 어른인 함석헌 선생도 퀘이커 교도로서 알려져 있듯이 퀘이커들의 예배 및 영성은 오랜 전통과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한다. [본문으로]
- 5) 영어로는 ‘The Clearness Committee’로 알려진 퀘이커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분별과정은 한국말로 해석이 용이치가 않다. 정화 위원회, 해명 위원회, 혹은 명료화 위원회로도 불리지만 본문에서는 퀘이커 서울 모임에서의 자문을 받아 명료화 위원회로 부른다. [본문으로]
- 6) 구체적인 질문이나 대화법은 본 시리즈/연재 지난 2월호에 실린 이주형 목사의 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영적 대화법>을 참고로 하면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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