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 위로를 주는 사람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다른 날보다 오늘, 벗들이 많이 모인 것은. 새벽 기차를 타고, 또 아이들을 맡기고, 식구들을 먼저 보내고, 늦은 오후 이 자리에 와 앉아 있기까지 얼마나 수선을 피웠을 지 생각하니 맘이 짠하다. 벗들은 십자가를 향해 앉아 기도 삼매에 잠겨있다. 벗들 사이로 흐르는 적막하고 고즈넉한 기운이 참 좋다. 대나무 숲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침묵 사이로 벗들의 마음이 와 닿는다. 이들을 뭐라고 부를까? 그래, 위로가 되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들고 한걸음에 달려온 천사들이다.
이냐시오(Ignatius of Loyola)는 이와 비슷한 체험을 ‘영적 위로’라고 불렀다. “위로란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나며 영혼이 창조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그 자체로서만 사랑할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을 창조주 안에서 사랑하게 되는 때를 말한다. 또한 자기 죄나 우리 그리스도의 수난의 아픔이나 직접 하느님을 위한 봉사와 찬미에 관련된 다른 일들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눈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과 창조주 주님 안에서 영혼을 침잠시키고 평온하게 하면서 천상적인 것으로 부르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내적인 기쁨을 위로라고 한다.”(『영신수련』 316번).
그저 그렇게 기쁘고 즐겁거나 감동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 후에 흔히들 말하는 “은혜 받았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영적 위로’란 자기와 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전과는 좀 다른 관점으로 인식하게 되는 체험이다. 영적 위로는 영혼 안에 스며들어 그 중심에서 안정감과 평온함으로 우리 전체를 물들여 간다. 바짝 날이 선 긴장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기 어렵게 보이던 이 세계에 대한 좌절로 앞이 캄캄하던 우리의 영혼은 깊은 어둠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작은 촛불들 앞에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은 무수하게 반짝이는 그 작은 빛들의 파도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함께 하고 있는 누군가가 밀어주는 힘에 의해 앞으로 한 발짝 더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솟아남을 느끼게 해 주는 체험이다.
영적 위로는 반드시 방향성을 지닌다. 나와 너, 우리를 포괄하며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을 향해 인간 영혼을 고무시킨다. 체험의 강도 차이는 있어도 영적 위로는 분명한 방향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움직인다는 것을 흐른다고 해도 좋겠다. 깊은 산속 작은 샘에서 시작된 물은 시냇물을 지나 개천으로 강물로 끊임없이 흐른다. 개울물일 때는 작은 바위도 돌아 넘기 어려워 여울물이 되어 빙빙 돌기만 하는 것 같고 때로는 흘러가는 힘이 너무 약해 고인물이 되어 버려 물의 인생을 아쉽게 마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물은 흘러가면서 자기를 점점 더 넓혀가고 주위의 땅을 옥토로 만들며 온갖 생명들이 살아갈 기운을 부여한다.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자기를 흘려 보내면서 끊임없이 자기 주위를 살려낸다. 이처럼 우리가 목적한 그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영적 위로 체험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닐까 싶다.
반대로 영적 위로가 우리의 영적 성장에서 한 축을 분명히 담당한다는 점은 우리가 목적한 그 길을 걷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처에 넘기 어려운 큰 바위가 출현하고 길이 막히거나 끊기기도 한다. 장애가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가장 큰 장애이다.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자아로 움츠러들면서 고립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다. 고립된 자아는 고집스러운 자아가 된다. 어느덧 하나님 없이 위기 탈출을 모색하는 인본주의자가 되거나,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특별한 은총에 집착하는 마술주의자가 된다. 영적 위로는 고립된 자아에서 나를 이끌어 낸다. 그래서 세계가 달리 보이는 것이다.
요즘 나는 영적 위로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경험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방식으로서. 즉, 내 삶의 경험과 기도 체험이 ‘영적 위로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 반대에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분별하기보다 ‘나는 영적으로 위로가 되는 존재인가?’를 묻고 있다.
이냐시오는 영적 위로는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며, 원수가 빠트리는 온갖 슬픔과 혼란을 없앤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영적 위로를 주는 근원을 “하나님과 그 천사들”로 보았다(『영신수련』 329번). 만일 어떤 사람이 생의 한 순간에 신비한 영적 존재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그 삶은 어떻게 될까? 이제 다 그만 둘까 하며 축 쳐진 어깨를 끌고 늦은 밤 골목길을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는데, 집 앞에서 자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듯 한 환하게 웃고 있는 천사가 자신에게 사뿐히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주고 고생했다고,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힘든 일의 의미를 다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고 말해준다면, 과연 그 사람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만일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감동을 주는 한 존재로 선다면, 그 사람은 바로 “영적 위로”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천사” 한걸음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오늘 유쾌한 상상을 한다. 우리 모두가 바로 지금 천사가 되기로, 신적 존재가 되기로 선택해 보면 어떨까? 각박하고 어수선한 이 세상이 온통 천사들로 가득하다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하나님과 그 천사들은 영혼에 감동을 일으켜서 진정한 즐거움과 영적 기쁨을 주며, 원수가 빠트리는 온갖 슬픔과 혼란을 없앤다. 그리고 원수는 본래 그럴싸한 이유들과 교묘하고 한결같은 속임수로써 이런 즐거움과 영적 위로를 없애려고 애쓴다(『영신수련』 329번). / 해'맑은우리 주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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