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바쁘다. 내년에도 다시 볼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다시 못 만날 사람들처럼 송년모임을 한다. 일 년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것은 좋은데 너무 많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이지만, 너무 많다 싶어 마음이 쓰인다. 분주한 연말인데 멀리 계신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니 마음은 복잡하고 생각은 많아진다. 해야할 일은 많은데 일사천리가 아니라 꼬여만 간다. 함께 동역하는 분들이 정말 귀하게 섬겨주고 있는 데도 간혹 일어나는 사소한 부딪힘에 얼굴빛이 달라진다.
‘자기 일만 문제없이 해 주어도 신경이 덜 쓰일 텐데. 나 좀 도와주지. 진짜…….’ 마음에 요철이 생긴 듯 덜그덕 소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난다. 말 끝에 까칠함도 스물스물 올라오려고 하니 내가 일년 동안 한 걸음이라도 나아간 것이 맞을까? 자괴감이 든다. 한 해를 잘 못 지낸 것 같은 자책에, 바쁜 일정으로 인한 피곤함,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공허까지……. ‘연말증후군’일까? 곰곰이 살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지난 가을에도 비슷한 내적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주변 상황이 불만스럽고 내가 충분히 도움을 받고 살아가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삐죽거렸던 순간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분주함을 넘어서는 근원적 움직임 때문이었다.
지난 가을 묵상기도로 영적 여정을 함께 걸으며 수련원을 섬기는 봉사자들과 유럽에 있는 개신교 공동체들을 순례했다. 열흘 동안 네 개의 공동체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먹을 곳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긴 이동 중에는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침에 누룽지와 따뜻한 물을 함께 준비해서 텀블러에 넣어두면 점심 먹을 때쯤 따뜻한 밥이 되어 있었고 가져간 밑반찬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는데, 나에겐 그런 점심 시간이 좋지만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텀블러를 준비했는데 나만 빈손으로 가서 다른 집사님과 밥을 나누어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숟가락 하나만 들고 와서 친구들의 밥을 한 숟가락씩 얻어 먹던 더부살이 꼴이 되어버렸다.
휴게소에서 피크닉 매트를 펴고 낭만적으로 식사를 했지만 나는 그 집사님께 은근히 미안해져서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 마음을 알고 있던 걸까?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한 분이 빈손으로 왔다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각자 자기 것을 꼭 가져와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둘러댔다. 빈 그릇에 누룽지를 담고 텀블러의 따뜻한 물을 조금씩 나누어 숭늉처럼 먹는다고 생각했지, 각자의 텀블러에 누룽지를 넣고 물을 부어서 밥이 되도록 준비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준비물을 설명하는 자리에도 못 가고 자세히 챙겨보지도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퉁명스런 대답에 이어 짧은 어색함이 흐를 때, 나는 마리아자매회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자매가 예수님의 수난기도처 앞에서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 내가 불만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했지만 내 책임은 아주 소소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다. 억울하다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준비모임에 가지 않고 자세하게 묻지 않은 내 잘못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인정하지 못했다. 대신 ‘그 때는 출간하려던 책의 원고를 마무리하던 시점이라 힘든 때였어.’ ‘세세하게 잘 설명해주었다면 나도 준비를 했을 텐데.’라며 항변하고 있었다. 나는 폐를 끼치는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대신 상황을 나에게 유익하게 구성함으로써 나를 변호하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수용해야 하고, 내게 동의해야 한다는 지극한 자기중심성을 드러낸 셈이다. 조금 껄끄러운 수용이라도 그게 얼마나 큰 은총인가? 그런데도 나는 오만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제공이 부족했으니 수용은 은총이 아니라 당연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해지며 은총은 사라지고 당연함이 지배한다. 당연한 일들도 잘 진행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분노하고 정죄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닮아 간다. 우리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입증할 필요가 없다. 내가 얼마나 잘났고, 내가 얼마나 존귀하고, 내가 얼마나 자격 있는 지를 입증하려고 싸우고 애쓰고 우겨댈 필요가 없다. ‘예’는 ‘예’로, ‘아니오’는 ‘아니오’로 살아가면 충분하다. 그렇게 살아가지 못해 허덕이는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이 성탄의 은총이다. 성탄은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실 만큼 당신은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낮고 비천한 자리에 있는 죄인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 그 자체인 하나님의 존재가 성탄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탄의 은총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도 입증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연말증후군'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진정한 성탄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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