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구멍, 겨울의 숨구멍
“숨구멍이 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답답한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됨을 비유한 표현이지요.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어려울 때뿐만이 아니라, 계절적으로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에는 문을 꼭꼭 닫아 놓고 지내기 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갑갑한 상황 속에서 ‘숨구멍이 트이게’ 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나요?
숭실중학 재학 당시 윤동주(뒷줄 오른쪽), 문익환(뒷줄 가운데)
오는 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1917-1945)이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서러운 죽음을 맞이한 지 72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12월 30일은 우리에게 언제나 청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윤동주 시인의 백 번째 생일입니다. 그는 〈서시〉나 〈십자가〉와 같은 잘 알려진 서정시 외에도 많은 동시를 지었는데요, 그 중에 〈창구멍〉이라는 작품을 함께 읽어 보고자 합니다.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고쳐 인용합니다.
창구멍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 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이 동시는 시인이 갓 스물이 된 1936년 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그는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여 있습니다. 그리고 약 2년 후 윤동주는 이 시를 〈햇빛·바람〉이라는 제목으로 고쳐 썼는데, 여기에서는 “아빠” 대신 “엄마”를 그리워합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이(화자)는 방안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입니다. 밖은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어서 아이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빠나 엄마는 엄동설한에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에 나가 나무를 파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존재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방안에서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 눈으로 부모와 같은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시 윤동주가 다니던 숭실중학은 한겨울과 같은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1935년 12월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집단적으로 거부하였는데, 이로 인해 1936년 1월 20일 교장 조지 매퀸이 일제에 의해 파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교장을 내놓으라”고 외치며 데모를 하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학교는 강제로 무기휴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창구멍〉의 배경이 된 겨울 날씨와 아빠의 부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주목해 볼 것은 “창구멍”의 역할입니다. 추운 날씨에 방안에 갇혀 있는 아이는 창호지에 손가락으로, 또는 혀끝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바깥세상을 내다봅니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서 바깥으로부터 “아롱아롱 아침 해”가 비쳐오고, “살랑살랑 찬바람”이 찾아옵니다. 곧, 작은 창구멍은 바깥세상과의 소통의 통로입니다.
<창구멍> 육필원고. 윤동주 자필시고전집(민음사)에서.
아침 햇살과 찬바람은 홀로 있는 외로운 아이를 위로하고,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주는 벗들입니다. 시인이 1940년 12월에 쓴 〈병원〉이라는 시에는 병든 젊은 여자에게 “나비 한 마리도” “바람조차”도 찾아오지 않는 훨씬 더 암울하고 답답한 상황이 나오지만, 그래도 〈창구멍〉에서는 아침 해가 아롱아롱 비쳐오고, 바람이 살랑살랑 찾아옵니다. 비록 ‘아빠’나 ‘엄마’는 함께 없지만, 창조주는 자연을 통해 어린 아이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시인은 혹독한 겨울과 같이 춥고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이렇게 일상적인 자연 현상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시 속의 아이가 절망과 우울함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창구멍을 뚫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이가 바깥세상을 내다 볼 수도, 햇볕과 바람이 그에게 찾아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작은 창구멍”은 그가 노트에 써놓은 시들입니다. 실제로 시인이 1936년 3월부터 사용한 그의 두 번째 시작노트의 표지에는 “창(窓)”이라는 제목이 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첫 번째 시작 노트의 목차에서 〈창구멍〉의 제목 옆에다 “동요”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육필 원고를 보면 한 행의 글자 수를 4·3·5음절로 맞추어서 4음보가 반복되는 노래로 만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부탁해서 이 시에다 곡조를 붙여 보았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바람이 매서운 겨울이지만, 윤동주의 동요 〈창구멍〉을 부를 때, 여러분들의 삶에 작은 숨구멍 하나 트이길 기도하면서요. / 권혁일
Magazine Hub 46 (2017년 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매거진 허브는 건전한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및 계층 간 문화 격차 해소, 문화예술 인재의 발굴과 양성 등을 통하여 사회문화의 창달과 국민의 문화생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월간전자간행물입니다. 구독 신청 : 예장문화법인허브. hubcultur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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