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주님의 성흔을 묵상하는 때입니다.
성흔(stigmata)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말하지요. 예로부터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성흔을 묵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예수의 상처까지도 닮기 원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stigmata)을 지니고 있노라”(갈6:17)고 말했고, 예수를 닮기를 추구했던 성 프란체스코(Fransis of Assisi: 1181-1226)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베르나 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몸에 오상(五傷)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실제로 육체에 성흔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고난에 이르기까지 그분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고백을 그들은 정말 급진적인 삶으로 살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 실제로 성흔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흔이나, 나의 성흔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성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흔(聖痕)
누가 풀잎을 자르는가
누가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을 칼로 찌르는가
누가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가
이슬의 피가 흐른다
이슬의 붉은 피가 풀잎을 적시고
하늘과 땅과 모든 인간을 적신다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으나
나는 내 상처가 성흔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이슬의 손에 못을 박았으므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으므로
- 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80.
시인은 성화 속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거리나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잘려진 풀잎에서, 그리고 풀잎 위의 이슬에서 성흔을 봅니다. 나아가 이슬의 붉은 피가 하늘과 땅의 모든 인간을 적신다고 말합니다. 보통 민담이나 문학 작품에서 신비하게 여겨져 온 해·달·별이 아니라, 또는 소나무나 백로처럼 지고하게 여겨져 온 동식물이 아니라, 하찮고 흔하게 여겨져 온 풀잎과 이슬에서 거룩한 상처와 붉은 피를 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서울의 예수〉(1982)에 나온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라는 표현을 생각나게 합니다.
풀잎은 인간의 욕심에 훼손된 자연 세계일 수도 있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권력자들의 폭압에 짓밟힌 민초(民草)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은 이슬처럼 맑고 죄가 없으심에도 붉은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이슬처럼 연약한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가장 작은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5:40, 45).
그러므로 이 시는 “누구의 상처이든 상처는 모두 성흔이다”라는 3연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이처럼 시인은 소위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상처에서, 특히 풀잎과 같이 낮고 흔한 사람들의 상처에서 그리스도의 성흔을 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상처는 다 사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 입으시고 붉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사53:4), 인간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시인은 다른 이들의 상처는 성흔이라 말하면서, 자신의 상처는 성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는 1연에서 누가 풀잎을 자르고, 이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었는지 물었지요. 그런데 3연에서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풀잎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 이슬의 손에 못을” 박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죽인 죄보다 주님의 사랑은 더욱 크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지요(눅23:34). 그러므로 시인의 고백은 그의 신학적 이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겸허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연민에 빠지면, 다른 이들의 상처는 잘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에, 만약 우리가 성화나 영화 속의 그리스도의 상처만 보고, 세상의 풀잎들과 이슬들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상처를 제대로 묵상하지도, 이해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만 아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3년 전 고난 주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던 세월호는 이 사순절에 마침내 우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몸에 많은 상처들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마치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희망과 기쁨을 잃었던 이들의 상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었던 모든 이들의 상처가 그리스도의 성흔, 거룩한 상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 바람연필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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