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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에 해당되는 글 7건
- 2015.05.12 세상은 투명합니다 (토마스 머튼)
- 2014.10.12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2) : 매일의 기도
- 2014.10.10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 기도와 항해
- 2013.08.10 이웃 사랑, 고독의 진통제 (아빌라의 테레사)
- 2013.06.20 사막의 열매 2 : 맑은 눈 (컬른의 브루노)
- 2013.06.12 사막의 열매 1 : 자신과의 만남 (컬른의 브루노)
- 2012.11.05 We appreciate your busy-ness! (팡세)
글
저는 모든 것들이 투명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불투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숨기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은 삶은 이것처럼 단순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완전히 투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계십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Solitude: Breaking the Heart (Kansas City, MO: Credence Cassettes, 1988).
영성이 깊어 진다는 것은 세상을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상처, 이기심과 교만, 재난과 사고 등 우리의 눈을 가려 하나님을 숨기는 것들을 넘어서 이 세상 가운데 항상 밝게 빛나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뵙고 그 가운데 사는 사람이 깊은 영성의 사람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세상이 지금 우리의 세상과 달리 평온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투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중반은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으로 세계 곳곳에 화약냄새와 비탄이 가득했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외치기도 하였지요.
또는 그가 '세상과 분리된' 수도원 안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가한'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젊은 시절 머튼은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그는 수도원의 깊은 고독 속에서 자신 안에 있는 세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신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세상의 비극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머튼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아마도 '고독'과 '침묵'일 것입니다. 고독은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비늘'(행9:18)이 드러나게 하고, 그것을 벗기시는 주님의 은총의 빛에 우리를 노출 시킵니다. 침묵은 우리의 틀에 갇힌 생각과 말들을 잠잠하게 하고, 직관의 눈을 뜨게 하여 사람의 언어에 제한되지 않는 주님의 현존을 보게 합니다. 고독과 침묵은 깜깜한 밤에도 사방을 덮고 있는 어둠이 아니라 그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빛을 발견하고 주목하게 합니다. 그러면 점차 어둠이 투명해지고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항상 충만하게 빛나고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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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2) 매일의 기도
앞선 글에서는 우리의 삶은 배가 항구를 떠나 하나님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항해와 같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5-10분 정도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 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시기를 권해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언제 : 삶의 리듬과 갈망
매일 아침,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면서 기도를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인도함을 받습니다. 자기 나름의 시간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을 “해야만 한다”고 강압하고,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나 자기혐오에 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기 스스로 얼마나 원하는지를 더욱 기억하십시오. 원하는 것에 솔직하십시오. 그리고 몸, 하루 일정, 마음 상태 등을 봐가면서, 오늘 하루의 삶에서 언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최선인가를, 성령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리듬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적합한 시간은 일상에서 곧 정해집니다. 기도 자리가 정해지지 않는 것은 ‘원하는 힘’을 덜 믿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성령께서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기도하길 원하십니다. ‘원한다’는 것을 강하게 믿어보세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청해보세요.
2. 어떻게 : 침묵과 고독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환경이 ‘침묵’과 ‘고독’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고, 인간이 그 멀리 계신 하나님께 열심히 노력해서 도달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이 나를 추구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과 일치’는 분리된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나 하나여서 ‘분리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고요, 내적인 침묵이 형성되면 그저 저절로 발견됩니다. 세상의 온갖 자극에 너무 시달린 감각으로 이런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느낀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침묵기도가 일상 속에 잘 녹아내리지 않는 이유는 개별적 차원의 ‘기도 숙달’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큰 환경인 ‘침묵’과 ‘물러남’의 가치에 얼마나 눈을 뜨느냐에 있습니다. 침묵하는 까닭은 하나님께만 말하기 위함이고, 물러나는 까닭은 하나님하고만 머물고 싶다는 갈망의 형식적 표현입니다. 그러니 혼자 있는 시·공간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침묵 속에서 혼자 조용히 머물러 보십시오. 사방이 하나님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곧 느껴지실 것입니다. 아주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3. 무엇을?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사랑 속에 머물고 싶어지려면, 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하나님 그분 자체가 함께 머물기에 참 좋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고요히 머무는데, 우리가 그 하나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두렵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권위적 관계로 경색되어 있어서, 자발적으로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분으로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혹은 하나님께 속마음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하거나, 아무리 기도해도 꿈적도 않는 경험이 반복되어 있으면 어떨까요? 혹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것은 무조건적으로 응답하셔야만 하는, 곧 우리 비위를 맞춰주는 하나님으로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a. 성경
이 모든 예는 온전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신비이시고 전부이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자기-경험의 세계 안에 하나님을 가둬두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오해한, 즉 자기-결핍을 투사한 하나님의 왜곡된 이미지를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왜곡하여 이해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 방식대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침묵기도의 기본 자료는 언제나 성육하신 말씀이신 성경,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을 보여주는 복음서로 기도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세계, 자기-이해를 벗어날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각성될수록, 항해에 대해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b. 삶, 그 자체
자, 그런데 오늘의 항해일지에는 말씀으로 기도하기보다 주요한 사건, 이슈, 선택 문제 등을 놓고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 삶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침묵으로 머물면서 기도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 사건에서 마음이 불편한 경우, 죄책감이 느껴지거나 하는 경우도 좋습니다. 또, 구체적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사안들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① 첫째, 묵상기도나 복음관상 때처럼 기도 준비를 합니다.
② 둘째, 기도할 내용을 요점으로 만듭니다.
예) ○○와의 관계에서 불안하고 화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새롭게 볼 수 있을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무엇을 교훈하셨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
③ 셋째,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천천히 기도를 시작합니다.
④ 넷째, 기도할 요점을 마음에 깊게 품으면서, 떠올려야 할 것들은 기억으로 떠올리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뜻,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집중합니다. 감정이나 마음을 인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요점으로 잡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집중합니다.
⑤ 다섯째, 처음에는 분심(산만한 마음)이 많고 어려울 것 같지만, 묵상기도가 익숙한 사람들은 삶으로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삶 자체로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른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삶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삶을 묶어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⑥ 여섯째, 정해진 기도시간(40~60분)이 다하면 기도를 마칩니다. 기도를 통해 은총을 받았 다면, 자연스럽게 찬미와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도는 좀 더 반복을 해야 합니다.
⑦ 일곱째, 이 기도도 기도반추를 합니다.
c. 몸, 마음, 그 자체.
몸이 아플 때나, 지쳤을 때, 진짜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마음이 힘들어, 묵상이나 생각 자체가 귀찮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이 필요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진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무시면 됩니다.
① 첫째, 기도를 준비합니다. 시간, 자세, 장소 등.
② 둘째, 기도 요점을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몸, 마음을 품어 준다." 이때 성경 구절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③ 셋째,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들어, "몸이 쉼을 얻고 새 힘을 얻게 하소서.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소서."
④ 넷째,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찬 마음으로 몸이나 마음을 품습니다. 분심은 흘리고, 다시 집중합니다.
⑤ 다섯째, 타이머가 울리면, 자발적인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⑥ 여섯째, 기도를 반추하여, 적습니다.
d. 중보 기도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뜻을 살펴가면서, 혹은 삶 자체로 기도해 나가기 때문에 점차로 간구하는 것들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특히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우리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탄식과 한숨이 나오는 것들, 막막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때는 진정으로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① 첫째, 기도를 준비합니다.
② 둘째, 기도 요점을 확인합니다. 한 시간 동안 기도 속에 머물 내용, 주제입니다.예를 들어, "에볼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아프리카를 보살펴 주십시오. 바이러스가 안정화되고, 치료약이 개발되게 해 주십시오."
③ 셋째, 성령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께 청하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현존을 자각합니다. 하나님께 기도요점에 대한 갈망과 안타까움 등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마음에 현존하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주제를 모읍니다. 간간히 침묵 중에 말로 드리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할 주제에 대한 마음, 의식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모아드리는 것입니다.
④ 넷째, 타이머가 울리면, 자발적인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면서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⑤ 다섯째. 기도를 반추하여, 적습니다.
- 여기까지 매일의 기도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기도와 삶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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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기도와 항해
삶, 항해
우리 삶은 한 척의 배가 이쪽 항구에서 떠나 저쪽 항구로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배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도착해서 닻을 내려야할 항구가 있고, 그 항구를 향해 방향을 조정하면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릅니다. 우리 인생, 삶이라는 이 배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목적지,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장 1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배가 도착해야 할 궁극적 항구는 ‘하나님’ 그분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이 배는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여러 가지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 기독교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기도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일치’는 내적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심리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 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지, 뜻’은 ‘하고 싶은 것’이 같아졌다는 것이며, 더 이상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의 일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인간 안에 불타오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상징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바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세상,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 체계, 사고-생각 체계, 감각 체계, 삶의 방식과 하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마음에 담으면서,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배를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등 어떤 것이 마음에 담기는 지요?
항해의 분위기
그러면 이 배의 이름과 그 규모는 어떠할까요? 이것은 이 배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예수님의 세례 체험에 나타납니다. 그 내용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자기-정체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에 가득 찬 기쁨이 하늘에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항구히 흔들림 없이 완전히 고착되어 있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가득한 기쁨을 받고 있는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지입니다.
비록 이 배가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흔들릴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흔들어 대는 여러 환경적 요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니까요.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흔들리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전부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부분입니다. 항해의 더 큰 국면은 이 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항로를 따라 의연하게 운항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배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따라서 우리는 삶이 흔들릴 때, 이 배의 궁극적 정체성을 거듭하여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 청하면서,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이 바로 하늘이고, 그 하늘사이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정체성’을 일깨우는 소리는 우리 삶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각성시킵니다.
항해, 선택인가?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쪽 항구에서 닻이 올라간 것 자체가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알건 모르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의 배는 이미 이쪽 항구를 떠나 저쪽 항구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항로에 자연스럽게 몸을, 마음을, 삶을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닻을 자발적으로 걷어 올려 운항준비만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넓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면서, 본인의 갈망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단순한 기도로 하나님께 간절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 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합니다. 5분, 10분 정도, 그렇게 조용히 마음의 방향을 잡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원한다.”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청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 다음 번에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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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어떤 약으로도 치유되기 어려운 병과 같다. 외부에 있는 타자가 제시해 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기에, 더더욱 고독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빌라의 테레사는 고독이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은혜를 주시려 할 때 허락하시는 마음의 시련이라고 밝힌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연합으로 도달하기 이전 깊은 정화의 과정에서 영혼이 경험하는 하나의 시련이다. 그것의 중요한 특징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잠깐의 외로움이나 기도가 잘 안되는 그런 것과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테레사는 이 고독의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어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참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의 얕은 지식과는 상반된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고독의 약이라니! 외부에 있는 사랑이 고독을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 고독의 고통을 경감시켜준다. 오늘도 이 역설적인 진리가 내 안에 좀 더 깊이 스며들길 소망한다. 테레사의 말대로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행동이기 때문에……. / 작은소리찾기 박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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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컬른(쾰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생명까지 위협 받는 불모의 땅 사막, 이곳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 맺히는 두 번째 열매는 '맑은 눈'이다. 사막에 들어 오기 전, 안목의 정욕(요한일서2:16)을 따라 살던 이들도, 또는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을 좇다가 시력을 잃어 버린 이들도, 그리교 교만, 의심, 미움, 세상 염려로 눈이 흐려진 이들도 사막에서는 금욕과 훈련을 통해 맑은 눈을 얻게 된다. 마치 다멕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것처럼 수도자의 눈을 가리는 것들이 벗겨지고, 씻겨진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황폐한 땅 사막으로 들어간 이들이 간절히 추구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눈으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 그가 상처를 입는다는 점이다. 컬른의 브루노는 여기에서 분명히 아가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아가서는 '신랑'으로 상징되는 주님과 '술람미 여인'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사랑의 노래로 해석되어 왔다.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오늘 나 그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대의 눈짓 한 번 때문에…….
(아가서1:15, 4:9 새번역)
이 구절은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주고 받는 중에 남자이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비둘기 같은 그 눈동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여인 전체를 상징한다. 일종의 제유법이다. 여인이 이 아름다운 눈동자로 임을 바라보자, 남자는 그 눈짓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브루노는 이와같은 아가서의 이야기에 착안하여 영혼이 그 눈으로 신랑이신 주님을 명료하게 바라볼 때에 신랑은 사랑으로 상처를 입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랑의 상처는 '실연의 아픔'과 같이 상대방의 배반이나 폭력에 의해 받게 되는 상처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서로의 사랑이 매우 깊어서 얻게 되는 역설적인 상처이다. 아가서에서 신랑과 여인은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함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다. 브루노는 신랑이 이러한 '상처'를 입을 정도로 사막에서의 주님을 향한 영혼의 바라봄은 매우 명료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수도자가 이러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만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갈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사람이 영성훈련을 통해서 영혼이 맑고 아름다워지면, 주님이 그제서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의 상처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눈이 맑아지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로 인해 사랑의 상처를 입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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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실제로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이곳[사막]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만큼 그곳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의 씨앗들을 부지런히 재배하고 낙원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먹으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눈(eye)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은 신성하신 신랑을 명료하게 바라 봄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랑으로 상처입게 한 그 눈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맑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쁜 여가를 보낼 수 있으며, 조용한 활동 속에서 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고생스러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운동 선수들에게는 간절히 기다리던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 보상은 세상이 무시하는 평화와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컬른의 브루노(Bruno of Cologne, c. 1030 - 1101), Ep 2.2; Sch 88:82-85.
카르투시오회(Ordo Cartusiensis)를 창설한 컬른(또는 쾰른)의 브루노는 사막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위와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첫 번째는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과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막은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고독한 장소이다. 그곳은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유흥(entertainment)이 미치지 않는 메마른 땅이다. 그래서 사막을 탈출하지 않고 그곳에서 버티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까지 외부의 즐거움(안목의 정욕)을 쫓던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막은 자기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이다. 자신의 외적 자아(가면)가 벗겨지고, 대신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가 나타나는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가르친다(고린도전서 3:16). 그래서 자신의 내적 자아와의 만남은 곧 그 내적 자아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는 삶은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 곧 관상 생활(contemplative life)이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은 거창하거나, 복잡하거나, 일반 사람들이 엄두내기 힘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매우 단순한 삶이다. 또한 이것은 내적인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삶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선한 씨앗들이 자라서 외적으로도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는 삶이다.
브루노는 이러한 풍성한 삶이 황량한 사막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오늘날 사막은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막의 고독은 오늘날 분주한 도시 생활의 한 가운데에서도 가능하다. 문제는 내 안에 이러한 메마른 고독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들어가 자신과 함께 거하고자 하는 갈망과 강한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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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인간의 온갖 불행은 단 하나의 사실에서, 즉 한 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팡세The Pensées (이환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부), p. 159
어느 가게에서 나오다가 이런 문구를 보았다:
"We appreciate your business!"
그런데 순간, 그 말이
"We appreciate your busy-ness!"
로 읽히면서,
마치 악마가 내 뒤통수에 대고 하는 말로 들렸다.
Carl Jung이 한 말과 중첩되었기 때문인데,
"현대인은 영혼을 잃어버렸다"
(「Modern man in Search of a Soul」)
고 말하는 그는
어디선가 이렇게 말했다:
"Hurry is not of the devil; hurry is the devil."
"바쁜 것은 악마적인 것 이상이다. 악마 자체다."
왜 바쁘다는 것이 악마적인 것이고, 또 심지어 그 이상일까?
그건, 바쁘면,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보면,
'정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겠지.
그렇다,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보면 그만 '영혼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 없이 바쁘게 살다보면 영혼을 잃어버린다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영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부러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일부러 바쁘게 산다.
바쁘게 살아야 잊을 수 있으니까.
정신 없이 바쁘게 살아야 우리는,
내게 영혼이 없다는 것을,
내가 내 영혼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늘 바쁘다.
그리고 인정 받는다.
그게 사는 것이라고.
세상을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We appreciate your busy-ness!
/ 산처럼
연극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한국 공연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
http://cafe.naver.com/samil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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