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거룩한 감정, 거룩한 실천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있어 진지함을 견지한다면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이러한 참된 신앙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1703년 10월 5일 미국 코네티컷주 이스트 윈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목회자였지만, 그의 외조부인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 목사는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였다. 에드워즈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회심을 경험했는데, 이것이 그가 신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적으로도 매우 총명해서 불과 13세에 당시 새롭게 문을 연 지역 대학(현 예일대학)에 입학해 그곳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그는 존 로크의 사상과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졸업 후 에드워즈는 외조부가 목회하는 매사추세츠 주 노스햄턴 소재 회중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으며, 외조부가 사망한 1729년에는 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부흥을 목격했다. 먼저 그가 목회하던 곳에서 사람들이 악습을 개선하고 청년들이 회심하면서 교회가 부흥했다. 그리고 부흥의 불길은 인근으로 번져서, 1734년에는 코네티컷에서도 부흥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1740년에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가 부흥의 불길에 휩싸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부흥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앙 감정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저서 《신앙감정론》(Religious Affections)은 그러한 그의 경험과 탐구에서 나온 설교들을 모은 책이다. 



부흥의 시대와 분별의 필요성

    에드워즈는 부흥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 거짓된 신앙도 함께 성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할 필요를 절감했다. 그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감정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신앙 감정을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과 결부시키려 노력했고, 이러한 결합을 통해 성령 체험이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위한 방법들을 탐구했다.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참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미덕과 거룩함을 구별해 주는 표지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1부는 감정의 본질과 중요성을 다룬다. 이어서 제2부는 신앙 감정과 관련하여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판단근거가 될 수 없는 열두 가지 표지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제3부는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고 보여주는 확실한 열두 가지 표지들을 다루고 있다. 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비춰보자. 오늘날 우리는 ‘영성’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한 덕목으로 많이 회자되고 있는 때를 살고 있다. 바야흐로 ‘영성이라는 말’이 부흥하고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참된 신앙’을 분별하려고 노력했듯이, 지금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의 참된 신앙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거룩한 감정

    에드워즈에게 있어 중요한 신학적 명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147)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요약하면,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 안에 ‘지성’(understanding)과 ‘성향’(inclination)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다고 이해했다. ‘지성’은 인간이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말하며, ‘성향’은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같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만드는 기능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향’이 ‘행동’과 관련되면 ‘의지’(will)가 되고, ‘정신’(mind)과 관련되면 ‘마음’(heart)이 된다. 그리고 ‘마음’이 뚜렷하게 움직일 때 이를 ‘감정’(affections)이라고 부른다.(149) 


    그렇다면 이 감정이 왜 그리 중요할까?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신앙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행동의 근원이 바로 감정이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은 이 감정 안에 존재해야 한다. 그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속한 일들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에 생생하고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곧,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은 믿음에 관한 일이 감정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믿음은 이러한 거룩한 감정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가 “대체로”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드워즈는 모든 감정을 긍정하거나 반대로 부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하였다. 대신 그는 감정들을 잘 구별하여, 그 중에 참된 감정을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신앙 감정을 분별하는 판단근거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 자신이 경험한 부흥운동을 통해 거룩한 감정을 구별하는 표지들(signs)을 제시하였다.



거룩한 실천 : 표지 중의 표지

    이 짧은 글 안에 에드워즈가 말한 모든 표지들을 모두 다룰 수 없기에, 필자는 그 중에 마지막 항목인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에드워즈는 앞선 열한 가지 표지들을 실천의 개념으로 재조명하면서, 그 모든 것들이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다른 모든 표지들을 검증하는 최후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은 표지 중의 표지요, 최고의 표지이다. 그는 실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참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크고 확실한 표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는 거룩한 삶은 은혜의 모든 표지 가운데 최상의 표지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567) 


    에드워즈는 부흥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체험을 통해 변화를 보인 후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실천의 지속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실천이 지속되어 질 때 우리는 그 마음의 동기를 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직접 보시지만, 사람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실천의 내용이 동기와 함께 연결되어있어야, 참된 은혜와 참된 신앙을 거짓된 것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어떤 사람이 단순히 실천을 했다고 해서 그의 내적인 동기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실천이 내면의 성향을 모두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으로 볼 수 없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는 몸의 행동과 영혼의 행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 사람의 신앙이 참된지 아닌지를 분별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실천을 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는 당시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를 내적인 체험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의 실천 또한 체험이라고 주장하며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부분은 영적인 실천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작용들에는 영적인 실천을 하고자 하는 체험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실천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체험적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지 않다. (626)



이신칭의와 영적 실천

    그렇다면 실천에 대한 강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와 부딪히지는 않을까? 개신교인들이 흔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에 주저하는 이유는 이러한 강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려에 대해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행위나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의 가치로움이나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상쇄하는 것으로서 여기시지 않으시며,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야 할 이유로 여기시지 않는다.(631)


    이처럼 실천은 은혜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를 증명하는 표지다.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한다면,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이신칭의론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이 된다. 더욱이 에드워즈는 오히려 성경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의 말씀 뒤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약속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배우고 본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 외에 여러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면서, 성경은 이신칭의와 실천의 필요성을 연결하고 있기에 서로 모순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증거할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실천]을 경시하고, 강조하지 않는 것은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적이요, 옛 언약에 속한 방식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또한 실천에서 나타나는 은혜의 작용들과 효과적 역사를 무시하고, 철학이나 체험에서 얻은 명상으로 은혜와 양심의 내적 작용들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능력과 바르게 구별하는 능력만 믿고 거의 전적으로 깨달음과 이런 내적 작용들의 방식과 방법만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경건의 표지로서 성경이 가장 명백하게 언급하고, 가장 자주 강조하는 것들 외에 어떤 더 나은 또는 더 높은 수준의 표지를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636) 



신앙 감정과 영성 목회

    오늘을 사는 우리 개신교인들에게 영성이란 무엇일까? 영성이란 단어는 이제 우리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영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은 영성이란 단어를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영성을 ‘개인적인 기도생활과 방법’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많은 교회의 기도원들이 영성훈련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는 것을 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성에 대한 이해는 영성을 극히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의 개신교 영성학자 조셉 드리스킬(Joseph Driskill)은 개신교 영성의 특징 중에 하나가 사회참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영성이 자기 자신의 사적인 영적 추구에 국한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고 바른 기독교 영성이라 하기 어렵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약 지금 생존해 있다면, 참된 영성의 본질에 대해 무엇이라고 조언할까? 에드워즈에게 있어 신앙 감정은 그저 뜨겁게 찬양하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구하도록 이끌고, 더 나아가 실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 감정은 행동으로 실천하게 만드는 감정이며, 그러기에 참된 신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 우리의 영성을 살펴보면, 영성은 그저 기도 생활의 한 방편이나 바쁘고 지친 현대의 삶에서 우리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한 하나의 훈련이라고만 할 수 없다. 특히 개신교 영성은 이신칭의의 믿음을 작은 예수의 삶으로 살아내는 참된 신앙의 요체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성 목회란 목회자가 회중 안에 한 순간의 ‘뜨거운 감정’을 부추킴으로써 교회의 외적 부흥을 만들어 내려하는 기술이 아니라, 교인들이 참된 신앙으로 세상에서 지속적인 실천의 삶을 살아가도록 목회자 자신이 먼저 ‘거룩한 감정’을 품고 함께 걷는 걸음이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권철우.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 연구원.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기독교 영성)에서 수학하였고, 현재는 미국 유마장로교회 담임목사이다. 《백투더클래식》을 공저하였다.  


'산책길'은 2015년 한 해 동안 기독교 월간지 목회와신학에 '영성 고전에서 배우는 영성 목회' 시리즈를 연재해왔습니다. 목회와신학의 양해를 얻어 이곳 산책길 팀블로그에서도 매달 글을 게재합니다. 위의 글은 2015년 12월 호에 실린 마지막 글입니다. 그동안 연재를 읽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posted by 바람연필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란" (마르틴 루터)

한 줄 묵상 2015.10.26 14:23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자신 안에 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서 산다."


"We conclude, therefore, that a Christian lives not in himself, but in Christ and in his neighbor. Otherwise he is not a Christian. He lives in Christ through faith, in his neighbor through love." 


- "The Freedom of a Christian," in Martin Luther, Three Treatises (Fortress Press, 1970), 309.


믿음이란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내 안에 갇혀 지내지 않고

자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록

이웃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스도는 

나와 너 "사이"에 자리하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이 신비 안으로 깊이 들어갈 때

우리는 진짜 '나'가 된다. 


'나'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는

내가 모르는 나다. 

사랑할 때 나오는 나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나오는 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만날 때 나오는 나다. 


그 나가 

진짜 나다. 


그 나를 부르고 계신다. 


진짜 나를 불러 내신다. 


"믿음으로" 살라 하신다.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체험' 이상의 것 (본회퍼)

한 줄 묵상 2015.06.06 08:4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후 12:7). 우리는 하나님 '체험'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체험'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 받는다.  '은혜 체험'으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 얻는다. 은혜는 은혜 '체험' 이상의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믿어야' 하는 무엇이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Spiritual Ca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2), 55. 


자신에게 하나님 '체험'이 부족하다며 근심하는 이들에게 주는, 루터교 목사 본회퍼의 영적 조언이다. 


하나님의 임재/현존을 '느끼는' 것은 귀한 체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현존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말씀'에 입각해 하나님의 임재/현존을 '믿는' 이는, 

믿고 걷는 이는 

하나님의 임재/현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믿음은 걷는 것이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 만을 가지고서 늘 걷는" 것이다.  


바닥에 드러누워 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걷고' 있다면,

정말 '믿는 이'다.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아니고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한 줄 묵상 2014.11.25 07:10

그리스도교 사랑의 뿌리는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아니고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새명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


사람 사이에 생기는 불일치에 대해 우리는 미움과 증오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책이 아닌 것을 알기에 우리는 미움과 증오를 싸워서 이겨내려고 한다. 계명을 지키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의지로 해결할 수 없다. 불일치를 일으킨 상대방이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 미움과 증오는 뽑아도 피어나는 여름의 잡초처럼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머튼은 사람이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어도 하나님에게 사랑받는다는 믿음으로만 미움과 증오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참된 해방을 경험하고 재일치의 고통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 유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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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해 낸 공감과 믿음의 허상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4.09.20 02:05

내가 만일 (내 생각처럼) 세상의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하였다면, 나 자신에게 슬픔이 닥쳐왔을 때 이처럼 압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상상 속 내 믿음은 질병’, ‘고통’, ‘죽음’, ‘외로움등으로 이름 붙여진 가짜 돈으로 계산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지 어떨지 문제가 되지 전까지는 그 밧줄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자, 믿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 C.S. 루이스, 강유나 옮김.《헤아려 본 슬픔》 홍성사, 61.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 행복을 경계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세속적 성공에는 어떤 함정이, 반면에 고난에는 숨겨진 영광이 있다는 메시지를 듣는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건데, 순례자들에게 고난은 ‘영적 여정(spiritual journey)’이라는 패키지 여행에 포함된 예정된 계획임에 틀림이 없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으며,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종국에는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듣기도 하였고, 진지한 기독자라면 이것을 받아들였으리라.  

날라리 신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영적 여정 안에서 만나게 될 고난과 슬픔이 무엇일지 상상해볼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이 닥칠 때 어떻게 대처할지 미리 계획도 짜본다. “나에게 욥의 불행이 닥치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애통하는자와 공감하며,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마련해본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가늠한다.   

이것은 루이스가 말하는 “이러한 일들을 계산해 넣고 있었던 믿음”이다. 상상 속의 믿음. 실제가 되기 전까지는 진실을 알 수 없는 믿음 말이다. 상상 속에서는 거뜬히 이겨냈지만 실제로는 어떨까? 루이스에 따르면 만일 두 가지가 충족된다면 실제로도 거뜬히 이겨낼 것이다. '믿음이 진실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염려가 진정한 것'이었다면 말이다.

나는 종종 설교단에서 '당신들의 고난과 슬픔은 우리 주님이 넉넉히 이기신다.'라고 힘주어 선포한다. 그러나 나는 저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작은 일에도 밤잠을 못 이루며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타인의 슬픔에는 불굴의 믿음이 발휘되지만, 내 자신에게 닥치면 먼지 같은 슬픔에도 압도된다. 매일의 목회 경험과 세월호 사건을 통해 보면, 단언컨대 공감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저능아에 가까우며, 믿음이라는 측면에서는 밧줄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밧줄에 의지하여 이렇게 잘 살고 있노라'고 말하는 허풍쟁이에 불과하다. 

아! 상상 안에만 존재했던 믿음과 공감이란 얼마나 비루한지! 
주여! 불쌍히 여기시어, 종이로 만든 집은 부수시고, 진실한 믿음과 공감으로 다시 서게 하소서. / 김종수 



posted by 바다 달팽이

행복하고 거룩하게 (존 웨슬리)

한 줄 묵상 2014.03.28 03:36

참된 신앙, 즉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바른 마음은 거룩할 뿐 아니라 행복하다.  

- 존 웨슬리, 설교 no. 7, ‘The Way to the Kingdom’ (1749)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거룩할까? 행복하지도 거룩하지도 않다면, 나는 이미 삶의 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내가 행복을 위해 하는 일이 거룩함을 외면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행복은 가짜일것이다. 내가 거룩해지려는 노력이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거룩함은 참된 것이 아닐 것이다

/ 새결새김 남기정


posted by 새결새김

믿음의 주인 (김교신)

한 줄 묵상 2014.03.14 00:00

"생명이 그 귀중함을 망각하고 그 자존심을 투기(내던져 버림)할 때에 그 생명은 일단(계단의 한 층계)을 비약한 생명이요, 한 층 더 고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 생명의 극도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봅니다. 말씀이 육으로 되사 세상에서 생활하셨으나 저는 보내신 이의 의사에 반하여서는 한 가지도 한 것이 없었고, 보내신 이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십자가에까지 무능한 자처럼 달려 버렸습니다."

- 김교신 지음(1901-1945), KIATS 엮음《김교신(서울: 홍성사), 46









맨 날 죽으란다! 예수님처럼 또 죽으란다! 투기한(내 던져진) 생명이 고귀한 생명이란다! 휴! 힘들다. 그 길을 걷기가 참 벅차다.


김교신의 글을 읽다가 같은 맥락의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고 궁금해진다. 김교신이 그리고 바울이 날마다 죽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이었을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때문이란다. 난 역시 믿음이 없어….


그럼 그 믿음이 뭘까? 난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내가 좋을 때만 예수의 ‘내’ 믿음이 나오지, 내가 죽고 깨지는 순간에는 ‘내’ 믿음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주체가 ‘나’일까? ‘내 믿음’일까? 그러면 내가 종교생활을 잘하면 내 안에 꽉 차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는 그런 ‘내 믿음’일까?


헬라어로 갈 2:20을 찾아본다. 이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고싶다. 헐! 이 믿음이 내 것이 아니란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란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여격이기에 여격이 이 믿음의 주인인데, 20절의 여격은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다. 그 믿음의 주인이 가 아니란다.


그렇다!! 이 믿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많게 보이거나 적게 보이는 내 믿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분이 전폭적으로 내게 넣어주신 선물이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다. 내가 삼층천에 오를 때에도 교만하지 않으며, 내가 스올에 머물 때에도 낙담하지 않는 것은 이 믿음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맨날 죽으란다. 그리고 또 죽으란다. 그래도 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죽을 때 내 믿음이 아닌 그 분의 믿음이 날 살리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투기한(내 던져진) 생명이 되면 고귀한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 이경희


posted by 비회원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백투더클래식 2013.12.02 11:18
  • 좋은내용감사합니다.우리안에참자유가넘쳐흐르길원합니다.믿음.소망.사랑우리안에그래도중요한건끝까지있을사랑이아닌가싶습니다.독일이란나라에서참으로신성한개혁을주신성직자분들께감사함을느끼게합니다^♥^

    BlogIcon cu 2014.05.16 22:30
  •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4.05.17 10:00 신고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여러분은 한 백화점에서 손님이 가져온 쓰레기를 고급 의류나 최신 모델의 전자제품과 맞바꿔 준다고 하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악취가 코를 찌르고 더러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값진 물건들과 바꿔 준다니요!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나는 맞바꿈’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정말 유명해서 긴 말이 필요 없는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지요. 그런데 그가 1517년에 처음 교회 개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가톨릭교회와 갈라서서 새로운 종파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를 원했지요. 그는 개혁자였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바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1520)라는 편지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글이 바로 이번 호의 ‘백투더클래식’에서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하는 영성 고전입니다.


       이 글은 루터의 개혁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3대 논문 중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매우 중요하고 뛰어난 글입니다. 그는 이 글을 라틴어와 독일어 두 가지 언어로 썼는데, 먼저 라틴어본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글에서 가능한 논쟁은 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서 영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리고 독일어본은 라틴어본을 번역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독일의 교육 수준이 낮은 평신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라틴어본이 좀 더 정교하고 분량도 많지만, 독일어본은 중세 후기의 영적 활기를 간직한 토착어로 쓰여진 문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 고전 작품의 영적 활기가 잘 나타나는 구절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믿음,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


믿음은 영혼에게 참 많은 것을 부여해서, 영혼이 신성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도록 합니다. ……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영혼을 신부로서 그녀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이 결혼 후에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혼이 한 몸이 됩니다”(엡5:30).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I. 12.[각주:1]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교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영혼이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결혼반지”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랑과 신부의 하나됨으로 이해한 경우는 루터 이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바울의 글에 그러한 이해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 교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남녀 사이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를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와 영혼의 연합을 ‘영적 결혼’의 모델을 사용해서 설명하였습니다. 


1520년에 출간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속표지

     그런데 이 ‘결혼’에 있어서 믿음이 결혼반지, 또는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작용한다는 루터의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 결혼은 모든 결혼 중에 가장 완전한 결혼이며, 이 연합이야 말로 믿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의 주장, 곧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전의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절연하고 이성 위주의 ‘합리적’ ― 그러나 사실은 ‘메마른’ ― 개신교 전통을 세운 것이라는 견해는 오해입니다. 그보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자였던 루터가 기독교 전통 가운데 전해져 오는 신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신앙고백적 명제들을 ―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시다”와 같은 문장들을 ― 이성을 통해서 진실로 인정하고, 감정으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 이상입니다. 루터가 말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실존적으로 진흙탕과 같은 죄의 감옥을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은혜 가운데에서 합당하게 되어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신비와 만나서 하나가 되게 하는 접촉점입니다. 


여기에서 루터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가톨릭 수도승이자 영성 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이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머튼은 그의 책 《새로운 관상의 씨앗들(New Seeds of Contemplation)》에서 ‘관상(contemplation)’의 시작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관상이란 하나님과 영혼이 기도와 활동 가운데 일치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곧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하나님과의 연합도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관상가가 될 수 없으며, 반대로 믿음이 깊어지면 하나님과의 일치도 깊어진다는 것이 머튼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은 “지성적인 동의(intellectual assent)” 그 이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접촉을 갖게 하는 단 하나의 길(the way)”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를 대표하는 16세기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가 토마스 머튼이 믿음에 대하여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신나는 맞바꿈


그러면 영혼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 곧 연합을 이루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제 이 글의 제목인 ‘신나는 맞바꿈’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읽을 때입니다.


이렇게 [영혼과 그리스도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좋든지 싫든지 간에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믿는 영혼 그 자신의 것이 되고, 그 영혼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는 모든 소유들과 복들이 속해 있는데, 이제 그것들은 그 영혼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에게 지워져 있던 모든 악들과 죄가 이제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der fröhliche Wechsel und Streit)가 시작됩니다. (I. 12.)


결혼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는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우리의 모든 약함, 죄, 슬픔, 좌절, 고통, 정죄, 죽음을 가져가셔서 당신께서 그것을 모두 담당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생명, 기쁨, 위로, 은혜, 승리와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엿장수에게 빈 병을 가져다주고 달콤한 엿을 바꾸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교환입니다. 악취로 가득한 쓰레기를 최고급 의류나 전자제품과 맞바꾸는 것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 루터의 확신입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의 밑바탕에는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씨름하다가 믿음을 통해서 자유를 경험한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깔려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설적인 자유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와 같이 믿음을 통해서 시작되는 ‘신나는 맞바꿈’이 가져다주는 혜택입니다. 우리를 끈질기게 옭아매는 죄의 감옥으로부터의 놓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서 연합한 신자들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무엇에도, 누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자유를 우리의 게으름이나 악행에 대한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금식과 같은 육체적 훈련을 하지 않거나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오히려 참된 자유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종으로서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섬김의 수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은 매우 높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 아버지는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자신의 소유들을 나에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아주 기뻐하실 일들을 자유롭게, 기쁘게, 그리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웃들과 관련하여서는 내가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되셨던 바로 그 방식으로, 곧 내가 볼 때 내 이웃들에게 필요하고, 유용하며, 복된 것이라 여겨지는 것만을 행하겠다. 왜냐하면 난 믿음을 통해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Ⅲ. 27.)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은 이제 이웃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던 그 방식으로, 나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행은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삶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르틴 루터가 믿음을 강조하여 선행의 중요성을 축소시켰고, 그래서 현재 개신교회가 말만 많이 하고 행함이 부족하다는 변명은 그 정당성을 상실합니다. 오히려 루터는 당시 중세 교회에서 개인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선행을 건져 올려,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살아가는 높은 수준의 삶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부패와 악행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가 추앙하는 종교개혁자가 말한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구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투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죄와 탐욕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바른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기도 가운데,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와 접촉하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신나는 맞바꿈’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글을 다시 떠올려 보면 루터는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가 시작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아무리 바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삶에서 죄의식, 우울, 슬픔, 두려움, 분노, 좌절 등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나는 맞바꿈’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나는 맞바꿈’은 “분투”이며(I. 12), 믿음은 “항상 증가되어야” 합니다(Ⅲ. 27).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저희에게 굳건하고, 즐겁고, 감사로 가득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 마르틴 루터, Luther’s Prayers (Minneapolis, MN: Augsburg, 1994), 85.


권혁일 / 미국 버클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 (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다. 영성과 문학, 영성과 사회정의, 수도원 영성과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다. Flowers of Contemplation: Peace and Social Justice를 지었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서》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3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곳과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독일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본은 참조하여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풀어내었습니다만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성서를 읽는 법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 줄 묵상 2012.09.09 16:00

"영감으로 씌어진 성서는 또한 그 영감 가운데 읽혀야 한다……성서에서 진정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단순한 마음으로, 믿는 마음으로 읽어라."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c.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 book 1, ch. 5.




"All Holy Scriptures ought to be read in the spirit in which it was written." 영성가들은 성서를 특별한 영감으로 씌어진 책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특별한 영감 가운데 읽혀야 하는 책으로 믿었다. 토마스는 과거 성서 기자에게 임했던 그 영감을 오늘 우리가 받을 때 비로소 우리가 진정한 성서의 독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겸손" "단순성" "믿음"은 그 영감을 사모하는 이의 마음이다. / 산처럼

posted by 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