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을 참는 힘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5.25 21:00

이런 성과[모욕을 참을 결심과 모욕을 모욕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랑을 얻는 것]를 거두지 못하고 굳세게 참는 힘을 기도로써 얻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악마가 선사하는 착각인 것으로, 우리는 그에게 넘어가서 스스로 가장 존경을 받아야할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완덕의 길》에서.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모욕을 참기 힘든 데 있습니다. "나에게 먼저 알리지 않았다. 나만 배제당했다. 내가 모욕당했다. 나를 무시했다. 나는 존재감이 없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모욕당한다는 느낌입니다. 모욕당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주어집니다. 굳세게 모욕을 참아넘길 수 있는 힘이 기도로 주어진다는 것은 큰 위로입니다. 그런데 그냥 굳세게 참는 게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일치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됩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아들이 받아낸 모욕에 비하면 내가 당하는 것은 어떤 것도 모욕으로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그 사랑 안에 머무는 힘을 잃어버리면 내가 존경받을 구석이 있는 사람인 양 생각됩니다. 내가 가진 직분, 내가 가진 사역의 역할, 내가 가진 나이와 경륜이 나의 존경의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예수의 데레사는 그것이 은혜의 선물이 아닌 사단의 유혹임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허겁지겁 기도해가며 지내고 있는 요즘, 가끔씩 주변사람에게 날이 선 목소리가 되어가는 것을 자각하는 요즘, 굳세게 참는 힘을 얻을 때까지 한 자락의 기도라도 마음을 다해 올려드려야겠습니다. / 진정한 열망 유재경

posted by 진정한 열망

영적 결혼 안에서 평안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5.03.11 17:10

영적 약혼은 이와[영적 결혼과] 달리 흔히 서로 갈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 하지만 영적 결혼의 은혜에 있어서는 이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항상 그 중심에 하나님과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서 강이나 우물로 떨어지는 물과 같이 똑같은 물이 되어버려서, 강물과 떨어진 물을 나눌 수도 따로 갈라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일곱 번째 성채, 2장. 4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한 영혼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 자세히 그려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내면의 성 안에서 영혼은 하나님의 신부로 발견된다.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 상태인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테레사는 이 연합이 하늘의 물이나 땅의 물이 하나와 같은 것처럼 분리될 수 없는 온전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고 말씀하신 대로 평안한 상태이다.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능력, 감각, 감정은 이 평화 속에 있지 못할 때라도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신랑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며 평화이다. 나의 생각이나 행위로 깨뜨려질리 만무한 연합이며 결혼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평화로 발견된다. 우리 영혼은 결혼 안에서야 사랑이 완성되리라 생각하며 연예와 약혼 그리고 그 결혼까지 나아가려 하지만 주님은 이미 우리와 결혼하기로 하셨다. 그 온전함 안에서 평안이며, 영원한 평화다. 주님, 오늘도 그 사랑과 평화 안에서 발견되게 하옵소서작은소리찾기 박세훈



posted by 작은소리찾기

한가로운 사랑 (아빌라의 테레사)

한 줄 묵상 2014.10.16 09:06

아직도 누에[자기 자신]는 살아 있는 게 아닙니까? 마치 요나의 칡넝쿨을 갉아먹던 벌레와 같이 우리의 자애심, 자존심, 그리고 하찮은 일을 가지고 남을 판단한다든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아낄 줄 모르는 사랑의 결핍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덕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기껏 한다는 노릇이 죄짓지 않으려는 것뿐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에 필요한 그 마음가짐에는 너무나 먼 것입니다. …… 사랑이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인 것입니다.

 -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c. 1515-1582),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 5궁방, 3장. 6절., 4장,10절.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적 여정을 묘사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다섯 번째 궁방(mansion)을 소개한다. 그녀는 누에가 고치를 틀고 죽어 마침내 나비가 되는 변화의 순간이 바로 이 연합과 같다고 밝힌다. 그러나 슬프게도 여기까지 이른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도 이야기한다.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외적 신앙 활동에만 관심을 둔 영혼은, 테레사의 말대로 칡넝쿨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을지 모른다. 기껏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방어적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저 기독교적 색채를 띤 자기 수련일 수 있다. 자기 자신인 누에의 행실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누에를 죽여야 하는 것이 영적 여정의 숙명이다. 자애심과 자존심을 먹으며 한가롭게 사는 삶 대신 차라리 그리스도의 사랑과 함께 불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작은소리찾기 박세훈



posted by 작은소리찾기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 기도와 항해

기타/영성 관련글 2014.10.10 07:19

이 글은 높은뜻 정의교회 '기도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침묵기도를 일상 속에 뿌리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세 번에 걸쳐서 게재합니다. (1) 기도와 항해, (2) 매일의 기도, (3) 삶을 하나로 묶기/ 주선영



침묵 기도, 일상 중에 녹여 내기

(1) 기도와 항해


, 항해

    우리 삶은 한 척의 배가 이쪽 항구에서 떠나 저쪽 항구로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배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도착해서 닻을 내려야할 항구가 있고, 그 항구를 향해 방향을 조정하면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릅니다. 우리 인생, 삶이라는 이 배의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목적지, 하나님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us)는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장 1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배가 도착해야 할 궁극적 항구는 하나님그분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이 배는 지금, ‘하나님을 향하고있습니다. ,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은 여러 가지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 중 기독교영성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기도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일치는 내적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떤 감정이나 심리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 혹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의지, 하고 싶은 것이 같아졌다는 것이며, 더 이상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차원을 훌쩍 뛰어 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의 의지의 일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인간 안에 불타오르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상징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바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세상,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 체계, 사고-생각 체계, 감각 체계, 삶의 방식과 하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을 마음에 담으면서,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배를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배의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적합하게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등 어떤 것이 마음에 담기는 지요?


항해의 분위기

    그러면 이 배의 이름과 그 규모는 어떠할까요? 이것은 이 배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예수님의 세례 체험에 나타납니다. 그 내용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1)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자기-정체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사랑에 가득 찬 기쁨이 하늘에서부터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마음에서 항구히 흔들림 없이 완전히 고착되어 있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가득한 기쁨을 받고 있는 자녀라는 사실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의지입니다.

    비록 이 배가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흔들릴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흔들어 대는 여러 환경적 요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바다를 항해하고 있으니까요.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흔들리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전부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부분입니다. 항해의 더 큰 국면은 이 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사랑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항로를 따라 의연하게 운항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배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16)

   따라서 우리는 삶이 흔들릴 때, 이 배의 궁극적 정체성을 거듭하여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께 청하면서,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이 바로 하늘이고, 그 하늘사이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정체성을 일깨우는 소리는 우리 삶 안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각성시킵니다.


항해, 선택인가?

    망망대해를 운항하는 것 자체에 대해 거부감이 느껴지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쪽 항구에서 닻이 올라간 것 자체가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알건 모르건,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의 배는 이미 이쪽 항구를 떠나 저쪽 항구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항로에 자연스럽게 몸을, 마음을, 삶을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닻을 자발적으로 걷어 올려 운항준비만 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넓고 관대한 마음을 가지면서, 본인의 갈망을 확인합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등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와닿는 구절 하나를 단순한 기도로 하나님께 간절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방향, 즉 목적지에 맞게 배의 항로를 확인하는 작업을 아침에 눈뜨자 마자, 이부자리에 앉아서 합니다. 5분, 10분 정도, 그렇게 조용히 마음의 방향을 잡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 원한다.”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청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합니다.”


- 다음 번에는 "매일의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posted by 해'맑은우리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백투더클래식 2013.12.02 11:18
  • 좋은내용감사합니다.우리안에참자유가넘쳐흐르길원합니다.믿음.소망.사랑우리안에그래도중요한건끝까지있을사랑이아닌가싶습니다.독일이란나라에서참으로신성한개혁을주신성직자분들께감사함을느끼게합니다^♥^

    BlogIcon cu 2014.05.16 22:30 신고
  •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BlogIcon 바람연필 2014.05.17 10:00 신고

신나는 맞바꿈 : 

마르틴 루터에게 듣는 믿음과 자유 이야기



여러분은 한 백화점에서 손님이 가져온 쓰레기를 고급 의류나 최신 모델의 전자제품과 맞바꿔 준다고 하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악취가 코를 찌르고 더러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값진 물건들과 바꿔 준다니요!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나는 맞바꿈’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정말 유명해서 긴 말이 필요 없는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지요. 그런데 그가 1517년에 처음 교회 개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가톨릭교회와 갈라서서 새로운 종파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를 원했지요. 그는 개혁자였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바람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1520)라는 편지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글이 바로 이번 호의 ‘백투더클래식’에서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하는 영성 고전입니다.


       이 글은 루터의 개혁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3대 논문 중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매우 중요하고 뛰어난 글입니다. 그는 이 글을 라틴어와 독일어 두 가지 언어로 썼는데, 먼저 라틴어본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글에서 가능한 논쟁은 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서 영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그리고 독일어본은 라틴어본을 번역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독일의 교육 수준이 낮은 평신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따지면 라틴어본이 좀 더 정교하고 분량도 많지만, 독일어본은 중세 후기의 영적 활기를 간직한 토착어로 쓰여진 문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이 고전 작품의 영적 활기가 잘 나타나는 구절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믿음,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


믿음은 영혼에게 참 많은 것을 부여해서, 영혼이 신성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도록 합니다. ……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또한 영혼을 신부로서 그녀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이 결혼 후에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영혼이 한 몸이 됩니다”(엡5:30). 

-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I. 12.[각주:1]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以信稱義),’ 곧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교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영혼이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결혼반지”로 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신랑과 신부의 하나됨으로 이해한 경우는 루터 이전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과 바울의 글에 그러한 이해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 교부 오리게네스와 그레고리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남녀 사이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를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와 영혼의 연합을 ‘영적 결혼’의 모델을 사용해서 설명하였습니다. 


1520년에 출간된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속표지

     그런데 이 ‘결혼’에 있어서 믿음이 결혼반지, 또는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작용한다는 루터의 비유는 매우 신선하고 흥미롭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 결혼은 모든 결혼 중에 가장 완전한 결혼이며, 이 연합이야 말로 믿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의 주장, 곧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전의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과 절연하고 이성 위주의 ‘합리적’ ― 그러나 사실은 ‘메마른’ ― 개신교 전통을 세운 것이라는 견해는 오해입니다. 그보다는 원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자였던 루터가 기독교 전통 가운데 전해져 오는 신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루터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신앙고백적 명제들을 ―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시다”와 같은 문장들을 ― 이성을 통해서 진실로 인정하고, 감정으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 그 이상입니다. 루터가 말한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실존적으로 진흙탕과 같은 죄의 감옥을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고, 그리스도인이 은혜 가운데에서 합당하게 되어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신비와 만나서 하나가 되게 하는 접촉점입니다. 


여기에서 루터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가톨릭 수도승이자 영성 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이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머튼은 그의 책 《새로운 관상의 씨앗들(New Seeds of Contemplation)》에서 ‘관상(contemplation)’의 시작은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관상이란 하나님과 영혼이 기도와 활동 가운데 일치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곧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정점으로 여겨지는 하나님과의 연합도 믿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관상가가 될 수 없으며, 반대로 믿음이 깊어지면 하나님과의 일치도 깊어진다는 것이 머튼의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은 “지성적인 동의(intellectual assent)” 그 이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접촉을 갖게 하는 단 하나의 길(the way)”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신교를 대표하는 16세기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가 토마스 머튼이 믿음에 대하여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신나는 맞바꿈


그러면 영혼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 곧 연합을 이루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제 이 글의 제목인 ‘신나는 맞바꿈’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읽을 때입니다.


이렇게 [영혼과 그리스도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좋든지 싫든지 간에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은 믿는 영혼 그 자신의 것이 되고, 그 영혼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 그분의 소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는 모든 소유들과 복들이 속해 있는데, 이제 그것들은 그 영혼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영혼에게 지워져 있던 모든 악들과 죄가 이제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der fröhliche Wechsel und Streit)가 시작됩니다. (I. 12.)


결혼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자는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합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신부인 우리의 모든 약함, 죄, 슬픔, 좌절, 고통, 정죄, 죽음을 가져가셔서 당신께서 그것을 모두 담당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유, 생명, 기쁨, 위로, 은혜, 승리와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엿장수에게 빈 병을 가져다주고 달콤한 엿을 바꾸어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나는 교환입니다. 악취로 가득한 쓰레기를 최고급 의류나 전자제품과 맞바꾸는 것보다도 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 루터의 확신입니다. 이러한 그의 확신의 밑바탕에는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씨름하다가 믿음을 통해서 자유를 경험한 그의 개인적인 체험이 깔려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역설적인 자유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와 같이 믿음을 통해서 시작되는 ‘신나는 맞바꿈’이 가져다주는 혜택입니다. 우리를 끈질기게 옭아매는 죄의 감옥으로부터의 놓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서 연합한 신자들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무엇에도, 누구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자유를 우리의 게으름이나 악행에 대한 핑계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는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금식과 같은 육체적 훈련을 하지 않거나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오히려 참된 자유는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종으로서 섬기게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섬김의 수준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과 같은 매우 높은 수준이어야 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 …… 아버지는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자신의 소유들을 나에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아주 기뻐하실 일들을 자유롭게, 기쁘게, 그리고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이웃들과 관련하여서는 내가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되셨던 바로 그 방식으로, 곧 내가 볼 때 내 이웃들에게 필요하고, 유용하며, 복된 것이라 여겨지는 것만을 행하겠다. 왜냐하면 난 믿음을 통해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분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Ⅲ. 27.)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영혼은 이제 이웃을 위해 내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던 그 방식으로, 나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행은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삶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마르틴 루터가 믿음을 강조하여 선행의 중요성을 축소시켰고, 그래서 현재 개신교회가 말만 많이 하고 행함이 부족하다는 변명은 그 정당성을 상실합니다. 오히려 루터는 당시 중세 교회에서 개인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선행을 건져 올려,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살아가는 높은 수준의 삶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부패와 악행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개신교가 추앙하는 종교개혁자가 말한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구현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투


이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죄와 탐욕으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신나는 맞바꿈’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바른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기도 가운데,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신비와 접촉하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신나는 맞바꿈’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앞서 인용한 글을 다시 떠올려 보면 루터는 “신나는 맞바꿈과 분투가 시작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아무리 바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삶에서 죄의식, 우울, 슬픔, 두려움, 분노, 좌절 등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나는 맞바꿈’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신나는 맞바꿈’은 “분투”이며(I. 12), 믿음은 “항상 증가되어야” 합니다(Ⅲ. 27).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 당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저희에게 굳건하고, 즐겁고, 감사로 가득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 마르틴 루터, Luther’s Prayers (Minneapolis, MN: Augsburg, 1994), 85.


권혁일 / 미국 버클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기독교 영성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기독교 영성 고전 학당 ‘산책길’ (spirituality.co.kr)의 연구원이다. 영성과 문학, 영성과 사회정의, 수도원 영성과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다. Flowers of Contemplation: Peace and Social Justice를 지었고, 《제임스 게일》, 《베네딕트의 규칙서》 등을 번역하였다.



 '산책길'은 2013년 1월부터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백투더클래식'(Back to the Classics)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목표는 영성고전에 담긴 지혜를 통해서 현대 교회와 사회를 조명하고 필요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2013년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 이곳과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들은 독일어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본은 참조하여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풀어내었습니다만 따로 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위-디오시니우스와 성탄절

한 줄 묵상 2012.12.14 12:51

우리는 보다 높이 올라가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분[각주:1]은 영혼이나 정신이 아니다. 또한 상상력, 확신, , 또는 이해를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말 그 자체도 아니며, 이해 그 자체 아니다. …… 그분은 긍정(assertion)과 부정(denial)을 넘어선다.”


위-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 5세기-6세기 경 활동), The Mystical Theology

Ch. 5 in Pseu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Mahwah, NJ:Paulist, 1987),141.


고대 영성가 위-디오니시우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을 완전히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그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을 모두 버려 두고서 부정을 통해서상승하여, 더 나아가서 '긍정과 부정을 모두 초월하여' 완전히 하나님에 속한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고 가르친다. 부정, 상승 그리고 엑스타시 (ecstasy).’ 이렇게 이르는 하나님과의 합일(unity). 


그가 말하는 '부정'영적상승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이 부정은 그런 부정 자체를 거부하고 초월하는 것이다그게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그 분이 생각이 난다당신이 누릴 영화를 다 포기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이 땅에 오신 분. 그리고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엑스타시로 다시 아버지와 합일되신 예수님. 대강절 보내고 있는 오늘 그 분이 생각난다.


그분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부정을 우리가 배울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통해 주님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될 때, 성탄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참으로 알게 되리라! 나무잎사귀


 

  1. 원어에서 3인칭 대명사로 되어 있는 '그것'은 문맥상 모든 개념적인 것들의 최상의 원인(the supreme Cause of every conceptual thing),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 편의상 '그분'이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posted by 비회원

밀, 야수, 그리고 빵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한 줄 묵상 2012.09.30 02:35
  •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의 밀이고 우리의 운명을 부서지고 갈리는 것이며 우리의 결국은 그분의 빵이 되는 것이다...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양식이 되어고 누군가를 살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의미, 제자의 길...많은 것이 떠오르지만, 감히 뭐 보텔말이 없이 그저 숙연해지네요...이런 신앙의 선현들이 있어 바라볼 수 있는 것마저 복이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새결새김 2012.10.01 03:55 신고

"저는 모든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당부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방해하지 않는다면, 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기쁘게 죽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간청하니 저에게 적절하지 않은 호의를 베풀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야수들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야수들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밀입니다. 그리고 야수의 이빨에 갈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순전한 하나님의 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of Antioch, ? ~ ca. 108), Letter to the Romans, Ch. 4.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00년을 전후해서 시리아에 위치한 안디옥의 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 황제 때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사형을 선고 받고 로마로 압송을 당했다. 그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야수들의 먹이가 될 예정이었다. 로마로 붙잡혀 가는 도중에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구출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그대로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놓아두라고 부탁하였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이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순교를 통해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편지 곳곳에서 절절하게 배어나왔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밀'이고, 운명은 '야수의 이빨에 갈리는 것'이며, 소망은 '하나님의 빵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열망과 용기는 조그만 어려움에도 쉽게 낙심하고, 역경을 피하고 싶어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이그나티우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렇게 말뿐만이 아니라 죽음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였던 이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신들의 죽음으로 구현해내었다(요한복음 12:24).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순교에 대한 이런 열망은 로마시대의 박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피어난 것이지만, 그의 편지에 담긴 진지함과 용기는 오늘 나의 정체성과 가야할 길과 소망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 바람연필

posted by 바람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