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후정 옮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44 쪽.
1726년에 …… 내 마음, 즉 내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비록 내가 인생 전체를 그분께 드린다고 해도 내게 아무런 유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의도의 단순성(simplicity of intention)과 정감의 순수성(purity of affection),” 즉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의도와,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배하는 하나의 열망은 “영혼의 두 날개”이며, 이들 없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3, p.8).
성탄과 주현절이 있는 이 절기는 우리에게 오신 주님과 더불어 새로이 영적 여정을 시작하기에 좋은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절기에, 한 평생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열망으로 살았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글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분의 글을 통해 신앙 생활의 갱신과 진보를 갈망하시는 분들이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책을 쓰게 된 이유
이 책의 원 제목은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입니다. 이 책은 웨슬리에 의해서 1767경에 초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웨슬리는 그 당시까지의 자신의 영적 여정과 초기 감리교의 성장에 맞추어, 그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 여러 해에 걸쳐 인도되어 온 단계들을 평이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가 "한 시기 한 시기에 무엇을 생각했으며 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 1, p.7).
웨슬리는 1730년 중반부터 영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며,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던, 감리교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시작부터 일관되게 성화와 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파급력이 커져가는면서 웨슬리의 완전 사상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고 또 그 사상을 오해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논란들을 거치면서 웨슬리는 완전 사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반드시 강조되어야할 가르침이라는 점을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이래 20년 넘게 수많은 사람들과의 논쟁의 논쟁을 거치면서 가다듬어온 자신의 완전 교리를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성서적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지를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동료 감리교인들을 위해서 간결하지만 신중한 필치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모든 신자들의 삶의 목표
웨슬리가 말하는 완전이 무엇인지를 간략한 몇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은 웨슬리 자신의 요약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완전은 삶 전체를 하나님게 바치는 의도의 순수성이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한 소원과 한 의도만이 우리의 기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또 다른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마음 전체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 모든 내적 외적 불결함에서 깨끗해지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 그것을 창조하신 분을 완전히 닮는 형상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27, p.135).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성화의 실천과 이의 전파를, 기독교 신앙생활의 요체요 하나님께서 웨슬리와 감리교인들에게 맡기신 “지상至上 과제” (Grand Depositum)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의 완전 사상은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줄곧 궁극적인 가치로 높이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에게 제안할 행복도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을 지으신 분과 연합하는 것이요,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사귐’이 있는 것이며, ‘주와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추구할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즉 시간과 영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일로 향하는 한에서 갈망하십시오 (§6, p.10).
웨슬리가 제시하는 완전/연합은 자기을 비움을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주여,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께 돌려드리기 위해 제가 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나 자신의 무(nothingness)로 돌아갑니다. 마치 공허하고 어두운 공기가 태양의 빛으로 충만해질 수 있듯이, 당신에 의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공허함 외에 무엇이 천지간에 당신 앞에 가장 완전한 피조물이겠습니까? …… 오, 이와 같이 당신의 은혜와 선행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되돌려드릴 수도 있는 기능을 저에게도 주십시오! (§25, p. 130-31)
이 기도문이 담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 통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 (imputation)와 우리의 응답의 순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다가가게 된다(impartation)는 점입니다. 인간의 선행(善行)은 바로 은혜에 대한 이러한 응답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어서 선행보다 은혜의 역할을 극히 중시하는 개신교 전통의 사람들에게 큰 시사점이 있습니다.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 혹은 “오직 은혜로만”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고집하는 사람들(유신론자唯神論者들, Solifidians)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강물이 모두 바다 속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의인들의 몸과 영혼과 선행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거기서 그의 영원한 안식 속에 살게 됩니다” (§25, p.121).
선행은 이를테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잃어지기 전에는 마지막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선행에게는 일종의 죽음으로서, 우리의 육체의 죽음과 흡사하다. 즉 육체는 자신에게 충만해질 우리의 영혼, 혹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자신을 잃기 전까지는 그 최고의 생명 즉 불멸의 생명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선행이 이 영적 죽음으로 잃는 것은 그 선행에 들어 있던 지상적인 필멸의 요소뿐이다 (§25, p.130).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온전한 사랑의 실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웨슬리는 “성화와 완전을 일차적으로 교리로 보다는 기독교적 삶의 주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머릿말,” p.3). 그래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을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완전한 사랑, 순결한 사랑, 거룩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최선을 다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 말로 기독교적 삶의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이 완전하고 거룩한 사랑의 중요성을 우리가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을 이 세상의 삶에서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느냐는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점을 신중하게 검토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의 원천이시며, 인간의 사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 그리고 올바른 응답을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전제하고, 각자의 삶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것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실천적, 경험적, 윤리적 차원을 포괄하여 아주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성도의 인격과 성품, 기질과 이의 변화 등에 관한 실천적 제안과 충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웨슬리는 이러한 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문답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가르침들이 감리교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각종 모임들 (신도회, 속회, 밴드, 연회 등)에서 신자들의 영적 지도를 위해 사용되었던 정황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런 문답들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의 영성 생활에도 도움이 될만한 제안들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인에게 가지는 의미: 이성과 경험의 시대에 완전의 삶을 검증함
웨슬리가 살았던 18 세기 영국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 통하는 면이 많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 혁명 이후 산업화로 인해 사회구조가 급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문화 사상적으로도 과학적 사고와 이성적 추론, 경험과 실증 등을 통해 전통적 가치들을 재평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 실천 전통들 중에는 18세기 영국의 신앙운동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인지, 웨슬리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그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행태를 보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현실에 와닿은 웨슬리의 제안 한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웨슬리가 당시의 열광주의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저 교만의 딸, 열광주의를 경계하라. 오, 그것을 극도로 멀리하라. 과열된 상상을 결코 용납하지 말라. 아무 일이나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으로 속단하지 말라. 꿈, 음성, 인상, 환상, 계시 등을 쉽사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상정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도 있고, 본성으로부터 올 수도 있으며, 마귀에게서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들을 다 믿지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라.’ 모든 것은 기록된 말씀으로 시험해 보고 모두 그 말씀 앞에 굴복하게 하라. 당신이 만일 조금이라도 성경에서 떠난다면, 실로 혹은 어느 본문에 관해 그 문맥에 비추어 문자 그대로의 명백한 뜻에서 떠난다면, 당신은 언제나 열광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理性)이나 지식 또는 학문을 멸시하거나 경홀이 여겨도 마찬기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탁원한 선물로서 가장 고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 (§25, p.110).
웨슬리는 여기서 하나님 체험을 추구함에 있어서 주관적 느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의 위험성에 대해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하는 중요한 하나의 수단(means)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 옳바로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웨슬리가 지적하듯이 우리의 감각과 욕망과 감정이 ‘자기 부정’을 통한 정화purification를 거쳐야 합니다. 또한 자기 경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검증이 필요합니다. 이것에 성서는 언제나 중요한 표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웨슬리가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문자주의적 해석이나 축자영감설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그 부분이 속한 성경의 넓은 문맥과, 역사적 정황을 감안해서, 신학적 성과와 교회의 전통의 토대 위에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완전 성화의 삶에 중요한 여러 주제들을 웨슬리는 소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만, 율법무용론(反율법주의), 유신론(唯信論, Solifidianism), 분열 (이들은 경계의 대상들이다), 그리고 의도의 순수성, 환대, 복종과 자기포기, 경청, 인내, 끊임 없는 기도, 실천, 깨어있음, 선행 (이상은 수련의 덕목들이다)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5, pp. 86-121).
신앙 생활의 새로운 활력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새롭운 활력을 얻는 일은 우리의 신앙의 궁극적 모습이 무엇이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얼마나 좋고 기쁘고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런 자각은 우리 속에서는 그것을 이루고 싶은 열망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이 신앙 생활을 일신하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책은 우리 신앙 생활의 궁극적 목표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무엇이며,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게 되는지를 소개해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 새결새김
그리스도인의 완전
- 저자
- 존 웨슬리 지음
- 출판사
-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 2006-11-10 출간
- 카테고리
- 종교
- 책소개
-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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