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오늘 세례를 받고 기독인이 된다. …… 오늘, 네가 기독인이라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존재방식에 있어서만 성립할 것이다. 즉 기도하는 것과 인간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독교에 관계된 것에 대한 일체의 사유, 말, 조직은 이 기도와 이 행위로부터 새롭게 나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어른이 된 후에는 교회의 모습은 많이 변화해 있을 것이다” (1944년 5월 어느날).
- 본회퍼 지음(Dietrich Bonhoeffer, 1906-1945), 고범서 옮김,
《옥중서신》 (The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183.
고려말기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돕기위해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방원은 "하여가"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본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그러나 정몽주는 공민왕(고려)에 대한 충정을 ‘단심가丹心歌’로 표현하며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그의 죽음을 통해 한 주군(공민왕)을 ‘단심’으로 섬긴 신하의 기개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났지만, 2013년의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몽주 못지 않는 단심(丹心)의 절개(節槪)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군’찾기, 즉 가야할 방향부터가 틀어지면 인생 전체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히고 섥히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 우리는 우리의 주군을 단심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세상, 두 주인을 섬기고 있는가?
그래서인지 오늘의 본회퍼의 메시지는 단심을 가지려는 신앙인에게 간결하다. 그는 기독인은 ‘기도’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먼저 기독인이 된다는 것은 내 주군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고, 그분의 뜻을 분별하며, 그분과의 만남을 경험한다. 기도를 통하지 않는다면, 신앙 안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인이 된다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 본회퍼의 주장에 의하면 - 반쪽 기독인일 수밖에 없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정의를 행하고 있는가?
우리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와 핏값으로 겨우겨우 세워진 조선의 산야가 촛불로 뒤덮이고 있다. 사람들이, 유모차를 끈 주부들이 촛불을 들고 밖으로 나간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그럼 우리네 교회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지금 교회는 사실을 덮고 참된 것을 가리고 있는 이 두터운 어둠을 가르는 정의의 빛을 비추고 있는가? 공권력이 중립을 지키기는 고사하고, 권력자의 윤락녀로 전락한 이 시점 앞에서 교회는 정의의 빛을 비추고 있는가? 주군을 향한 단심을 지키다가 유명을 달리한 ‘정몽주와 본회퍼’에게 유독 부끄러운 밤이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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