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중략)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윤동주(1917-1945), <쉽게 씌어진 시> 부분, 《정본 윤동주 전집》(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128-129.
2월 16일, 오늘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에서 옥사한 날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얻기 약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 새벽,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시는 오직 다섯 편만이 전해 질 뿐인데, 이 시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쉽게 씌어진 시>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약 10제곱미터(3평)의 좁은 다다미 방에 앉아 있고,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린다(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밤비는 그의 귀에 무엇이라고 속살거렸을까? 나라를 잃어버리고 침략자의 땅에 유학을 온 청년은 좁은 육첩방, 곧 자신만의 공간에서조차 '집에 있는'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있음을 절감한다. 이와 같은 깊은 소외와 고독 그리고 단절감이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 침입한다. 이러한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든다. 곧, 통렬한 비정체성(nonidentity)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추구하게 하였다. 청년은 어둡고 어려운 조국의 현실을 뒤로 하고, 부모님이 보내 주는 학비를 받아 '쉽게 쓰여지는 시'처럼 쉽게 가는 삶을 살고 있음에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에게 "시인"의 길을 걷는 것은 "슬픈 천명"이다. 그러한 부끄러움과 괴로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참된 자아인 "최후의 나"와 대면하게 된다. 그 최후의 나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등불을 밝혀 방 안의 어둠을 조금 몰아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온 세상을 밝게 비출 광명의 아침을 기다린다. 그는 등불을 하나하나 밝히듯, 천명을 따라 시를 한 줄 한 줄 쓰며 어둠을 조금씩 내몰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마지막 연에서는 자신의 참 자아와의 조우, 화해, 연합이 이루어진다.
일제시대 일본 땅에서 유학 중인 식민지 청년을 생각해 보라. 그는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 그가 어둠과 고통 가운데 있는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연약한 청년의 시를 읽고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그 시편들이 어둠을 밝히는 조그만 등불이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도 무력하고 보잘 것 없는 듯해도, 조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 "천명(天命)"에 순종해서 길을 간다면 어둠을 조금 밝힐 수 있는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빛들이 모이면 아침이 시대처럼 도래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태복음 5:14).
오늘도 남의 나라, 창밖엔 밤비가 속살거린다. /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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