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무라 선생은 여하간 위대한 선생입니다. …… 마침 우치무라 선생 일생의 대 사업인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어 초회부터 비상한 열심으로써 참석하였습니다. …… 당시에 우치무라 선생의 저서를 읽은 것은 독서하였다기보다 기갈(굶주림과 목마름)하였던 자가 몰체면하고 음식물을 탐식한 것이었습니다. …… 다시 말하노니 저는 선생을 가진 사람입니다. …… 우치무라 간조란 인간의 지도를 통하여 복음의 오의(奧義/깊은 뜻)를 가르침 받았다는 것입니다."
- 김교신 지음(1901-1945), KIATS 엮음, 《김교신》(서울: 홍성사), 120, 127, 131.
우리에게 '무교회주의자'란 주홍글씨로 폄하되어 알려진 김교신은 사실, 한국교회가 세계에 내세울 만한 탁월한 교육가이며, 민족운동가요,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 중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다. 농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며 수필가인 유달영, 한국의 슈바이처인 장기려, 《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 그리고 영원한 마라토너 손기정이다. <성서조선>을 통한 그의 삶과 사상은, 암울했던 일제침략기의 민초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깨닫고 '조선산 기독교'를 만들수 있도록 도와준 토양이 되었다.
그가 그렇게 '선생'될 수 있었던 이유, 그렇게 가르쳐 사람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에게 우치무라 간조라는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스승되기보다 오히려 '더 많이 배우는' 제자가 되었다. 그런의미에서 히브리어에 '가르치다'라는 단어가 없다라는 점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히브리어는 '배우다'(라마드)라는 보통형 동사(칼)가 '더 많이 배우다'(리미드)라는 강조형 동사(피엘)이 되면 '가르치다'라는 뜻을 만들어낸다. 즉 히브리어에서 '가르치다'라는 단어는 없고, '배우다'라는 단어의 강조형태인 '더 많이 배우다'가 '가르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고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더 많이 배우라'는 말이다.
이미 모더니즘적인 패러다임이 종언을 고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더니즘적 자기 관리와 자기 강화의 기술로 세상에 영향을 주기위해 '일만 스승'(고전 4:15)이 되려 한다. 그러나 먼저 배움이 없이는, 그리고 더 겸손히 자신의 기갈한 상태를 점검해주고 꾸짖어주는 스승 앞에 더 많이 배우지 않고는, 참 선생이 될 수 없다. 김교신이 먼저 그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에게 몰체면하고 복음의 깊은 뜻을 더 많이 배운 것처럼 이 땅의 가르치려 하는 자들이 먼저 '더 많이 배울' 스승을 가져할 것이다.
지금 너의 상태를 물끄러미 봐주고 그 기갈을 채울 스승을, 그 사람을 가졌는가?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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