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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묵상

‘친함’을 경계하라

롯(Lot)의 제자인 피터가 말했다.

“어느 날 내가 아가톤의 수실에 있는데, 한 형제가 들어오더니 ‘나는 형제들과 함께 살려 합니다.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말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아가톤은 ‘일생 동안 그대가 처음으로 형제들과 합류하던 때에 지녔던 이방인의 마음을 유지하여 그들과 너무 친해지지 않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고 마카리우스가 물었다. ‘이 친함은 어떤 일을 만들어 냅니까?’

‘그것은 강하고 타는 듯한 바람과 같아서 그 바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휩쓸려 날아가 버리며, 또 나무의 열매들도 말라 버리지요.’ 


- 베네틱타 와드 편역, 이후정 엄성옥 공역, 《사막 교부들의 금언》(은성, 1995), 62.


“그 친구, 모르는 사람이 없어!”

사방팔방으로 인맥을 뻗쳐나가는 기술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주요한 미덕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 ‘친함의 미덕’을 사리사욕을 위해 쓰는 이들이 뉴스 지면을 뒤덮는 것은 차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친함’과 형제간의 ‘친밀함’은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사막교부 아가톤은 ‘친함을 경계하라’ 권한다. 그 친함은 광야에 부는 더운 동풍과 같아서, 한 번 불면 모든 것을 날리고 겨우 맺은 열매까지 말려버린다는 것이다.


왜 친함을 경계해야 하는가?

쉽게 ‘호형호제’하는 행위는 내 마음의 외로움을 (어렵게) 하나님으로 채우기보다 (쉽게) 사람으로 채우려는 동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어렵게 하나님으로 채우는 참 기쁨과 안식의 맛을 기다리지 못하기에, 쉽고 빠른 인스턴트적 사람의 관계에서 얻는 피상적 재미로 삶의 의미를 채우려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 앞에 머물며 오래 기다리면서 음성을 듣기(contemplative listening)보다는 사람의 혀가 주는 달콤한 말에만 내 모든 귀를 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깊이 하나님 앞에 ‘경청’하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삶의 한 절 한 절이 쌓이고, 일상 속에서 행간을 읽어내는 소리들을 마음으로 받아내지 않으면, 내 귀를 간지럽게 하는 가쉽거리들에 내 귀를 빼앗기고, 남의 말초신경 따위나 건드리는 값싼 ‘친함’이 후미지게 쌓일 것이다. 그리고 이내, 그 ‘친함’은 뜨거운 동풍이 되어 삶의 종자 씨까지 다 말려버릴지도 모른다.


‘경청’해서 ‘경계’하고, ‘경계’해서 ‘경건’하리!

(하나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사람의 잔재미를 경계하고 되고, 그러면서 주님을 더 닮아가기 원하게 된다.) / 타말파이스 이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