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들이나 그들과 구분된 경험적인 설교가들에게조차 가졌던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외부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 때, 바로 그 때, “너의 상태를 말해 줄 단 하나의 존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은 기쁨으로 요동쳤다.
조지 폭스 (George Fox 1624-1691), The Journal, 1647의 일기 중 11번째 글 중에서
목사로서 살아가기가 적지않게 부끄럽고 부담되는 시절이다. 끊이지 않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기독교, 특히 목사들의 잘못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면 낯이 뜨거워질 때가 많다. 조지 폭스의 시대 때도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들을 불신하였다. 그래서 평신도 설교가들이 나왔고, 또한 다른 이들의 말보다 체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폭스는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죄와 불신앙에 갇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던 시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은혜 가운데서, 믿음과 능력을 밝히시는 분임을 경험하였다.
목사는 또는 신학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 안에서 고통을 벗어 버리고 참된 기쁨을 누리도록 돕는 자이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의 영적인 고통에 둔감하여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목사로서의 나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들이 과연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겸손히 나아가 먼저 나의 영혼을 살펴보고, 다시 사람들을 섬길 수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예전에 썼던 글들을 정리하다가 신학교 시절에 썼던 시 한 편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 때의 열정과 순수함이 십 년이 훨씬 지난 오늘 내 마음에 다시금 돌맹이 하나를 던진다.
신학도
인생을 내어놓고 그 길을 가리라
맘 먹은 지도 수백 일.
내 하나 인생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사명을 쫓으리라 했지만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이 버겁다.
뒤를 보지 말고 그저 나를 따르라는
그 말씀이 이젠 하루하루
나를 체념케하는 그런 몸부림...
하루에 하나씩 썩어져가는 가슴이야
시간을 기울여가며 견딘다지만
갈 길 몰라 멈추어 있는
발걸음은 어떡해야 떼어버릴 수 있을까.
옛날이야 썩은 가슴하고 한 달란트 상금하고
바꾸는 듯한
멋쩍음이라도 있었건만
이젠 아무리 가슴을 썩혀봐야
남는 건
또 하루의 한숨...
이게 정금인가, 이게 그냥 연단인가...
그냥 광야 가운데서 죽어 없어지는
숱한 먼지 중의 하나가 될까
빈 가슴은 애타건만
멀리
내 길을 인도하는 분은
인기척조차 없다.
/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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