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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고전의 벗들 (2차 자료)

벌거벗은 지금(리처드 로어)


벌거벗은 지금


리처드 로어 지음 | 이현주 옮김 | 바오로딸 | 2017년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며 예수께서 하신 첫 선포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것은 “이미 왔고, 계속 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말을 현재에 대한 고도의 깨어있음과 현재에 대한 집중적 축적으로 이해한다. 


요즘 같은 진보된 시간 개념을 가진 우리와 달리, 제자들은 이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제자들은 그들의 전통인 메시야적 종말 세계관에 근거하여 로마제국의 종말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 후의 신자들도 그러했다. ‘하나님 나라’를 -당시 자신들이 가진- 세계 종말론과 연결하고, “언제”와 “어디에”를 더듬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이 아니다. 어떤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그만큼 많은 오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 ‘하나님 나라’를 우리 민족의 내세관과 바로 연결해 이해해 버린 듯하다. 신학적으로 아무리 현재성을 이야기 하고, ‘이미’와 ‘아직’을 학자들이 다 이야기해도, 이 개념은 신자들의 일상에는 아무 힘도 미치지 못하고 마른 잎처럼 맥없이 추락하는 것 같다. - 나는 ‘아직’에 대한 부분은 강조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긴장, 즉 깨어있음이라는 본래적 어법과 다르게 미래적 시간으로 오용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시간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없다고 본다. ‘미래’는 인간중심적 해석일 뿐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것도 ‘모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양산한 시간 개념일 뿐이다.


‘죽은 후 가는 세상’이라는 우리 민족, 혹은 인간 보편의 강력한 내세관 앞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지금’의 나라가 아니라, ‘멀고 먼’ 그리고 ‘이 다음 나중’의 나라로 유보된다.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혹 우리 다음의 후손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금 동시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산 자들’의 나라가 아니라, 죽은 이들만 모여 있는 ‘사후세상’으로 특정된다. 우리는 현재를 충만히 살아있지 못하고, 나중에 갈 그 무엇을 위해, 항상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또한, 현실회피 용으로 사후세계를 들먹인다.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는 ‘사는 것’으로만 알 수 있고 알려 질 수 있는데, ‘개념’으로 안다고 생각한다. 경험보다 개념을, ‘믿는 행위’보다 소위 ‘믿는 다는 생각’을 더 소중히 여긴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에 그렇게나 강력하게 저항하는 우리 인간의 교묘하고 조직적인 인지체계를 보라! 어떻게든 뒤로 미루고 어떻게든 따로 떼어 놓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공간과 시간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하나님 나라’의 그 충만한 현실을 우리에게서 가만히 도둑질 해 간 모습처럼 내겐 여겨진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처럼, 자꾸 채워도 허기지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방식이 이렇게 어처구니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벌거벗은 지금』(The Naked Now)은 우리에게 ‘지금, 현재’에 깨어날 필요성을 이야기 해 준다. 특히, ‘지금 현재’에 깨어나지 못하는 일상의 덫들에 대해,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인간 역사 오류의 산물로서의 종교 전통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현주 목사님의 번역이 너무도 수려해서 한 번에 통으로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번역에 경탄을 하며 읽었다. 


나는 너무나 단순한 오류에 빠져있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라는 그 이름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우리 인간이 가진 알량한 신지식, 그것도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온갖 아픔과 고통을 투사한 두려움과 불안 해소의 신지식과 연결한다거나, 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나라’를 단순 사후세계와 그 사후세계의 앞선 도래 정도로 이해하는,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처구니없는 실수들로 인해, 나는 부끄럽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과거에 얽혀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고 살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늘 전전긍긍하면서 불안하였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께서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지, 나는 오랫동안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 아닌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너무나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지나치게 예민했고, 선을 밟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조심했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선을 밟았고, 그 자책이 너무 심했다. 점점 경직되고 잘 웃지 않았고 항상 너무 진지했다. 내가 살아온 세계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냥 자기중심의 나라였다. 너무나 단순한 오류는 이렇게 도둑질해 갈 수 없는 것을 도둑맞은 느낌으로 살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이것을 알아챈 순간, 나는 그동안 허송세월을 한 시간이 너무나 억울했다. 밝고 호탕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던 수많은 순간들, 사랑하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이름 부를 수 없는 그분과 함께 더 많이 향유할 수 있었던 경이에 찬 생의 순간들, 바보같이 그리고 멍청하게 사기 당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 감사함이 우러나와 깊게 절하고픈 소중하고 고마운 만남들, 그 순간을 향유하지 못했던 자각이 오늘도 다시 나를 일깨운다. 


지금 사랑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한다. 다음은 없다. 지금 하나님과 가까이 못하는데, 나중에는 그럴 것 같은가? 어림없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도 그 거리는 늘 그 거리다. ‘오늘 기도 못했는데, 이따 해야지’ 할 것 없다. 그렇게 미래로 미루고 계획을 세울 것 없다. 그런 생각이 들면, 지금 바로 해라. 잠깐이라도 하고, 곧 즉시 하나님과 함께 현재를 살라. 리처드 로어도 이렇게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영원은 흐른다. 영적 스승들은 우리에게 지금 그 흐름 속으로, 그러니까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들의 한결같은 전제는 “지금 그것을 가지면 그때에도 가질 것이다”이다. 그들은 시간과 영원의 완벽한 연결을 본다. 그들이 죽음이나 심판을 겁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무조건 사랑하신다면 나중에 그 사랑을 바꾸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79)


나는 이 책을 신학생들, 목사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다. 우리는 생생한 체험 없이 신학 책에서 읽은 얄팍한 개념을 가지고 안다고 착각하기 쉽고,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쉽고, 이궁리 저궁리 하느라 머리만 터지도록 바쁜 것을 몸을 놀려 생을 치열하게 사는 줄로 대단히 잘 속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영혼을 맡은 이들은 더욱더 ‘지금’에 깨어나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사물에 대한 관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자기가 그 사물의 실체를 만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관상가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그 자체 안에서 만나야 한다. 이 ‘만남’을 나는 ‘자금 여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음 presence, 현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순간을 알고 그것과 만나는 색다른 길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약하고, 우리를 전혀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44) / 해'맑은 우리 주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