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이 무엇이며, ‘타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우리들의 교회는 오만의 죄, 권력 숭배의 죄, 시기와 환상주의의 죄에 대해서 그것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고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어떤 새로운 ‘종교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닌 ‘생명’을 낳게하는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 본회퍼 지음(Dietrich Bonhoeffer, 1906-1945), 고범서 옮김,
《옥중서신》 (The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213.
아는 동료목사님의 Facebook (이하 페북)은 공중파 방송에서 듣지 못 하는 뒷얘기들로 넘실거린다. 대검찰청 감찰본부의 윤석열 여주지청장에 대한 정직 권고, 7명 배심원의 무죄평결을 깨고 내린 안도현 시인에 대한 전주지법의 유죄 판결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의 페북을 달군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장로님이 글을 남긴다. "목사님 이제 정치 얘기 그.만. 하시고 은혜스런 얘기 좀 하시죠!" 정말 그런 걸까? 목사는 교회라는 틀 속에서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히기만’ 해야 할까?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교회는 정치와 분리되어 때묻은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천상의 지복에 관한 이야기만 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만약 교회나 목사가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최근 WCC 총회에서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어떤 목사님처럼 ‘당연히’ 보수 권력층의 편을 들어야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회퍼는 이런 기독교를 ‘종교적 기독교’라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기독교’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추상적이며, 모호하고, 감상적인 얘기에만 몰입한다. 그리고 기득권을 옹호하고, 사람들의 종교심에 의지한다. 본회퍼는 그의 글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이런 종교적 틀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오히려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약한 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편에서서 함께하며, 권력 숭배에 저항하기 위해서라고 외친다. 그것이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아닌 생명으로서의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은 그렇다! 세상은 '종교 장치'로서의 기독교에 혐오감을 느낀다. 세상에 불의와 속임수가 난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역사의 아픔에 무감각해진 채 자기들끼리 '은혜를 나누며'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그런 종교에 염증을 느낀다. 만일 본회퍼가 살아 있다면 이런 종교적 행태들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했을까? 그가 페북을 했다면 그의 담벼락(Wall)에는 어떤 글들이 게시되었을까?/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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