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6. 29. 14:59

아슬란, 봄

나니아 영성 이야기 3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옷장을 통해 나니아에 오게된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아이들은 마치 꿈속에서 뭔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뜻은 잘 모르면서도, 그러나 너무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말, 그 말 때문에 그 꿈 전체가 좋은 꿈이 되기도 하고 악몽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말,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꿈속에서.  


사람은 왜 꿈을 꿀까요? 그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워하는 이는 꿈을 꾸지요. 사실, 종교나 예술은 인류가 꿔온 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운 것이 있기에 꾸게 된 꿈들, 보고 싶은 것이 있기에 그려본 것들 말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인류가 꾸어온 '좋은 꿈'이라고 했습니다. 꿈이지만 뭔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꿈 말입니다. 가령,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弘益人間) 신이 인간 세계에 내려왔다는 그런 신화들 말입니다. 신화는 물론 어디까지나 꿈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보다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는 꿈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신화는 힘이 셉니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기쁨” 


루이스는 어려서부터 신화 읽기를 즐겼습니다. 신화에 담긴, 신화가 일으키는 어떤 그리움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신화를 읽을 때 종종 자신을 찾아와 압도하곤 하던 그리움을 일컬어 "기쁨"(Jo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루이스가 말하는 "기쁨"은 사실,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누리는(enjoy) 무엇이라기보다는 겪는(suffer) 무엇이었습니다. 영혼을 압도해 오는 어떤 허기, 어떤 갈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은 이 세상 그 어떤 배부름이나 만족보다도 우리 영혼을 매료시킵니다. 사정없이 영혼을 후벼 파는 허기요 갈증이지만, 우리 영혼은 이 허기, 이 갈증을 몰랐던 때로 결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허기, 이 갈증을 모르고 사느니, 이 허기, 이 갈증을 껴안고 죽고 싶어 합니다. 


우리 영혼이 그리워하는 것, 죽도록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봄을 좋아하시나요? 아마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말 봄을 좋아하는 사람은 봄을 '누린다'기 보다는 봄을 '겪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루이스의 말을 풀이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봄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그저 봄을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샤워'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으로 온통 '물들고' 싶어 합니다. 그는 봄을 '입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안 되니까 울긋불긋한 옷이라도 차려 입고서 봄나들이를 가는 것인가 봅니다.) 보면, 어른들은 그렇게 봄 구경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지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애들아, 저 봄 봐라 / 창문을 열었지요. / 하지만 아이들은 / 힐끗 보곤 끝입니다. / 지들이 / 마냥 봄인데 / 보일 리가 있나요. " ("봄, 교실에서" 고준식) 


네, 어른들이 봄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들의 내면은 을씨년스럽기 때문입니다.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봄의 수혈이 필요한 것이지요. 봄의 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그 아름다움 안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고, 그 안에 잠기고, 그것을 흡입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봄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봄을 앓습니다. 봄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우리말 ‘아름답다’는 말은 ‘아리다’와 통하는 말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립니다.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리움’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움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그리움, ‘아름다움의 바다’인 하늘을 그리는 마음이 일깨워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이라는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에 잠겨서, 아름다움을 마시며, 아름다움 속을 헤엄치며, 아름다움을 호흡하며, 아름다움을 살아내며, 그렇게 그 자신이 하늘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바다 바깥으로 나와 있고, 우리 영혼은 그 바다를, 하늘을 아리도록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우리를 정말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그리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움이 살아있어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안드로포스(anthropos), 즉 ‘위를 바라보는’(ano + throsko)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앙망하고, 영원을 동경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슬란, 봄


"아슬란 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니아에서 아슬란은 봄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아니, 아슬란 자체가 봄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아슬란이 오는 것이 곧 봄이 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루시를 비롯해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옷장을 통해 들어가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땅에서 하얀 마녀에게 영혼을 팔아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비버 씨 부부를 통해 예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아슬란이 오실 때 악이 바로 잡히리라. 

그의 우렁찬 포효에 슬픔이 사라지고,

그가 이를 드러낼 때에 겨울은 죽음을 맞이하며,

그가 갈기를 흔들 때에 봄은 다시 찾아오리라.“


뭔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나요? ‘꿈’ 속에서 뭔가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꾸게 되는 꿈속에서. 



이종태 <빛과 소금> 2020. 5월호



(이미지 출처: https://bit.ly/2Bjaxm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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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코스모스, 나니아

나니아 영성 이야기 2

 

루시에게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첫 권인 『사자, 마녀, 옷장』을 절친 오웬 바필드(Owen Barfield)의 딸이자 자신의 대녀(代女, goddaughter)인 루시 바필드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헌사에 적었습니다.

 

"너는 이제 요정 이야기를 읽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지만]...하지만 언젠가는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될 게다."

 

루시는 당시 15살이었으니까 요정 이야기 책을 좋아하지 않을 나이였긴 합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루시가 언젠가는 다시 요정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아이는 크면 어른이 되지만, 어른이 성숙하면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아" 지게 되는 법이니까요. 『나니아 연대기』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또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을 나이가 [된]" 어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얻는 것도 많지만 잃어버리는 것도 참 많습니다. 인생사가,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얻는 것이 있으면 뭔가 잃어버리는 것이 꼭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고, 그래서 '세상'인 가 봅니다.


어른이 되면 잃어버리는 것들에 뭐가 있을까요? 동심(童心)을 잃게 되는데, 워즈워스의 말을 빌리자면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른들은 무지개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지요.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과학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볼 때는 아이들이 무지개를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은 아이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귀엽긴 하지만, 아직 머리가 더 커야 합니다.


인류가 이제 머리가 클 만큼 컸다고 자부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근/현대'(modern) 입니다. 무지하고 몽매(蒙昧)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계몽(啓蒙)된 시대"(aufgekläartes Zeitalter), "성인(成人)이 된 세계"(world come of age)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현대인은 더 이상 태양을 보고 절하지 않고, 무지개를 볼 때 가슴이 뛰지 않습니다. 대신, 현대인은 행성에 우주탐사선을 보내고, 프리즘을 통해 무지개 현상을 만들어내지요.


루이스는 현대 세계에서 스스로를 계몽되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해 『나니아 연대기』를 썼습니다. 현대가 잃어버린 것들, 현대 세계에서 어른들이 잃고 살아가는 것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대부(代父, godfather)가 되어준 루시가 자라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대견스러워 했겠지만, 루시가 언젠가는 현대의 보통 성인들보다 더 성숙해져서 "요정 이야기를 다시 읽는" 성인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요정 이야기를 읽어본 지가 언제입니까?

 

Faerie

 

『나니아 연대기』는 '페어리 테일'(fairy tale)입니다. 그런데 루이스와 더불어 ('페어리 테일' 읽고 쓰는 어른들 모임이었던) 잉클링스(Inklings)의 멤버였던 J. R. R. 톨킨에 따르면, 'fairy tale' 은 본래 "요정(fairies)에 대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Faire"나 "Faerie"는 원래 "요정"이 아니라, 어떤 장소(place), "요정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즉, 페어리 테일은 어떤 특별한 '장소/공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보면, 그 이야기에서는 '나니아'라고 하는 나라, 그 장소, 그 공간이 거의 하나의 '캐릭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는 이런 저런 요정들, 괴물들, 인물들이 나와서, 그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의 재미'를 찾는 분들은 『나니아 연대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고, 왜 아이들이, 또 어떤 어른들이 『나니아 연대기』를 좋아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고난 다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실 하나입니다. 바로 '나니아'라는 공간, 그것입니다. "나니아에 가보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나니아는 우리 안에 어떤 그리움을 일으킵니다. "모든 나무는 님프이고, 모든 행성은 신(神)인" 어떤 공간을 향한 그리움 말입니다. 나니아는 나무가 춤을 추고, 별들이 노래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는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입니다. 나니아가 이렇게 만물이 살아 생동하는 나라인 것은 이 나니아를 창조한 존재, 아슬란이 바로 그렇게 살아 생동하는 존재, 만물을 살아 생동하게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니아에서는 아슬란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춤판이 벌어집니다. 『마법사의 조카』에 나오듯이, 태초에 아슬란의 노래가 있었고, 그 노래를 통해, 그 노래를 따라, 그 노래에 맞춰 나니아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국(雪國)

 

그런데 이 춤판이 그친 적이 있습니다. 나니아에 축제가 금지된 시절이 있습니다. 바로, 루시가 옷장을 통해 (처음) 들어가보게 된 나니아는 "크리스마스도 없이 영원히 겨울만 계속되는" 나라, 만물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모든 것이 자기 색을 잃고 백설에 뒤덮여 있는 설국(雪國)이었습니다.

 

"나니아는 겨울이죠. 아주 오랫동안 겨울이었어요."

 

나니아에서 루시가 처음 만난 인물(?) 툼누스가 한 말입니다. 루이스는 단조로워지고 삭막해지고, 만물이 목소리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웃음을 잃고, 경이를 잃고,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세계를 동토, 설국 같은 곳으로 여겼습니다. 현대인은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주(宇宙)라는 집을 잃고, 텅 빈 공간 속을 부유합니다. 예전 사람들이 Cosmos(질서, 아름다움)라고 불렸던 우주를 이제 우리는 the Space(빈 공간)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텅 빈 우주”라는 제하의 글에서 C. S. 루이스는 “철학이 시작된 이래 일정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인간) 사유의 운동”이 있는데, 그 운동이 “모든 나무는 님프였고 모든 행성은 신(神)이었던” 세상, “풍부하고 생동했던 우주”를 “텅 빈 우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텅 빈 우주"란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유스타스가 "우리 세계"라고 부르는 그 세계입니다. 영국 학교에서 전형적인 현대 교육을 받은 그 소년은 나니아 나라에서 별 신(神) 라만두를 만나고서는 신기해마지 않으며 말합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별은 그냥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가스 덩어리이거든요!” 그 아이에게 라만두가 한 대답은 실은 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현대세계에 던지고자 했던 일성(一聲)이었습니다.

 

“얘야, 사실 너희 세계에서도 별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곧 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란다.”(Even in your world, my son, that is not what a star is, but only what it is made of.”)

 

“가스 덩어리가 아니라면, 그럼 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진지하게 여러분에게 와닿았다면, 이제 여러분은 페어리 테일을 다시 읽을 준비가 되신 것입니다.

 

 이종태, <빛과 소금> 202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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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나니아 영성 이야기 1)

영성 생활/수필 한 조각 2020. 4. 24. 21:33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나니아 영성 이야기 1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


루이스는 세상이 달리 보이게 만들어주는 작가입니다. 제게는 그렇습니다. 사후 60여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의 글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글을 읽고, 또 글을 쓰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것 때문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이 달리 보이는 체험을 선물로 받고, 또 선물로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우리더러 '달라지라'고 (닦달)하는 소리들로 가득합니다. 너가 달라져야 성공할 수 있다, 너가 달라져야 행복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들 말합니다. 


서점에 가보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심지어 교회 강단에서도 그런 말들이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우리를 달라지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잠깐 뭔가를 결심하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그런 결심은 오래가지도 못하고,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만들어주는 건 '결심'이 아니라 '회심'이기 때문입니다. 회심(回心), 마음의 근본적 변화, 말입니다. 


사람은, 세상이 달리보일 때 비로소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구원을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닫혔던 눈이 열리는 것, 그래서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회심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게 된 어떤 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전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것이지요. 


루이스는 '보는 눈'을 강조한 작가였습니다. "많은 것이 보는 눈에 달려 있다"(Much depends on the seeing eye)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이들이 쓴 글들이,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세상을]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세계는 커집니다. 특별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이의 글은 우리를 더 큰 세계 안으로 이끌어 들이고, 우리로 그 안에서 성장하게 해줍니다. 


제게는 루이스의 글이 그런 더 큰 세상을 보게 해주는 눈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지면에 얼마간 연재될 저의 글은 그 눈으로 보게 된 세상에 대한 저의 간략한 탐험기입니다.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는 아이


기억하십니까? 「사자, 마녀, 옷장」에서 그 페벤시 가(家) 아이들이 한동안 머물렀던 한 노(老) 교수의 집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저택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그 집 안을 탐험하다 루시는 "커다란 옷장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을 발견하게 되고, 그 옷장 안에 들어가 보았다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거대한 모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게 되지요. 


루이스에게 세계는 바로 그런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커다란 집과 같은 곳이고, 저와 여러분은 그 집안 곳곳을 탐험하는 아이가 되라는 초대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마 18:3)라는 초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에게는 세계는 집과 같습니다. 텅 빈 공간이 아닙니다. 가득한 장소입니다. 엄마가 있고, 규칙이 있고, 친한 동물이 있고, 놀 것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루이스가 우리로 상상해보게 하는 집은 아주 거대한 집,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집, 많은 비밀의 방들이 있는 집입니다. 그 나니아 작가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우주가 바로 그런 집이라는 것입니다. 집 우(宇), 집 주(宙), 우주(宇宙)라는 집, 말입니다. 


이런 우주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기를 초대하는 이야기가 바로 「나니아 연대기」입니다. 나니아 이야기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모험은 아슬란이라는 무시무시하도록 선한 존재가 다스리는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모험입니다. 나니아라는 우주, 집 안 탐험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집에서만 모험할 수 있습니다. 집을 떠난 사람, 집이 없는 사람은 모험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뿐,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모험은 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이 있고, 그 땅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창 12: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이 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 24:1).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아래 땅에서만 모험을 감행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게 길을 떠나, 태초부터 이어지는 모험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태초의 말씀과 종말의 노래를 확신하는 사람만이 태초와 종말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들을 믿고, 전하고, 짓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루이스가 지은 이야기 「나니아 연대기」는 우리로 태초에 있었던 말씀과 종말에 있을 노래를 듣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뜻 있는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성경 이야기를 닮은 이야기이고,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주는, 다시 말해 우리를 나 자신이라는 좁은 곳에서 꺼내 하나님의 세계라는 “넓은 곳”(시 18:19)으로 데려가주는 힘을 가졌습니다. 나니아 이야기의 마력으로 눈을 떠 보게 되는 세계는 얼마나 아득하고 까마득한 신비인지요(天地玄黃 宇宙洪荒)!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세계, "생각지 못한 장소들로 가득"한 세계입니다. 이 세계의 창조자인 아슬란을 두고 ”위험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루시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위험하지요. 하지만 선한 분이세요.“나니아 이야기가 보여주는 믿음의 삶이란 이 위험(危險)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탐험(探險)하고 모험(冒險)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삶입니다. 커다란 집 안을 탐험하며 비밀의 방 옷장을 열어보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부활 생명의 삶은 결코 소심하거나 무거운 삶이 아닙니다. 이는 기대 넘치는 모험의 삶, 어린아이처럼 늘 하나님께 ‘다음은 또 뭐죠, 아빠?’라고 묻는 삶입니다.”(롬 8:15 메시지성경)


이종태, <빛과 소금> 202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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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기타/영성 관련글 2017. 5. 4. 15:11

기독영성가 읽기

C. S. 루이스 : 하늘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종태

그림자나라

《새도우랜드》(Shadowlands)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간디》(1982)의 감독자로 유명한 리차드 아텐보로(Richard Attenborough)의 1993년 작(作)으로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 받았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안소니 홉킨즈(Anthony Hopkins)와 데브라 윙거(Debra Winger)가 주연을 맡아 열연했는데, 어떤 비평가는 안소니 홉킨즈가 출연한 영화들 중 이 영화를 최고로 뽑기도 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영문학을 가르쳤던 C. S. 루이스와 미국 출신 작가 조이 그레샴(Joy Gresham)의 만남과 결혼과 사별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멜로드라마적 재미와 비극적 감동을 넘어 관객들을 삶과 사랑과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종교적 물음으로 인도해주는 영화입니다.


C. S. 루이스(1898-1963)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만약 저서의 판매량과 인용횟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난 세기 영미권 기독교계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고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저술가의 자리는 이 옥스브리지(Oxbridge) 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이견(異見)을 달 역사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계에서 루이스는 주로 《순전한 기독교》와 같은 기독교 변증서를 남긴 저술가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계 밖에서는 루이스는 판타지 문학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서 더 유명합니다. 7권으로 구성된 이 연대기의 마지막 책인 《마지막 전투》는 아슬란의 창조물인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는데, 나니아의 종말을 보면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루이스는 한 작중 인물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보렴. …그건 진짜 나니아가 아니란다. 그 나니아는 시작과 끝이 있었지. 그것은, 언제나 여기 이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진짜 나니아의 그림자나 사본에 불과해. 우리 세계인 영국과 다른 모든 나라가 아슬란이 계시는 진짜 세계의 그림자(shadow)나 사본(copy)인 것과 마찬가지이지. 루시, 나니아 일로 슬퍼하지 말아라. 옛 나니아에 있던 모든 귀중한 것들과 소중한 짐승들은 다 그 문을 통해 진짜 나니아로 들어왔으니까. 물론 다르기야 하지. 실물이 그림자와 다르고, 생시가 꿈과 다르듯이 말이다.”

루이스는 서구 기독교 신학과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히포의 주교 어거스틴(354-430)처럼 플라톤 철학을 창조적으로 이용해 복음적 세계관을 설파한 사상가요 영성가였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땅’, 즉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 영원한 진짜 세계의 사본이요 그림자입니다. 플라톤의 제자들은 스승의 철학을 이원론으로 발전(혹은 변질)시켰지만,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초기교회 교부들(Church Fathers)은 이 땅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건 저 하늘에 있는 ‘진’ ‘선’ ‘미’가 있기 때문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참 철학’인 기독교의 ‘말씀’의 신학과 영성으로 인도해주는 ‘몽학선생’(paidagogos)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교부들은, 또 어거스틴과 루이스는 하늘의 진선미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Logos)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고스가 바로 이 세상 모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흘러나오는 궁극적 원천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움

이런 식의 생각, 철학, 신학은 특유의 영성을 낳았는데, 바로 ‘하늘을 그리워하는’(eros) 영성입니다. 사람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 모든 ‘좋은’ 것들을 사랑하기 마련인데,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하늘’에 있는 실체(reality)의 ‘그림자’나 ‘사본’에 불과한 것들이기에, 이 땅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할수록 사람은--그리스도인이라면 더더욱!--‘하늘’을 동경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로서의 루이스의 공헌은 무엇보다, 여러 이유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희미해진 이런 영성을 현대인이 지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고 상상력을 통해 공명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해주었다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루이스는 이런 영성을 ‘(천국)소망’이라는 신학적 범주에 넣어 다음과 같이 설명/변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볼 줄만 안다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그것도 가슴이 아플 정도로(acutely)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국)소망’에 대한 루이스의 변증은 루이스 자신의 ‘실 체험’(lived experience)에 바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은 영적 회심기라 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루이스는 그가 “기쁨”(Joy)이라고 명명한 특별한 종류의 그리움에 대해 묘사하는데, 가슴을 벅차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아리게 만드는, 황홀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가져오는 그런 그리움이야말로 “내 인생 이야기의 주된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기독교로 회심한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집필한 책인 《순례자의 귀향》도 루이스의 “기쁨의 영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루이스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 존은 어느 날 어떤 “섬”을 흘낏 보게 되는데, “신처럼 지혜롭고 짐승처럼 자의식이 없는” 존재들이 거하는 그곳을 향한 가슴 아린 갈망에 존은 “흐느껴 울”게 됩니다. 《순례자의 귀향》은 자신을 울게 만든 그 “기쁨”을 추구하며 그 “거짓 대상들을 하나하나 밝히고 거짓임이 드러나면 단호히 내버리는” 길을 걸었던 루이스의 철학적 여정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가 지닌 고유한 풍취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루이스는 하나님(“동쪽 산” “지주님”)을 믿기 전에 “하늘/초월/궁극적 실재”(“섬”)를 추구했으며, 그의 신학과 영성은 그 “섬”이 실은 “동쪽 산”의 일부라는, 즉 하나님은 “하늘의 님”이시라는 발견과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늘” 이야기를 “wishful thinking”이라 하여 의심하고 조롱하는 서구 근대 시대정신의 눈치를 보는 서구 신학자들과 달리, 루이스는 “하늘” 이야기를 철학과 신학 담론의 중심에 끌어들여,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thoughtful wishing”이 어떻게 우리를 진리/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늘

루이스는 독창적인 신학사상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사상들은 다 교부들을 비롯하여, 보편적(catholic) 교회의 지적 영적 전통에 전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한 그리움’(Joy)에 대한 문학적 묘사와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그는 그 어떤 기독교 작가보다도 탁월했고 독창적이었습니다. 루이스는 천국/하늘/초월을 향한 인간의 ‘불멸의 그리움’을 자신의 내적 여정과 인간실존을 이해하게 하는 실마리로 보았고, 더 나아가 복음전도를 위한 일종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았습니다.


천국소망을 영성과 전도의 중심으로 삼았던 루이스는 ‘도피주의자’였을까요? 뜻밖의 답변으로 사람들을 놀래게 만들기를 즐겼던 루이스는 아마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피(escape/탈출)에 대해 반대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간수임에 틀림없다.” 루이스에 따르면, 하늘/천국/초월에 대해 닫혀 있는(immanent frame)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이야말로 좁디좁은 감옥 안에 갇혀 지내는 수인(囚人)들입니다.

루이스가 말하는 천국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고 또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그 삼위일체 댄스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죽음 너머 누리는 개인적 행복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천국을 희망하는 것은 실은 자기 건강을 돌보는 일이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하는 일 같이 실은 종교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 천국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 되는 곳으로서, 천국 소망은 하나님 자신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르는 필연적 결론 같은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천국을 희망하고 누리기 위해선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누리고 싶어 하는 갈망’(appetite for God), 요즘 말로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갈망, 소망은 결코 도피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역사를 읽어보면, 이 세상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에 마음이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었다고 루이스는 강조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이토록 무기력해진 것은 그들이 내세에 대해 더 이상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지향하라. 그러면 당신은 천국도 잃고 이 세상도 잃어버릴 것이다....우리가 우리의 문명만을 주된 관심사로 삼을 때는 우리는 이 문명을 구원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문명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상’은 이 세상 너머의 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갈망을 불온시합니다. 왜냐하면 이 갈망은 이 세상을 안으로부터 전복시키는 혁명적 힘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이의 마음에 ‘하늘을 향한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루이스의 글들은 분명 스크루테이프(루이스가 쓴 동명의 소설에 나오는 원로급 악마)의 불온서적 목록 상단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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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미국 GTU에서 영성학을 공부했다. 'C. S. 루이스의 경이의 영성'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현재 한남대 등에 출강하며 서울여대 대학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C. S. 루이스 저서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시편 사색》, 네가지 사랑》, 기적 등을 번역했다.



- <빛과 소금> 2017년 4월호



posted by 산처럼

백투더클래식 서문 :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백투더클래식 2015. 7. 6. 19:48

《백 투 더 클래식: 영성 고전으로 오늘을 읽다》, 이 책은 말 그대로 '공동의 열매'이다. 글의 착상 단계부터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아홉 명의 필자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주로 '구글 문서(google docs)'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협업이 이루어졌지만, 필요하면 전화 통화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모두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고 서로를 격려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2년 동안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영적 여정을 함께 걸었다. 저자 중 한 분의 표현대로,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

책에 실린 편집자 서문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이 서문은 온라인 서점의 '미리보기' 메뉴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인쇄된 책에서는 의도치 않게 원고에 있던 각주 두 개가 빠졌는데 아래에는 다시 달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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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날씨로 비유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의 모래바람에 상상력과 경이가 메말라가는 건조한 날씨가 아닐까? 마치 현대 도시에서 동물들은 주위에서 사라져가고 동물원 우리 속에 격리되는 것처럼, 오늘날 상상력은 《해리 포터(Harry Potter)》와 같은 판타지 소설이나 〈겨울왕국(Frozen)〉과 같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 속에 가두어져 버린 듯하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아이들도 ‘공주 드레스’나 ‘파워레인저 가면’을 벗을 나이가 되면, ‘유치한’ 상상력도 함께 벗어 버리고 과학적 사고라는 안경을 낀 건조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은 그 현존이 점점 엷게 인식되어지고, 대신 이해하기 힘든 교리를 통해 이론적으로나 접할 수 있는 분으로 제한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 영성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이성주의 시대에 저항하는 ‘불경한’ 그러나 용기 있는 행동이다. 

     저명한 영성학자 아서 홀더(Arthur G. Holder)에 의하면 ‘영성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러 세대의 독자들의 삶에 깊은 변화를 일으킨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글”이다.[각주:1] 가장 1차적인 기독교 영성 고전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이다. 그런데 성서는 굳이 영성 고전으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에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성 고전이라고 할 때에는 성서 시대 이후 기록되어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으며 꾸준히 읽히는 작품들을 말한다. 물론 어떤 특정한 텍스트가 영성 고전의 범주에 들어가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보통 이 범주에 포함되는 글들은 저자들이 삶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영적 진리와 경험을 담고 있다. 그래서 독자가 글을 통해 저자들이 전하는 지혜와 경험에 접촉하게 되면, 그것들은 더 이상 종이 위의 문자로 존재하지 않고 독자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살아난다. 마치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새벽 출정호의 항해》 에서 에드먼드와 루시가 벽에 걸린 바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액자에서 바닷물이 쏟아져 나와 조그만 방이 나니아의 세계로 변하는 것처럼, 영성 고전에 담긴 지혜와 경험은 독자의 현실로 쏟아져 나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님의 신비로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이처럼 영성 고전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현재적인 영적 경험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기도 하고, 또한 과거와 미래의 영적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유용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항상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주목받는 일본의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佐々木中)는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내면에서는 변화에 저항하는 “방어기제”가 자연스럽게 작동하여 독자로 하여금 책이 어렵고 무료하다고 느끼게 하거나 감동받은 내용도 쉽게 잊게 만든다고 지적한다.[각주:2] 특히 대부분의 영성 고전 작품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시대와 장소와 문화 속에서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기에 “방어기제”가 작동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 책의 필자들은 기독교 영성학(Christian Spirituality)을 전공하며 읽고 배운 고전 작품들을 한국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2012년부터 팀블로그(spirituality.co.kr)를 중심으로 〈산책길 기독교영성고전학당〉을 시작하였다. ‘산 책(living books)’을 ‘길’로 삼아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가자는 의미이다. 아직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학위 과정 중에 있는 학생의 신분이라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블루아의 피터(Peter of Blois, c.1130–c.1203)의 말처럼 독자들과 함께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이 되어 비록 “우리의 소견은 일천(日淺)할지라도, 영적 거장들의 어깨 위에 선 덕분에 우리는 그분들보다 더 높은 식견을 가지고, 바른 신앙의 길을 전망할 수 있게”[각주:3] 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글들을 독자들 앞에 내어 놓는다. 

     이 책의 아홉 명의 필자들은 고전 작품과 저자를 선정할 때에 가능한 한 다양한 시대와 전통을 아우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많지는 않지만 여성 신비가들과 한국 저자들, 평신도들의 작품들도 포함함으로써 ‘서구’, ‘남성’, ‘성직자’들의 작품에 경도되지 않고 영성 고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여기에 실린 스물세 편의 에세이들은 2013년과 2014년에 기독교 월간지 《복음과상황》의 ‘백투더클래식’이라는 꼭지에 연재된 글들이다. 원래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고전 작품과 현대의 이슈 사이에 가교를 놓는 것이며, 또한 시사 주제를 다루는 월간지의 특성상 이 책에 실린 글들에는 잡지에 게재될 당시 유행한 영화, 게임, TV 프로그램, 또는 사회적 이슈 등에 대한 언급들이 의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이 이 에세이들을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고전의 본질적인 특징, 곧 시간을 초월하는 항구성과 장소를 넘어서는 보편성 때문이다. 영성 고전에서 얻은 지혜로 현대의 교회와 사회를 진단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글들은 독자들에게 이 책에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현대 이슈들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독자들의 형편이 되는대로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을 교회나 공동체의 소그룹 멤버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복음과상황》에 게재된 글에서 제목과 잘못된 정보들을 일부 수정한 것들이다. 그리고 글의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묶고 순서를 새롭게 배열하였다. 먼저 제1부 “신비와 경이”에서는 온 우주는 물론 우리의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비’ 또는 ‘경이(wonder)’와의 만남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신비’라고 하면 비현실적이고 미신적인 어떤 기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 때로는 육체적인 관계 속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끊임없이 여행하는 신비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신랑으로, 어머니로, 또는 연인으로 경험되기도 하는데 이 경험의 중심에는 믿음과 사랑이 놓여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비와의 접촉점이며, 사랑만큼 놀라운 신비가 없다. 이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면학심, 곧 “별을 노래하는 마음”[각주:4]을 품어야 하며, 우리의 영적 감각이 훈련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제2부 “훈련과 형성”에서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성은 무엇이며, 그러한 영성으로 형성되기 위한 영적 훈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들을 모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소비주의 사회의 뿌리에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존재한다. 욕망은 거짓 자아의 가면을 만들기도 하고, “강철 우리”와 같은 사회구조, 의식, 습관을 만들기도 해서 그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생각과 삶을 구속한다. 변화는 “자기 사랑의 우리”로부터 벗어나는 “진정한 회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의존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사막’으로 떠나는 급진적인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성자 프란치스코는 이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고상한 욕망을 가졌던 그의 발자취는 우리를 청빈과 섬김의 삶으로 초청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영적 규칙을 공유하는 공동체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때로는 타락한 제도권 교회 밖에서 길을 찾은 이들도 있지만, 이들 옆에는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3부 “이웃과 정의”에서는 영성의 사회적 측면과 관련된 글들을 모았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영성이 한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초월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와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오해가 편만하다. 그러나 영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에 동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공공의 부를 공평하게 나눠가지지 않고, 다른 이들이 가난으로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방치한다면 도적질과 살인을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교클럽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구원의 복된 소식은 소유와 배움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이들에게 흘러가야 한다. ‘순수 기독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불의에 분노해야 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도록 분투한 예언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비리디타스(viriditas)”, 곧 만물에 깃든 생명력을 통해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 생태계가 회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돌아보면 이 책은 〈산책길〉 팀블로그에 게재된 이종태 목사님의 “큐리오시티”라는 글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을 《복음과상황》의 옥명호 편집장님이 읽고, 신생 단체인 〈산책길〉에게 소중한 잡지의 지면을 내어 주셨다. 지난 2년 동안 원고를 깔끔하게 편집해서 인쇄해 주신 《복음과상황》 편집부 식구들께 필자들의 마음을 모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어려운 기독교 출판 여건 속에서도 무명의 필자들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어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도서출판 예수전도단과 홍지욱 팀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학당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팀블로그 댓글과 SNS 등을 통해서 응원해주신 독자들은 이 책의 숨의 공로자들이며 〈산책길〉의 소중한 길벗들이다. 독자들께서 책을 읽다가 발견하는 부족한 부분들을 일깨워 주신다면, 다음 글을 위한 귀중한 밑거름으로 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들이 바쁜 학업과 목회 가운데서도 〈산책길〉 활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나아가 글을 챙겨 읽고 조언해 주신 필자들의 아내들께도 진심 어린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2015년 5월

저자들을 대신하여

권혁일


백투더 클래식 Back to the Classics

저자
권혁일 지음
출판사
예수전도단 | 2015-06-29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기독교 영성 고전(Christian spiritual class...
가격비교


  1. Arthur Holder, ed., Christian Spirituality: The Classics (New York: Routledge, 2010), xiv. [본문으로]
  2.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서울: 자음과 모음, 2012), 40. [본문으로]
  3. 남기정, 책 139-140쪽. [본문으로]
  4. 이종태, 책 27쪽. [본문으로]
posted by 바람연필

봄 안으로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5. 3. 24. 05:52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도 대단한 혜택이지만 우리는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무언가를 원합니다. 우리가 보는 아름다움과 연합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그 안에 잠기고, 그 일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C. S. 루이스, 《영광의 무게》 (홍종락 옮김, 홍성사), 30.


'봄'이 '보다'는 말에서 왔다는 말이 있다. 


봄은 참 보기 좋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루이스의 말을 들어보니, 

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저 봄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친히 

봄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내 마음과 몸 자체가 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 그래서

봄에는 다들 그렇게 화사한 옷을 차려입는 것이구나. 

봄에 마음이 이렇게 들뜨는 이유도 그래서구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다. 

예복을 갖추어 입고서, 

천사들과 동물들이 장난질치는 

하늘 천국 잔치 자리에. 


봄은 

하늘이 땅에 닿을 듯 내려와

땅을 간지럽히는 절기다. 


부활 절기다.


/ 이종태 


posted by 산처럼

갈망의 변증법

“갈망의 변증법”

《순례자의 귀향》  The Pilgrim's Regress

C. S. 루이스 지음 ·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3 단평 



"한번은 그리피스와 바필드가 내 방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데, 내가 얼결에 철학을 "학과(subject)"라고 지칭했다. 그러자 바필드가 말했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학과(연구주제)가 아니었지. 삶의 방식(a way of life)이었지.'"


루이스의 회심기《예기치 않은 기쁨》에 나오는 장면이다(p. 323). 그 때 자기 말이 "경솔했"다고 말하는 루이스는 실은 평생에 걸쳐 더없이 진지한 철학도였다. 루이스에게 철학은 단순히 학문이 아니라 구도(求道)였고, 그 구도의 길 끝에서 그는 '참 철학'(True Philosophy)으로서의 기독교를 만났다.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은 "감정적 회심이 아니었고, 거의 순전히 철학적 회심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회심 후 쓴 첫 기독교 저술인《순례자의 귀향》은 그의 회심이 실은 그의 ‘철학적 여정'의 결과였음을, 20여년 후에 쓰인 《예기치 않은 기쁨》보다 더 여실히 펼쳐 보여준다. 그래서 두 책 모두, 특히 루이스가 아직 "쉽게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쓰인 앞의 책은 더, 어렵다.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러나 두 책 모두, 철학에 문외한인 독자들까지도 끝까지 존/루이스의 여정을 따라가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바로, 루이스/존의 “순례”길을 처음부터 추동(推動)한 그것, “기쁨”이다. 


《순례자의 귀향》은 루이스가 "갈망의 변증법"(dialectic of desire)이라고 부른, 사람을 영적 순례자로, 철학적 구도자로 만드는 “기쁨”에 대한 책/알레고리이다. 존은 그만 그 “섬”을 흘낏 보게 되고 말았다. “신처럼 지혜롭고 짐승처럼 자의식이 없는” 존재들이 거하는 그곳 말이다. “신처럼 지혜롭고 짐승처럼 자의식이 없는” 이라는 문장에서 방금 당신이 멈칫 했다면, 아마 당신도 언젠가 그 “섬”을 본 적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그 세계 밖에, 그 문 밖에”(‘영광의 무게’) 처한 존재로 느꼈던 순간 말이다. 그 순간, 존은 “흐느껴 울었다.” 


존은, 루이스는 자신을 흐느껴 울게 만든 그 “기쁨”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 길에서 만난 각종 인물/사상들과의 조우와, 그(것)들과의 논쟁은, 알레고리 작품의 전형을 따른 것으로서, 루이스 당대 지성사, 문화사에 대한 적요이자, “기쁨”을 추구하며 그 “거짓 대상들을 하나하나 밝히고 거짓임이 드러나면 단호히 내버리는” 길을 걸었던 루이스의 철학적 여정의 궤적이다. 여기서, 《순례자의 귀향》은 루이스가 기독교로 회심한지 겨우 1년 정도 되었을 때 2주 만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작품임을 기억하자. 여러 비평가들은 루이스 사상의 집 골조는 이미 이 때 거의 완성되어 있었고,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가 지닌 고유한 풍취의 연원이 여기 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루이스는 하나님(“동쪽 산” “지주님”)을 믿기 전에 “하늘/초월/궁극적 실재”(“섬”)를 추구했으며, 그의 신학과 영성은 그 “섬”이 실은 “동쪽 산”의 일부라는, 즉 하나님은 “하늘의 님”이시라는 발견과 깨달음에 기초하고 있다. “하늘” 이야기를 “wishful thinking”이라 하여 의심하고 조롱하는 서구 근대 시대정신의 눈치를 보는 서구 신학자들과 달리, 루이스는 “하늘” 이야기를 철학과 신학 담론의 중심에 끌어들여,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thoughtful wishing"이 어떻게 우리를 진리/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흔히들 루이스가 “영적 갈망”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하늘”의 존재를 논증했다고 하나, 루이스의 “갈망 논증”은 실은 그가 “삶으로 살아낸” 논증(lived ontological proof)이었고, 그렇기에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신처럼 지혜롭고 짐승처럼 자의식이 없는” 이라니. 그 “섬”을 정말 본 것이 아니라면! 하늘을 맛본 사람의 글에서는 하늘이 엿보일 수밖에. /이종태


홍성사 쿰회보 (2013년 12월호) 게재







순례자의 귀향

저자
C. S. 루이스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3-11-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C. S. 루이스가 회심 직후 쓴 자전적 소설 이 책의 주인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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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산처럼

침묵이신 주님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4. 8. 7. 02:43

......침묵이신 주님, 저를 엄습하시어, 저를 

제가 가진 사상으로부터, 당신에 대해 가진 사상으로부터도 자유케하소서. 


C.S. Lewis, “The Apologist’s Evening Prayer,” in Poems, ed. Walter Hooper (London: Geoffrey Bles, 1964), p. 129.


하나님은 '뛰어 넘는'(transcend)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뛰어 넘으시고, 우리 상상도 훌쩍 뛰어 넘으신다. 인간이 하는 생각과 상상이란 기껏해야 '말'이다. 말을 잃어야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분을 만났다면 말이 많을 수 없다. 대신 '침묵'에 들어간다. '말씀'이라고도 불리는 그 '말을 뛰어넘는' 세계에. / 이종태


'변증가의 저녁기도' 

C. S. 루이스


구원하소서. 제가 당한 쓰라린 패배들로부터, 아니, 

제가 거둔 듯 보이는 모든 승리들로부터 더욱!

당신을 위한답시고 쏘아댔던 저의 영리한 말들, 

청중은 웃었지만, 천사들은 울었지요. 

표징을 보이시지 않는 당신이건만, 당신 신성을 입증해보이겠다며 

제가 해보인 모든 증명들로부터, 저를 구원하소서. 


인간의 사상이란 그저 지어내는 말들일 뿐, 저로,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빈약한 이미지에 불과한 것들을 믿고 의지하지 말게 하소서. 

오, 온당한 침묵이신 주님, 저를 엄습하시어, 저를 

제가 가진 사상으로부터, 당신에 대해 가진 사상으로부터도 자유케하소서. 

좁은 문과 바늘 귀의 주님, 

잡동사니 같은 제 생각들을 모조리 치워주시어, 

저로 그것들과 더불어 멸망 당하지 않게 하소서. 


'The Apologist’s Evening Prayer'


From all my lame defeats and oh! much more

From all the victories that I seemed to score;

From cleverness shot forth on Thy behalf

At which, while angels weep, the audience laugh;

From all my proofs of Thy divinity,

Thou, who wouldst give no sign, deliver me.


Thoughts are but coins. Let me not trust, instead

of Thee, their thin-worn image of Thy head.

From all my thoughts,

even from my thoughts of Thee,

O thou fair Silence, fall, and set me free.

Lord of the narrow gate and the needle’s eye,

Take from me all my trumpery lest I die.



posted by 산처럼

땅 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씨앗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4. 3. 7. 03:00


"물론 우리는 고난이 올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배워 알고 있습니다. 미약하나마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바치라고요. 하지만 그렇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1956년 4월 26일자)


"늘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처럼 모든 좋지 않은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발적인 가난이나 참회고행 못지 않은 영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지요."(1956년 8월 3일) 


"부인께서도 분명 아시겠지만 (고통이나 재정적 어려움 등에 직면했을 때) 삶을 하루하루 시간시간 살아 내는 것이 비결입니다. 과거나 미래를 현재에 끌어들이지 않고서 말입니다. 마치 최전선의 군인들처럼 '폭격도 그친 상태고, 비도 내리지 않고, 식량도 도착했으니 마음껏 즐기자'. 이런 자세 말이죠. 사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지요. '그날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고요."(1957년 10월 20일자)


"[스스로를] 땅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는 씨앗이라고 …… 생각해 보세요. 정원사가 정한 때에 꽃으로 피어나기를, 진짜 세상으로 올라가기를, 진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씨앗 말입니다. 저는 현세의 삶은 그 세상에서 돌이켜보면 비몽사몽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꿈나라에서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새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순간보다 지금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963년 6월 28일자) 


- C. S. 루이스, <루이스가 메리에게>(서울: 홍성사, 2009)


사순절(Lent)이다. 

'고난' '훈련' '참회' 등이 주제인 절기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 자체가 사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치의 고난이 견딜만하다. 

오늘의 fast 뒤에는 feast가 있을 것이기에. 


그래, 믿음으로 살자. 

하루하루 살자. 


하루하루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하루하루

베풀어주시는 일용할 행복에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허락하시는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며


그렇게 하루하루


이 '40일' 동안

하루하루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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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신비 (C. S. 루이스)

한 줄 묵상 2013. 11. 19. 13:34

즐거움은 추억될 때 만개(滿開)한다. 

(A pleasure is full grown only when it is remembered.)


- C. S. 루이스, <침묵의 행성 밖에서>, 홍성사 (인용부분은 필자 역)


요즘 <응답하라 1994>(응사)가 인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응사가 재미있는 건 꼭 응사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응사를 통해 우리 각자가 자기 옛 추억을 떠올리기 때문인 것 같다. 


일찍이 어거스틴이 그랬던 것처럼 C. S. 루이스도 인간 영혼의 활동인 '기억'(memory)의 신비에 대해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는 흔히 "기억이 과거를 미화시킨다"고들 하지만, 정말 기억이 "미화"시키는 것 맞느냐고 물었다. 실은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에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오늘 제대로 보게 되는 건 아니냐고, 말이다. (<개인기도>(홍성사) p. 179)


다시 말해, "과거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잘 볼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오늘 나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혹,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에는 아주 잘 보이게 될 아름다움들을, 감사제목들을, 너무 가까이 있어서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 이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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